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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10 통한의 다리 대마도 만관교(만제키바시)의 절경 55
  2. 2009.06.16 천진의 인사동 고문화 거리 22


대마도의 만제키바시(만관교,萬關橋)는 1897년에 굴삭을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시킨 일본 군사용 운하에 놓인 다리이다.

 길이 210m의 철교인 만제키바시 아래에는 만제키 운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다리는 3차로 건설된 다리인데 1차로 건설된 다리는 1897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되었다. 리 길이는 100m. 폭은 5.5m. 높이는 약 36m로 일본 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이다.  2차로 만든 다리는 1956년에 완성한 다리로 길이는 약 81m. 폭은 5.5m. 높이는 약 30m이다. 아치형 철교로 다리가 완성됨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게 되었다. 

 3차로 건설된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완성된 것이다. 길이 210m. 폭 10m. 높이 약36m의 이 다리로 인해 섬 전체의 도로망 정비와 함께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는데 두번째 다리는 이후에 철거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러일 전쟁의 와중에서 이 다리 아래 만제키 운하를 일본 해군의 전략적 거점으로 십분 활용하여 당시 해군 전력상 세계 최고로 꼽히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로 유도시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해전이 일어났던 시대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 강병 정책으로 해군력 증가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대륙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부산까지에 이르는 항로의 단축이 필수적이었다.  그 일환으로 1900년에 일본 해군의 주도하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운하를 개통하게 된다. 대마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 해협  만제키 운하 건설을 하게 되니 이 운하가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 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영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있었는데 1904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에게 10일에 개전하자는 선전포고를 하고 이틀 앞선 8일에 기습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하게 되니 바로 러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지라 일본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는데 1905년 3월 만주의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이 패퇴되는 일이 벌어지자 러시아는 이런 전력의 약세를 보충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시키게 된다. 

 


이때 일본 해군은 함정을 준비하여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발틱 함대가 이 함정에 빠지기를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돌아 대한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했는데 일본이 이것을 알고 영국의 협조를 얻어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는 하는 수 없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러시아 함대가 도중 기착지로 예상되었던 상해에 들르지 않고 항진을 계속하자 연료와 시간의 절약을 위한 항로의 최단 거리를 예상한 일본 함대는 대마도에서 대기하게 되는데 발틱 함대는 일본의 예상대로 쓰시마 해협으로 항진해 왔다.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제독은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다!" 고 외치면서 일본 함대에게 정신무장을 시켰고 결국 발틱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의 정면과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협공에 의해 괴멸되고 만다.


이 해전은 발틱 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여명 사망과 일본 해군 3척 침몰, 전사 117명이 말해주듯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던것이다.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로 일본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러시아는 짜르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그 이후 일본의 야욕은 더욱 더 팽창 일로의 길을 걷게 되어 그 해(1905년) 가쓰라-테프트협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 제국 지배의 승인을 받아낸후 한국의 주권을 박탈당하는 음모가 무르익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5년 뒤 1910년 대한 제국은 강제 합병(한일합병)을 당하게 되니 우리나라는 일본에 35년간을 지배당하게 되는 치욕적인 병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니 이 다리는 일본에서는 <전승의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통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하의 물은 오늘도 여전히 푸르기만 하고....  

이곳을 찾는 여러 여행객들은 다리 위에서 운하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감탄을 그치지 않는다. 

 

발틱 함대와 일본의 함대가 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던 만제키 운하의 오늘은
요트와 함께 여유로운 휴가를 누리는 평화의 운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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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과 달리 천진은 관광할 곳이 그다지 많지 않은 산업 경제 도시이다.

천진의 시장이나 상가, 일반 주택지는 돌아보았지만 딱히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둘러보질 못 해서

천진의 관광 명소를 소개해달라니까 천진에선 '고문화거리'외엔 달리 갈만한 곳이 없단다.

