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소록도(小鹿島)'.
섬의 면적은 15만평 정도로 아주 작지만 깨끗한 자연 환경과 해안 절경,역사적인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 소록도이다.

하지만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을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 섬은 전체가 나병이라고도 하는 '한센병' 환자의 병원이요, 요양원이기 때문이다.





소록도의 중심인 소록도 병원을 지나 한센병 자료관과 검시실, 감금실 사이로 난 길을 쭉 가면
아늑하고 아름다운 공원이 하나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소록도 중앙공원이다.
소록도 중심에서도 아주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는 중앙공원을 돌아보기 앞서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원 가운데 '구라탑'이란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확 들어온다.


아니...구라탑이라니....!
탑 이름의 뜻을 생각하기 앞서 제일 먼저 김구라가 떠오르는 것은 웬 일인지....^^
김구라가 막말로 인터넷 방송을 뜨겁게 달군 공로를 높이 사서 세운 공로탑은 설마 아닐테고....

                                                             

공원으로 들어서니 너무나 아름답게 가꾸어진 나무 들 가운데 자리잡은 하얀 탑이 눈에 들어온다.
날개를 활짝 편 천사가 무언가를 밟고 서서 창으로 찌르려고 하는 형상이다.






가까이 가서 탑을 자세히 보니 바로 정면에 쓰인 이름.....
구.라.탑....!

바로 구할 구(求), 문둥병 나(라:癩), 탑 (탑塔)....
바로 '나병에서 구해낸다'라는 내용의 탑이다.
바로 아래 '한센병(나병)은 반드시 낫는다'는 표어도 함께 쓰여 있었는데....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나병이라고 불리우던 '한센병'은 고대로부터 천벌이나 천형으로 묘사되었으며
나병환자를 이르는 속어인 '문둥이'라는 말은 전라도나 경상도 지방에서는 욕설일 정도로 옛날부터 멸시의 대상이었다.

또한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는 한센인들이 자신의 병을 치유키 위해 어린아이들의 간을 내어먹는다는 괴소문이 퍼져서
마을에 한센인이 들어오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돌을 던져서 쫒아내기도 하고 
어떤 마을에서 아이가 사라지면 한센인들을 의심하여 이들을 잡아서 학살하기도 하는 등 사람다운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되어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은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강제 수용했는데
당시 일본인 수호(周防正季) 병원장은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한센인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
심지어는 1940년 8월 20일에는 환자들에게 강제 징수한 기금으로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를 기념하여 매달 20일을 '보은의 날'로 정하고 환자들을 자신의 동상에 참배까지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호 원장은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는 환자들을 감금실에 강제 구금하고 감식, 체형을 가하였는데 
감금실에 갇힌 한센인들이 죽게 되면 해부를 해서 시체를 모욕했으며 






살아서 출감하는 한센인들은 옆에 있는 검시실로 끌고 가 강제 단종수술(정관절제수술)을 했으니
이는 한센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일본인 원장의 어이없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제 노역, 가혹 행위로 환자들의 불만을 증폭시킨 수호원장은 나중에 이춘상이라는 환자에 의해서 살해되었는데
수호원장을 살해한 이춘상은 어이없게도 일제 법원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졌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처우는 달라지지 않아서 
전국 각지에서 무분별하게 소록도로 강제 송치했으며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하고 강제 노역을 시킬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나 다를 바 없이 강제 구금과 강제 불임 수술이 행해졌다고 한다.





이후 많은 아픔을 뒤로 하고 소록도에서 나온 한센인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기가 일쑤였고
가족이나 친지들도 행여나 감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인해 인척 관계를 끊고 대면하지 않았다.
지금 소록도에 남아 계신 많은 한센인들은 이미 완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한센병에 대한 편견으로 가족 친지들 옆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남으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또 한센인 2세들은 미감아(나환자의 자녀로 아직 병에 감염되지 않는 자)라는 굴레를 평생 동안 지고 살아야 했으며
학교에서는 소외 당하고 사회로 나와서도 제대로 된 직장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할 때에도 불이익을 당하는 등 평생을 쓰라린 가슴을 안고 눈물 흘리며 살아야 했다.






암조차도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닐 정도로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에도 한센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견해는 무지하기만 하다.
필자가 소록도를 돌아보러 간다고 할 때
"거길 왜 가요? 나병 옮으면 어떻게 할려구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심지어 'Daum 지식'에는
"정말 나병환자들은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나았을까여?
글쎄 먹었을지 안 먹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먹은 사람은 병이 나았을까여?"
라는 황당한 질문도 떡 하니 올라와 있는 것을 본다.






