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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선조23년(1590년) 선조는 왜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는데

서인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인 부사 김성일을 왜로 보내

그 동태를 살펴보도록 한 후 귀국한 이들로 부터 의견을 구한다.

관심사는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의 군부가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인가였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황윤길 등과 관백(關伯)인 도요토미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정사 황윤길이 일본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며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데 반해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다.

일본인은 황윤길은 만만히 보았으나 김성일은 두려워 했다고 선조실록에 씌어 있다.


그러나 이듬해 1591년에 돌아 온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황윤길은 왜의 군비가 그 기세가 놀랍고 특히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의 관상이 예사롭지 않아

위험하니 전쟁에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성일은 토요토미를 보니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전쟁을 할 위인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양 정치세력이 서로 다른 말을 하니 선조를 비롯한 조정대신들도 헷갈려서 의견을 묻는 과정에

아무래도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일파였던 김성일의 말에 더 비중을 두어 정책을 결정하게 된다.

훗날 이 잘못된 판단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과오로 남게 되고

후세 사람들은 이 일을 들어 사색당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당파의 이익에 사로잡혀 국가를 돌보지 않았던' 김성일을 죽일 놈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김성일은 임란동안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거나

관군을 조직하여 매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어 

선조도 임란 초기에는 김성일의 죄과를 들어 사형을 명하였으나

서애 유성룡 등의 만류로 명을 거두는데

결국 김성일의 전과에 대해 후에 치사하고 김성일은 전쟁 중 진주에서 병사한다.


조정에서 보고가 있은 후 서애 유성룡이 김성일을 불러

진정 왜가 쳐들어오지 않을 것으로 보느냐고 재차 묻자, 김성일은 묘한 답을 내놓는다.

"저라고 어찌 왜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불시에 이런 놀라운 소식이 알려지면 중앙과 변방이 아울러 심하게 놀랄 듯하여 그리하였습니다"

징비록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김성일의 이 말이 전혀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임란 중에 김성일은 적과의 전투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특히 민심을 안정시키고 초유사라는 직책을 맡아 의병을 모으는 일도 하는데 재주를 보였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건 그로서는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서든 어쨌든 간에

저간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김성일은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문제는 역사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성일이 후에 어찌 했던 간에 선조 앞에서 정확하고 낱낱한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은 크나큰 과오임에 틀림없다.

 

김성일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많이 엇갈리고 있는데 

지금 김성일이 거의 역적처럼 된 것은 황의돈이라는 역사학자가

김성일이 황윤길과 반대의견을 내놓은 것은

순전히 자신의 당파의 이익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쳤다는 평가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 위유환 역사 교실 http://cafe.daum.net/historystory 에서 일부 인용함)

 

이 외에 대마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 그림 두루마리'에

왜인들이 들고 가는 가마에 탄 학봉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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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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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왕비 2009.11.25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저는 언제 대마도 구경 가죠~ㅎ

  3. BlogIcon JiNi] 2009.11.25 1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마도에 우리의 그런 아픈 역사가 있었군요.
    틈틈이 듣다가 한 번에 모아서 들으니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를 잘 알 수 있어서 좋습니다.

  4. BlogIcon 달려라꼴찌 2009.11.25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래도 가깝다보니까 우리역사와 많이 얽히고 섥힌 곳이 될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제 이름이 자주 등장해서 기분 좋습니다 ^^

    • BlogIcon 루비™ 2009.11.25 2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ㅎ 그렇군요.
      참으로 멋진 이름을 가지셨어요~
      예전부터 우리네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져온 대마도 였는데 이젠 일본 땅이네요..ㅠㅠ

  5. BlogIcon 털보아찌 2009.11.25 1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마도에 이런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있군요.
    대마도 소식 잘 듣고 갑니다.

  6. BlogIcon skypark박상순 2009.11.25 1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솔찍히 역사를 잘 몰라서 위아래로 몇번을 다시 읽었어요.
    이렇듯 뼈아픈 역사가 오늘날 교훈으로 승화되었으면 좋겠네요...^^

    • BlogIcon 루비™ 2009.11.25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글을 쓰기 위해서 여러 곳에서 자료를 모아서 썼답니다.
      어제의 아픈 역사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역사 공부겠지요?

  7. BlogIcon 한량이 2009.11.25 1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예전 독도 노래 가사해서 부를때...

    대마도에 대한 정보 잘 보고 갑니다..

