편안할 녕(寧), 넘을 월(越).......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의 이름을 

왜 '편안하게 넘어간다'는 뜻의 영월(寧越)로 불렀을까?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고 해서 영월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하는데......

 

인구 5만명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고장 영월에는 의외로 볼거리, 체험거리가 많다.

어린 왕 단종의 한과 눈물이 서린 청령포와 장릉,

시선 김삿갓의 풍류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동강과 서강,

구절양장 돌아가는 강물이 하늘을 담은 어라연, 한반도 지형,

동강사진박물관, 책박물관, 화석박물관, 아프리카미술박물관을 비롯한 수많은 박물관,

아나로그적인 감성이 물씬 묻어나오는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지 별마로천문대와 청록다방......

 

 

 

 

문득 북쪽으로 차를 몰아 영월로 향한 여행의 첫걸음은 어린 왕 단종의 슬픔이 담겨 있는 청령포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알려진 청령포는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청령포를 270도로 휘감아 흐르는 서강은 폭이 좁지만 수심이 깊어 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는 천혜의 감옥이었다.

 

 

 

 

청령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계단을 통해 강가로 내려오니 유람선 몇척이 여행객들을 손짓하고 있다.

입구에서 지불한 입장료 2000원에는 서강을 건너는 도선료가 포함되어 있어

바로 유람선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지만 수심이 깊어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곳.

스피커에서 흐르는 트로트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람선은 청령포쪽 선착장에 닿았다.

동글동글한 돌이 깔린 자갈밭 뒤로 푸르게 우거진 숲이 시야를 압도한다. 청령포다.

 

 

 

 

아름드리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단종이 홍수로 인해 영월 동헌의 객사로 옮길 때까지

2개월 남짓 비통한 생활을 보냈던 단종어소의 모습이 드러난다.

 

 

 

 

대문 하나 없는 담장 안으로 들어서니 담장 왼쪽에는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했던 초가 행랑이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깨끗하게 복원된 기와집 한채와 단종어소임을 알리는 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조 2년(1456),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상왕 복위를 도모하다 참형에 처해진 이듬해 6월,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당하고 다음날 이곳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고 만다.


 

 

 

단종어소 내부는 가구와 이불, 서안  몇개가 놓여 있을 뿐이고

한쪽 방에는 갓 쓰고 푸른 도포를 입은 단종과 그에게 절을 하는 선비, 관노 등의 인형이 초라하게 놓여 있다.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결국에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사면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오도가지도 못하는 곳에 유배되어 버린 단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조그마한 반닫이 위에 놓여진 초라한 이부자리가 그당시 단종의 처한 서글픔을 소리없이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단종어소를 돌아보면 특이한 것은 주변을 감싼 소나무들이 단종어소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나무 한 그루는 아예 담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까지 가지를 뻗었다.

 

 

 

 

청령포로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의 동생이자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사사되고 만다.

노산군은 다시 강등되어 서인(庶人)이 됐고,

결국 1457년 10월 24일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니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차디찬 시신으로 동강에 버려진 어린 임금이 안타까워 소나무조차도 어소를 향해 허리를 굽힌 것일까......


 

 

 

어소를 떠나 쪽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숲 한가운데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밑둥에서부터 갈라진 줄기가 하늘까지 뻗어 30m나 자란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나무의 수령을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단종의 비참한 유배 생활을 보고

단종의 절규와 슬픔을 들은 소나무라고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관음송을 지나 소나무 숲 뒤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노산대 쪽으로 올라본다.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검은돌로 마구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단종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오는 망향탑이다.

 

 

 

 

망향탑에서 조금 더 가니 단종이 거의 매일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가 자리잡고 있다.

 

 

 

 

몇 사람이 겨우 비집고 설만한 좁은 꼭대기에는 노산대(魯山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단종이 서서 한양을 바라보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어린 단종이 매일 올라서 한양 쪽을 바라 보았던 노산대의 가파른 벼랑 아래로는 초록빛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넘어갈 수 없는 저 강물과 첩첩이 에워싸인 산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아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노산대 위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가슴을 에이는 듯 싸늘하게 느껴진다.

 


 

 

노산대를 돌아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 비석 하나가 숲 가장자리에 서 있다. 금표비(禁標碑)다.

이는 이곳에 일반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영조 때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뒷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가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승정 99년'

이란 뜻으로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린 단종의 서러움이 깃든 곳이지만 청령포의 강물은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푸르기만 하다.

많은 사람이 청령포에 와서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떠나지만

스쳐 지나가는 영월에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머물러버린 이가 있다.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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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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