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테반성당과 더불어 비엔나(빈, Wien)를 더욱 비엔나답게 만드는 곳.
비엔나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손꼽히는 쇤브룬 궁전(Schloss Schoenbrunn).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 쇤브룬궁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다.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 유서 깊은 궁전은 
황제 요제프 1세를 위하여 피셔 폰 에르라흐가 1696년경 설계하여 1700년경에 완성하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는데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다.
 


쇤브룬 궁전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크기의 건물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해 버린다.
바로크식으로 지은 이 궁전은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인데 실내는 로코코 양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방이 무려 1,441개나 된다는 거대한 궁전은 길이도 너무 길어서 한 앵글에 다 잡히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누어서 몇장 찍어보았지만 역광인 관계로 건물의 모습이 너무나 어둡게 표현되었다.





궁전 입구에서 보면 건물의 엄청난 크기에 비해서 앞 정원이 썰렁하도록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듣기로는 
옛 합스부르크왕가의 황제들이나 황족들은 비엔나시민들의 눈을 많이 의식해서 
황제와 황족들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걸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궁전의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공랭식 난방 장치와 베르사유에는 없던 수세식 화장실도 비치했으며
화려하게 꾸민 방들에는 촛불을 담당한 하인만도 무려 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방 중에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45개의 방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다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
남아메리카산 장미 나무 뿌리로 꾸민 방 등 어느 곳이든 일반인의 눈에 호사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며 
사방이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거울의 방은 여섯 살 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입구에서 궁전 건물 쪽으로 가까이 가니 궁전 앞에는 여러가지 자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바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기 위한 준비이다.
마켓이 문을 열면 화려한 장식품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쓰일 물건을 팔고 사고 즐기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이게 된다.
그런데 세계 문화 유산인 쇤브룬궁 안에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니....!
우리 같으면 경복궁 안 뜰에 북적거리는 야시장이 들어선거나 마찬가지일 듯.....





쇤브룬 궁전 내부를 관람하는데는 관람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궁전의 정원만 돌아보는데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궁전 정원을 돌아본 후 언덕 위의 글로리에테에서 차 한잔 마시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궁전 정원으로 향한다.

궁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식 정원으로 들어서니 이미 겨울인지라 
화단과 분수, 정교한 조각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은 다 어디로 가고......꽃이 있던 자리에는 거름더미만 한가득.....썰
렁함만 감돈다.
정원 가장자리의아름다운 조각상들도 추울까봐(?) 하얀 천으로 다 가려놓았다. 석상이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놓는건지....
1.7㎢에 달하는 광대한 정원이라지만 볼것이 별로 없어 궁전 맞은편 언덕으로 향한다.




넓디 넓은 정원을 한참이나 걸어가서 뒤로 돌아보니 부드럽게 빛나는 노란색 외벽의 궁전이 너무나 따스한 느낌을 준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쇤브룬 궁전의 이 찬란한 노란색을
“마리아 테레지아 엘로우”라고 부른다고.....




정원의 끝에 있는 넵튠의 샘(Neptune Well)도 겨울인지라 분수는 중지되었고 썰렁함만 감돌고 있다.
쇤브룬 궁전(Schloss Schoenbrunn)의 슐로스(Schloss) 는 궁전이나 성을 뜻 하며
쇤(Schoen)은 아름다운 또 브룬(Brunn)은 샘물이라는 뜻의 독일어이다.
그러니까 슐로스 쇤브룬은 '아름다운 샘물이 있는 궁전'이니 이 샘물은 궁전 이름의 유래가 된 샘물이라 볼 수 있다. 
 




한참이나 걸어 정원을 지나 언덕에 다다르니 보기에는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는 언덕이 올라보니 장난이 아니다.
등에 땀이 흥건하도록 헉헉거리며 언덕 위에 올라서 아래를 보니 우와.....!
아름다운 정원과 노란색으로 빛나는 궁전이 훤히 보일 뿐만 아니라 저멀리 비엔나 시내 전경도 한눈에 다 보인다.
비엔나 사람들이 여름 별궁인 쇤브룬궁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언덕 위에서 보는 환상적인 전망 때문이 아닐까?



이 멋진 언덕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단연 글로리에테(Gloriette)이다.
쇤브룬궁의 언덕 위에 이 장엄하고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글로리에테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1757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전몰자 위령의 목적으로 세운 일종의 개선문이다.




시내에서 바라보는 글로리에테는 마치 쇤브룬 궁전위에 왕관을 올려놓은 것 같다고 하니 그것 또한 장관이리라.

아치형의 주랑과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그리스 신전풍의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건물 뒤로 지는 석양의 모습도 너무나 아름답다.





