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한시간 거리 밖에 안 되는 청도는 소읍이지만 의외로 고택이나 문화재가 많아서

별 기대없이 찾아갔던 여행자들을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곳인데요.

특히 화양읍에는 최근에 청도 읍성이 복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요.

화양읍에서 보물 제323호 석빙고, 청도 향교, 청도 관아, 읍성 등을 돌아보았는데요. 

조금 발걸음을 옮기니 경상북고 유형문화제 제212호로 지정된 도주관이 있었습니다.





도주관은 청도군의 객사 건물로써 도주는 청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해요.





도주관 앞에는 대원군 척화비가 세워져 있어 시선을 머물게 하는데요. 

청도의 척화비는 도로변에 세워두었던 것을 이곳 도주관 앞으로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도주관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척화비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평삼문을 통해 도주관으로 들어갔습니다.





현종 11년인 1670년에 건립된 도주관은 시선을 압도할 만큼 웅장한 건물이에요.

정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좌익사, 우익사 모두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써

모두 합하면 정면15칸, 측면 3칸이 되는 엄청나게 큰 건물입니다.





현재 정당과 우익사 만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좌익사는 복원된 건물로 보였습니다.

정당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수령이 초하루, 보름에 배례하는 곳이었는데요.





지금은 배례하는 시설은 없고 그냥 빈 공간만 있습니다.





정당 옆 좌우 익사에 접객 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방문하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도주관 밖으로 다시 나와 표지판 앞에 세워진 척화비를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너비 약 45cm에 높이는 136cm 정도, 두께는 약 23cm정도의 화강석으로 된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1863년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안동김씨 일가의 굴욕을 참으며 벼르고 있던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할 당시 국제 정세는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미국,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하나 둘 한반도로 접근하여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때에 따라 무력 도발 및 시위를 자행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병인양요(1866,고종 3년 : 대원군의 가톨릭 탄압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가 일어나게 되고

이어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 독일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인해

이후 ‘수교 통상 반대’로 정책 기조를 급선회하게 됩니다.
 

특히 고종 8년인 1871년의 신미양요(미국 함대가 조선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이후

흥선대원군은 모든 외세와의 수교 통상을 금하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음력 4월에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됩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그 후 고종 19년인 1882년에 발발한 임오군란으로 인해 대원군은 청나라에 납치되고

조선은 열강을 향해 그 문호를 활짝 열게 되니 척화비도 자연히 모두 철수되게 되는데요.

척화비 중 서울에 세웠던 것은 1882년 8월 15일에 종로 보신각 부근에 파묻었다가
1915년 양력 6월 보신각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어 경복궁 근정전 서쪽 화랑에 진열되었구요.

이 밖에 경기도,강화도, 경상도, 동래군,함양군,부산진,경주 등지에

서울의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것들이 1925년까지 남아서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어요. 


척화비를 세우면서까지 막으려고 했던 외세는 문호 개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오고 

급기야는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조선을 지키기 위해 쇄국정책을 펼치고 나라의 문을 굳게 잠구었던 대원군.

만약 당시에 대원군이 문호를 개방하고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더라면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척화비 앞에 서서 잠시 상념에 잠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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