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금관총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서리 고분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봉황로라는 도로의 동쪽은 봉황대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고분과 금령총,식리총이 있는 노동리 고분군이고

봉황로의 서쪽은 금관총, 서봉총을 비롯하여 14기의 고분이 운집한 노서리 고분군이다.

그중에서도 봉황대 바로 맞은 편의 금관총은 고분인지 언덕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고분이다.

 

 

 

 

금관총에 이르러보니 아뿔사.....벌써 발굴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금관총을 빙 둘러 녹색의 울타리가 쳐져 있고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중이다.

금관총 발굴 전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 황급히 찾아왔지만 이미 키높이의 울타리가 금관총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까치발을 들고 울타리 너머 팔을 쭈욱 뻗어 노파인더로 찍은 후에야 겨우 몇장을 건질 수 있었다.

 

 

 

 

금관총은 우리나라 고분 중에서 가장 먼저 신라금관이 출토된 곳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1927일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씨가

증축을 위해 뒷뜰을 팠는데 그곳에서 금팔찌, 금허리띠, 유리옥 등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유물은 문화재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한눈에 봐도 예사 것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경주경찰서의 일본인 순사 미야케 요사는 소문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고 서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현장에서 오래된 청동 및 금제품, 유리옥 등 유물을 확인했다.

유물로 보아 왕릉이나 귀족 무덤의 중심부라 생각되며 유물을 현장에 보관했으니 지휘를 바란다.”

국보 제98호 신라 금관이 처음 발굴된 금관총(金冠塚)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보 제 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문화재청 자료)

 

 

그러나 당시 금관총 조사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나흘간 유물만 급히 수습하고 끝이 났다.

출토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 찍지 않았고 도면도 그려지지 않았다. 발굴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거기다 발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인 경찰서장과 보통학교 교장 등 비전문가였다.

이 중 모로가 히데오라는 유물중개상은 적지 않은 유물을 빼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금제 장식을 비롯한 유물 8점은 이른바 오쿠라 컬렉션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형편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3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금관총 정식발굴을 시작한다고 한다.

일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마구잡이 발굴 이후 95년만이다.

현재 금관총은 많이 파괴된 상태이긴 하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무덤의 구조가 확인된다면 지금까지 불분명했던 무덤의 구조와 함께

금관총 출토 세고리자루 큰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새겨진 왕의 이름과 무덤 주인과의 관계를 확실히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6월까지라는 시한이 마음에 걸린다. 유적 발굴 조사를 3달만에 그렇게 속성으로 끝낼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한에 구애치 말고 좀 철저하고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4월부터는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직접 답사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매주 화요일까지 전자메일 keumgwanchong@hanmail.net으로 인원수를 알려주면 선착순으로 견학할 수 있다고......

 

금관총의 내부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할 유물이 현장에서 다시 출토될 수 있을까? 너무 궁금하다.

시간이 주중이라 힘들긴 하지만 발굴이 끝나기 전까지 꼭 시간을 내어 새롭게 드러나는 금관총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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