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뙤약볕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어느 날 봉화 달실마을(닭실마을)로 향했습니다.

달실마을과 충재 권벌의 정자 청암정을 돌아보고 석천계곡에서 시원한 물놀이를 할 계획이었거든요.

석천계곡 물놀이에 앞서 정도전 촬영지로도 유명한 청암정을 먼저 돌아보기로 하고 마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청암정은 달실마을에서도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마을길을 떠라 조금 걸어 정자에 도착했습니다.

 

 

 

 

어! 그런데 청암정이 문이 닫겨 있군요. 이게 웬 일인가요?

 '청암정은 사유지이며 개방하지 않는다'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쭈욱 내밀어 청암정 안을 보니 내부는 조용하기만 하고 건너편 문도 굳게 닫혀 있네요.

 

 

 

 

문을 닫은건 물론이고 연못둑을 빙 둘러가며 보기 싫은 저지선을 둘러놓고 설상가상으로 철조망까지 쳐 놓았네요.

저는 전에 청암정에 와서 마루에 올라 한참을 쉬다 간 적이 있어 실망감이 덜 했지만 동행인 S양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역사드라마 덕후인 S양은 항상 정도전과 정몽주가 술마시던 장면을 촬영한 청암정에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거든요.

 

 

 

 

너무나 흉한 모습에 발길을 돌리려다가 조그만 안내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많이 훼손되는 연못둑에 대해서는 여러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못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여전히 나뭇가지를 훼손하고 자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올라기지 말고 내려가라는 안내에 비웃음을 보내고

망가지면 수리하면 된다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합니다.

처음에는 연못둑에 올라가지 말라는 작은 안내 문구를

다음에는 무릎까지 오는 줄과 대나무를

마지막에는 붉은 띠를 가슴 높이까지 둘렀었습니다.

이제 다시 취약한 부분에 대한 조치를 다시 취합니다.

바로 철조망입니다.(철조망 다음은 무엇이 될지 저도 궁금합니다.)

연못둑과 나무와 풀들이 제자리를 찾은 다음에 철거합니다.

 

청암정에 온 사람들이 너무나 심한 문화재 훼손을 해서 폐쇄 조치를 내렸나봅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충재선생 박물관을 돌아보았습니다.

보물 482점에 소장 유물이 만여점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전시되어 있는 유물은 소수였습니다.

 

간단하게 박물관을 돌아보고 박물관 로비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박물관 관계자분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충재선생의 자손이라는 박물관 관계자분에게 청암정을 보러 먼곳에서 왔는데 내부를 보지 못해 서운하다고 했더니

이분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간의 얘기를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기폭제였다고 합니다. 봉화 달실마을이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중간기착지가 되면서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달실마을과 청암정으로 몰려들었다고 하네요.

관광객들은 달실마을 여기저기를 무례하게 드나들면서 남의 집 장독대를 열어 장을 퍼가고

자고 있는 남의 방문을 벌컥 벌컥 여는 것도 예사로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청암정에 올라서 술판과 춤판을 벌이고 쓰레기를 연못에다 버렸답니다.

 

정도전 촬영 이후 청암정이 더욱 유명해지자 전국의 사진사들이 몰려들었고

사진의 앵글에 나뭇가지가 걸리적거린다고 전기톱을 가지고 와서 제멋대로 나뭇가지를 자르기도 했다네요.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인근 석천계곡에서 캠프를 하던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청암정 문짝을 떼어가서

불태워 캠프파이어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항의를 하니 학생들이 한 일을 가지고 뭐 그리 따지냐고 했다는군요.

어떤 사람들은 공부하는 학생들이 충재 권벌선생의 기를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청암정의 마룻장을 몰래 몇개나 빼어간 사건도 있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서 하는 수 없이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입장료를 받으면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단체 손님이라도 들어 오지 않겠지라는 마음에서라고 하네요.

그런데 입장료 때문에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입장료를 받는 청암정 관계자를 돈이나 밝히는 사람들처럼 경멸하듯 욕하며

천원짜리 몇장 내밀면서 "여기 돈 있으니 당장 정자 문 열어!"라고 윽박질렀다는군요.

 

충재선생박물관도 개인박물관이어서 정부의 지원은 하나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물을 보존 전시하는데는 많은 비용이 들지만 대부분 후손들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고 있다고 하네요.

 

청암정 페쇄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그간의 어려움들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리시네요.

힘을 내시라고 위로해 드린 후 박물관을 나와 마을길을 걸어가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현들이 물려준 조그만 정자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게 오늘날 우리나라 문화재 보호의 현주소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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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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