나병이라고 하기도 하는 한센병은 microbacterium reprae라는 박테리아에 의하여 전염되는 병인데 
노르웨이의 Hansen이라는 사람이 이 박테리아를 발견해서 한센병이라고 불리워졌다.
이전에는 서구에서도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어 환자 격리만 시켰으나
1940년대에 이르러는 미국에서 댑손, 리팜피신 등의 약이 개발되게 되어 한센병은 드디어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고
'전염성'의 경우에는 리팜피신 3알이면 전염력이 99.99%가 사라지기 때문에 
한센인이 일반인과 같이 생활한다고 해도 절대로 전염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아직도 여전히 한센인들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계층에 속한다.
현재 소록도나 시설, 그리고 한센인 정착마을에 사시는 분들은 이미 환자가 아니고 완치된 분들인데도 
세월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는 사회의 편견은 한센인들과 그 가족들을 두번 죽이고 만 것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섬 소록도.
소록도 중앙 공원에 서 있는 '구라탑'의 천사가 마귀와도 같은 병마를 창으로 찔러죽이듯이
한센인들의 육체의 병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아픈 상처도 깨끗이 치유함을 받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하면서.....
탑신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구....라.... 탑....
한센병은 반드시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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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유적지인 노신공원(구 홍구공원)과 함께 상해를 찾는 한국인들이 
빠뜨리지 않고 돌아보아야 할 장소가 있으니 다름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상해의 어느 한 건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초기에는 부처마다 여러개의 청사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임시정부 청사가 사용했던 건물들 대부분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고 오늘날 우리가 임시정부 청사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3층 벽돌집(사진에서 오른쪽집)의 일부분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13년 동안 사용한 곳이다.

  이 유적지는 매우 낡은 골목 안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만큼 초라하지만,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상해의 명소이다. 

 

 현재는 어느정도 수리가 되고 개방되었지만 이전에는 열쇠로 굳게 잠겨져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한 때 중국 당국에서는 철거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국교 수교 후 우리나라의 요청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국내 S그룹의 노력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지금은 상해 인민 정부에서 유적지로 지정,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

한해 20만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들이 내는 
상당한 입장료 수익으로 인해 상해 관광사업에 큰 도움이 됨으로 이 건물을 철거할 이유는 이제 없을 듯 하다. 
 

 

 

 관람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골목 입구에 참관인을 안내하는 사무실에서 접수를 하는데
장소가 협소하고 단체 관람객이 많은 관계로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입장하게 된다.
좁은 골목이라 관람객들이 기다리며 많이 떠들었는지 조용하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청사 옆에 증축한 전시관으로 들어서서 임시정부 관련 비디오를 시청한 뒤에 안내를 받아 1층부터 3층까지 관람하게 되어 있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또한 도움이 될 듯 하다.  

  청사는 15평 정도나 될까한 아주 좁은 공간이며
나무로 된 좁고 낮은 계단은 머리가 닿을 듯 하여 고개를 숙이고서야 올라가게 되어있고
화장실이 갖춰지지 않은 건물이었던지 계단 모퉁이에 화장실 설비가 위치하고 있다.

 

 임시 정부 청사 실내의 유적은 그당시 유물도 아닌 듯 한데 사진 촬영이 금지라고 한다.
내부의 사진 몇장은 똑딱이 카메라로 지나가면서 급하게 찍은 것들이라 사진의 퀄리티가 떨어짐을 이해하시길 바라며...  

 

 2층에는 박은식 , 이동녕 등 임시정부 대통령이 사용하던 집무실이 있다.  

 

 10평이나 될 듯한 좁은 공간에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침대가 함께 놓여 있다. 

 

 2인용 식탁에 의자 4개를 둔 이곳은 정부 집무실이다. 

 

 3 층에는 요인 숙소가 있으며 그 후 옆문을 통해 새로 증축한 전시관으로 연결되어
각종 기사자료 및 사진들을 관람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 

 충칭에 있던 임시 정부 청사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형편을 알 수 있다.

 

 

 순수한 민간에 의한 지도체제로 구축되었던 임시정부는 민주적인 정치체제와 자주독립열망을 구현하는 민족 정신의 산 증인이다. 

 

  임시정부청사 3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청사 입구를 찍어보았다.  

 

 임시 정부 청사 바로 맞은 편의 건물도 구차한 모습은 매일반이다. 

 

 3층에서 왼쪽으로 찍은 사진. 왼쪽 아래로 도로에서 들어오는 골목 입구가 보인다. 

 건물들은 대부분 100년 정도 된 건물이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서 옛모습 그대로 대부분 보존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임시정부  청사를 돌아보고 나오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아무리 망명 정부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정부 청사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장소...

일제강점기 때의 암울했던 우리의 국운과 이국에서 이름없이 청춘을 불태웠던

애국 지사들이 눈 앞에 떠올라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들이 목청 돋우어 불렀을 독립군가의 한 소절이 자꾸만 귀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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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꼬옥 들리는 관광 명소가 있으니
그것은 울란바타르 남쪽 벅드산 정상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자이승 전승 기념탑이다.