    또 대마도 안가도 되겠는데요..ㅋㅋ (농담입니다)

  8. BlogIcon 해변무드역장 2009.11.25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까운 곳인데,,아직 가보지 못 했네요,,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9. BlogIcon 블루버스 2009.11.25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 대마도인데... 아픈 역사가 묻어 있군요.
    덕혜옹주의 삶이 서글프게 보이기도 하고
    일본의 관광지 개발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기도 합니다.
    루비님 덕에 대마도에 얽힌 얘기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BlogIcon 루비™ 2009.11.25 2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마도 사람들은 완전 한국인 광광객으로 먹고 산답니다.
      일본인들은 거의 대마도에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국 관련 관광지를 개발하지요.
      얄밉기도 하고...

  10. BlogIcon 뽀글 2009.11.25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사진 너무 안타깝고 슬프네요...ㅠ

  11. BlogIcon delos island 2009.11.25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더함과 뺌 없이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진도 좋지만 오늘은 글이 더 좋네요.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루비™ 2009.11.25 2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다르다 보니...
      바르게 역사를 가르치는게 참 중요한데
      자기네에게 이로운 역사만 가르치려는 역사 교육은 한시바삐 사라져야 하겠지요.
      감사드립니다.

  12. BlogIcon pennpenn 2009.11.25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려문이라는 표석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대마도 역사 이야기 잘 읽었어요~

    • BlogIcon 루비™ 2009.11.25 2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작년에 다음 블로그에서 소개해 드렸던 내용인데
      티스토리로 백업하면서 하나 하나 다시 수정해서 쓰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당~

  13. BlogIcon MPnote 2009.11.25 12: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대마도..ㅜㅜ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ㅜ

  14. BlogIcon 라오니스 2009.11.25 14: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왕' 이라는 표현히 심히 거슬리는군요..
    조선왕이지.. 이왕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살짝 낮춰보는 것 같습니다.
    김성일에 관해서도 다시금 알게 되고.. 역사공부 제대로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 BlogIcon 루비™ 2009.11.25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인들은 자기네 왕은 '천황'이고
      우리 왕은 '이왕'이라네요.
      참 못되먹은 족속들...
      천황이라니...정말 교만이 하늘을 찌르지요...ㅠㅠ

  15. BlogIcon 드자이너김군 2009.11.25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마도에.. 저런 씁쓸한 기억도 있군요..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 잊지말고.. 사실그대로..
    잘못된 역사를 가진 일본이 그래서 외국에 로비를 많이하고 자국의 힘을 기르는데 주력하는데.. 우리도 좀 자각해야 할것 같기도하고..
    아아 댓글이.. 삼천포 군요.. ㅎ

    • BlogIcon 루비™ 2009.11.25 2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독일인들은 자기네의 잘못된 역사를 참회하고 인정하는데
      일본넘들은 자기네 침략의 역사를 어떻게 하든지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으니...
      언제쯤 정신이 들른지..

      며칠 전에 선덕여왕 관련 글 쓰신 분이 글에 삼찬포로 빠져...운운...했다가 완전 맹공격을 당하더군요.
      조심 조심...ㅋㅋㅋ

  16. BlogIcon 모피우스 2009.11.25 1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고도 먼 대마도... 역사의 산 공부를 제대로 하고 갑니다...

  17. 아마데스 2009.11.25 2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요토미가 아니라 도요토미 아닌가요??? 잘봤습니다... ㅋ.ㅋ 역사 공부했습니다

  18. BlogIcon 멀티라이프 2009.11.25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가까이 있어서 쉽게 지나쳐버리는 대마도에서..
    우리의 숨은 역사를 찾아셨군요..
    덕분에 역사공부도 하고.. 우리 조상들의 흔적도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루비™ 2009.11.25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래 여행의 목적이 대마도에 얽힌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여행이었던지라
      역사에 통달하신 분께 좋은 강의를 들었답니다.
      감사드려요~~

  19. BlogIcon 36.5˚C 몽상가 2009.11.26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왔던 섬이죠. 에휴~ 언제쯤 싸움이 없을런지요. ^^

  20. BlogIcon 갓쉰동 2009.11.26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마도가 지역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이긴한데 이질적이면서도 이색적이지요.. 초기에 대마도를 복속시켰다면 수 많은 왜침도 없었을 텐데 좀 아ㅅ쉽긴ㄴ 하지요..

    • BlogIcon 루비™ 2009.11.26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갑습니다...갓쉰동님~~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
      바로 대마도를 이르는 말이 아닐까요?
      자연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천혜의 자연이란 말이 어울리는....

  21. BlogIcon mami5 2009.11.26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픈 역사의 흔적따라
    일본인으로 좋은 사람도 있었네요..
    덕분에 대마도 소식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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