 

천진의 발상지로 '고향의 종적'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천진 고문화거리'는

중국의 전통 문물과 양식을 한 눈에 볼 수있는 문화의 거리로 '진문고리'라는 현판의 정문에서부터 시작해 1㎞ 남짓되는 구간에 펼쳐져 있다.
 


천진시는 1986년에 이 옛 거리를 청조 때의 전통적인 풍모로 복원했는데 1991년에는 천진 십대 명소 중 한 곳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주로 문화용품. 고대 서적. 민속용품. 전통적인 수공업품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상점 안의 상품은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 많다.


비록 유리창 거리와 같은 고급품은 없더라도 한집 한집 살펴보다보면 재미있는 완구. 그림책 등을 진기한 물건들을 제법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국내외 손님들의 인기를 끌고 있어 '천진의 진주'라 불리우기도 한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비슷하지만 규모도 훨씬 크고 전통적인 청조의 건물이 빼곡이 들어차 있어서 인사동 보다는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거리 좌우로 짙은 회색의 단층, 2층짜리 청조 건축양식의 선물가게가 정렬되어 있고 가운데는 각양각색의 노점이 들어차 있다. 


 

거리 중간 중간에는 민속놀이를 주제로 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조각상을 통해서 중국의 전통 놀이를 방문객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차나 음료수 등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각가지 먹을 거리도 늘어서 있어 구경하다 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있다.

 


 
진열되어 있는 팽이는 우리네 것과 모양이 꼭 같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팽이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연날리기를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 각가지 화려한 모양의 연을 파는 가게도 있다.

 

 오래 된 듯한 천진시의 지도에는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지만 너무나 귀중한 자료인 듯.
 

 
진열품의 대부분은 사실 이렇게 약간 조잡한 관광 상품이다.
 


각가지 동전,고서적,자물쇠등 옛날 물건이 진열되어 관광객들을 기다리나 진품보다 모조품이 판을 치고 있으니 속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진품처럼 포장을 한 모조품들이 대부분이어서 골동품인 줄 알고 사 온 물건들이
알고 보면 흔해빠진 관광상품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끔은 진흙 속의 진주 같은 물건을 건지기도 한단다.
 
여기서 팔리는 상품가격은 천차만별, 한마디로 부르는게 값이니 흥정은 기본......일반적으로 처음 주인이 제시하는 가격에서 절반 이하로 깎으면 된다고 한다.
옥 제품이나 돌제품도 많고 조그만 자연석에다 금방 도장을 새겨주는 가게도 성업 중이었다. 
 

 
고문화 거리 중간 쯤에 천진의 변천사를 구경할 수 있다는 천진민속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보니 박물관 입구를 막고  아저씨들의 술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민속 박물관 입구를 다 막고 앉아 대낮부터 술판이라니......정말 황당했지만 비키라고 할 수가 없어서 문 어귀에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고문화 거리 입구로 돌아나오는 길에 길의 좌판 옆에 표범 가죽이 카트에 걸려 있길래 처음으로 보는 신기한 장면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그 근처에 있던 깍두기 머리를 한 남자가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내게로 뛰어 오는 것이 아닌가....

헉....!  위급한 상황을 몸으로 직감한 나.....완전 초고속으로 걸음아....날 살려라~~~하고 달려서 군중 속으로 숨었다.
한참이나 도망 가다가 슬쩍 뒤돌아보니 아까 그 남자가 길 한가운데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간담이 서늘해져서 다시 고문화거리 쪽으로 가지 못 하고 골목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만나기로 한 친지의 차가 고문화거리 입구에 서서 기다리는 걸 보고 얼른 달려가서 차에 올라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휴.......십년 감수....라는게 이런 경우를 말하는거겠지?

알고보니  표범 가죽 불법 거래 현장을 사진 찍은 것....여자 혼자인 줄 알고 만만하게 여긴 그들에게 붙들렸더라면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카메라를 그 자리에서 빼앗겼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머나먼 천진 땅에서 인신매매꾼들에게 팔려갔을지도....아직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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