승전탑 아래 주차장에 내려서 고개를 들어보면
몽골 국기에 새겨져 있던 전통 문양 모양의 조형물 뒤로 엄청나게 큰 승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 들어서 보면.....승전탑이 위치한 언덕의 높이가 장난이 아닌지라 보기만 해도 전의가 상실될 지경이다.



언덕 입구 광장에는 이렇게 기념 부조가 있고 거기에 쓰인 글은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라는 뜻이라고.....
(문자만 보고 몽골이 러시아어를 쓴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몽골은 엄연히 몽골만의 언어가 있고
문자는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글자를 쓰다가 공산화 이후 키릴문자(Cyrillic)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광장 앞에는 또 이렇게 전차 한대가 덩그러니 올라가 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몽골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소련에게 기증한 전차로써 실제로 베를린 진군에도 참여했던 전차라고 한다.

혹자는 2차 대전 당시 몽골의 국가 재정상 전차를 소련에게 기증할리가 없다고도 하는데
이전에 중국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몽골로서는 
전차 대금의 전체가 아니었더라도 상징적인 자금이나마 소련을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270개가 넘는 계단을 순전히 도보로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한 사람들은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게 된다.



점점 가까워지는 승전탑을 올려다보면 엄청난 규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아래 선 사람들과 비교하면 승전탑의 높이가 짐작이 되실 듯 하다.



자이승 전승 기념탑(Zaisan tolgoi)은 1938년과 1945년 두차례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와 연합하여 막아냄으로써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과 전사자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탑은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맞는 1971년에 소련의 기증으로 세워졌는데 



높이 솟은 기념탑의 전면에는 한손에는 총을 들고 한손에는 깃발을 높이 세워들고 있는 장병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바다와 같이 짙푸른 몽골의 하늘 아래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장병의 모습에서
유라시아 제국을 평정했던 몽골인의 굳건한 기상이 느껴진다. 



깃발을 든 장병의 조형물 아래 반지처럼 둥근 구조물 또한 인상적인데



환형 구조물의 외부에는 몽골 혁명 영웅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개져 있는데 몽골 공산 혁명의 영웅 '수흐바토르'도 그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련 포스트 : 몽골 여행의 시작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



환형 구조물의 중앙에는 봉화단 같이 생긴 향로가 있고



안쪽 벽면은 러시아와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침공을 위해 중일 전쟁 승리 후 곧바로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되는데



그때 마주친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연합한 몽골군에게 패하게 됨으로 대륙 침공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몽골은 이 당시 러시아와의 연합을 통하여 2차 대전 참전국이 되고 



몽골 공산화는 더욱 가속화되니 몽골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이다.



특히 소련 군사와 몽골 군사의 앞에 나치의 깃발이 땅에 내팽겨져지는 장면과



일본 제국의 깃발을 땅에 내동댕이쳐서 짓밟고 서있는 모자이크화가 가장 인상적이고 속 시원한 부분이다.



조형물 전체의 그림은 소련과 힘을 합쳐 몽골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과감한 모자이크화로 표현하였는데



그들의 얼굴엔 당시 중국도 물리치지 못한 일본을 물리치고 몽골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몽골의 상징 자이승 승전탑은 또한 몽골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원하게 탁 트여 울란바타르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울란바타르 최고의 데이트 명소이기 때문이다.



승전탑 앞에 서면 울란바타르 중심 구역은 물론 울란바타르 전체가 한장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데



멀리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야산에 빽빽이 들어선 집들을 자세히 보면 판잣집과 게르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섞여져 있어서
울란바타르 270만 시민의 반이 게르에 살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의 강남이라 불리는 자이승 지구에는 이렇게 고급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백평이 넘는 아파트도 즐비한 자이승지구는 싱그러운 숲 사이로  푸른 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몽골의 아파트들은 한국의 아파트보다 더 화려한 색깔로 칠하는 것이 보통이라 도시의 풍경은 파란 하늘과 더불어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승전탑 계단 아래 보이는 이 건물들은 북한 소유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한참을 보고 있어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승전탑 동편 가파른 민둥산 능선에 무언가 하얗고 까만 점들이 움직이기에 자세히 보니



많은 양과 염소 떼들이 몰려서 내려오는게 보인다.
도시 안에서도 많은 수의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는 곳...이곳이 몽골이라는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나는 부분이다.



몽골 최고의 데이트 장소답게 승전탑을 오르내리는 계단 옆 바위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낙서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쓰여져 있는데



그중에서는 한글 낙서도 심심찮게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보이는대로 카메라에 담았지만
찍어온 한글 낙서 사진을 글에 삽입해? 말어? 를 한참이나 고심한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어린 여행자들이 멀리 몽골까지 와서 소속과 이름까지 밝히며 써놓은 낙서를 인터넷에 공개해서
새로운 마녀 사냥꺼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떠나는 우리 자녀들이 외국의 유적지에다 한글 낙서를 남기고 오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도록 
교육을 잘 시켜 출국시켜 달라고 부모님이나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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