석양이 내리깔리는 글로리에테를 한바퀴 돌아본 후 글로리에테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개선문으로 지어진 이 글로리에테는 지금 시민들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250년이 넘은 귀중한 문화 유산을 카페로 쓰다니......! 
우리나라 같으면 줄 쳐놓고 올라가지도 못 하게 할텐데.....정말 비엔나 시민이 부럽기만 하다. 

카페 안은 새롭게 리모델링한 듯 깔끔하고 산뜻하다. 




화이트와 골드 베이지 칼라로 된 인테리어는 화려하면서도 세련미가 풍긴다.




케이크와 함께 멜랑쥬 한잔을 마시며 잠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가 된 기분에 젖어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리며 창 밖 하늘이 짙푸른 색으로 변한다.






바로 매직아워가 아닌가.....! 이렇게 앉아서 차만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니 너무나 환한 조명이 글로리에테의 주랑을 환하게 비춘다.





전체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한참 뒤로 물러가서 보니 너무나도 파아란 밤 하늘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글로리에테.
이건 완전히 황금 면류관이 아닌가.....!





황금 면류관은 바로 아래 물에도 있다. 이런 환상적인 반영이라니......!
여행 중에 이런 멋진 야경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가 않은 일인데.....!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셔터를 누르니 오리 한마리가 유유히 지나가며 반영을 흐트린다.

 



다시 한번 더 시도해서 반영과 함께 황금 면류관 같은 글로리에테의 야경 사진을 담는데 성공했다.
NEX-5의 '삼각대 없이 야경 찍기 모드'를 사용해서 찍었는데 비록 삼각대를 사용한 사진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글로리에테의 야경을 찍은 후 어두워진 언덕에서 내려와 궁전 앞으로 오니  아.....! 여기도 너무나 환상적인 야경이 연출된다.
낮에 보던 쇤브룬도 정말 아름답지만 밤의 쇤브룬은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네처럼 황금빛의 궁전으로 새로 태어난다.






거기다 여인네의 눈썹같은 초승달까지 궁전 머리에 아름답게 걸려 있으니 멋진 야경에 운치까지 더해준다.





시간이 부족하여 쇤브룬궁의 화려한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오후에 도착하여 쇤브룬의 노을지는 모습과 환상적인 야경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와 쇤브룬궁의 거울의 방을 거닐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숨결을 느껴볼 날이 있겠지.....
기약없는 기대를 해보며 어둠이 드리워지는 쇤브룬궁을 떠난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글이나 사진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상해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노신공원(루쉰꽁위엔,魯迅公園).  


 



고교 시절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阿Q正傳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공원이다. 

 

 

 

노신을 기념하는 공원에 한국인들이 뭐하러 가냐고 반문하실 것인데....
지금은 이름이 노신공원이지만 옛 이름이 홍구 공원(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이란걸 알면 다들 "아항~" 하실 것이다. 

 

 한국인에게 홍구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본따 의사의 기념관인 매정(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1994년에 세워졌고 

 

 1998년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매원 입구에 세워졌다. 

 

 

1929년 어느 날, 서당 뒷산을 산책하던 19세의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개의 묘표(墓表)를 뽑아서 메고 오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 산에서 내려오던 청년은 윤봉길을 만나자 마자 그를 붙들고 간청하게 되는데
부모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갔으나 일자무식인지라 묘표에 쓰인 글을 읽을 수가 없으니
어느 묘가 부모의 묘인지 알수가 없어
할 수 없어 근처의 여러개의 묘표를 다 뽑아서 들고 글을 아는 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윤봉길은 부모의 함자를 물어본 후 여러개의 뽑힌 묘포 중에
그 청년의 부모의 묘표를 쉽게 찾아내어 주니 청년은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묘표를 뽑고 그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까?" 라는 윤봉길의 질문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청년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제서야 깨닫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아이고~~이를 어쩌나~~우리 부모님의 묘를 이젠 영영 잃어버렸네~~!" 하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농민 독본 저술,월진회 조직등을 통하여 단순한 계몽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신의 부흥을 목적하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은 기반이 닦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농촌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나서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을 철저히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백범과 마지막 조반을 든 후 

차고 있던 새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담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나서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일본인 장군들과 주중공사, 주중총영사, 일본거류민단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식전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열혈 청년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제 폭탄을 몰래 숨겨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울분과 애국심을 물통모양의 그릇의 폭탄에 담아

일본인 장군들과 거류민 단장 그리고 일본 공사를 향해 정확하게 던졌고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여럿이 부상 당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가 그 때의 사건 정황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고 

 

해외 언론들은 다투어 당시 정황을 타전했는데 당시 상하이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중국 1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하고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 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인들은 그를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총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윤봉길의 유해를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하기도 했다.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서한의 한 구절에서 그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 아이들과 아내,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국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