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대관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02 루브르 박물관의 숨쉬는 명화들 14
  2. 2009.05.01 베르사유 궁전엔 화장실이 없었다? 33



누가 파리에 가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스럼없이 "루브르 미술관!"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나인지라 책에 삽입된
명화의 사진을 발견하기만 하면 가위로 오려내어

나만의 스크랩북을 만들어놓고는 혼자서 보면서 즐거워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그런 나에게 루브르 미술관 관람은 내가 어릴 적 애지중지하며 간직하던 

스크랩북 속의 명화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나 마찬가지였다.




루브르( Musee du Louvre )의 정식 명칭은 Grand Louvre이다.

이 미술관은 12세기초에 성채로 건립이 된 왕궁의 일부인데
1682년에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로 왕궁을 옮김으로 폐궁이 되고

공공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793년에 혁명정부에 의해 국립 박물관으로 정식 공개되었다.


이 곳에 수집된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수십 만점의 작품들은
고대 아시아관,고대 이집트관,그리스와 로마관,

고대오리엔트관,조각관,회화관,미술 공예품관등
7 개의 전시실로 나뉘어져있다.

전시품 중에서도  '승리의 여신상'과 미로의 '비너스',다빈치의 '모나리자', 드라끄로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들은
꼭 지나치지 말고 감상해야 할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 입구으로 들어서니 아름다운 루브르 가운데 유리 피라미드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미술관과 큰 유리 피라미드,작은 피라미드가 겹쳐 전시실이 잘 안 보여서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유리 피라미드를 루브르에 세운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에

 

중세 왕궁 건물 안에 유리 피라미드가 왠 일이냐고 코웃음 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로 본 유리 피라미드는 의외로 주변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이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대루브르 계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계 미국인 이오밍 페이가 다자인했다.

 

세계 최고의 예술문화국민이라고 자부하는프랑스 사람을 젖히고 중국계 미국인이 다자인한 피라미드가 루브르에 서있다니.....

 

예술에 있어서는 어떤 나라의 작품이라도 안을 수 있는 프랑스인의 포용력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브르의 입장 티켓을 받아 입구에서 티켓을 내미니 그냥 귀퉁이를 약간 쭉 찢고 다시 준다.

 



 

피라미드 안을 통하여 각 전시실로 이동할 수 있게 설계되어서 신기하기만 했다.

지하라 할 수 없을 만큼 햇빛이 잘 비치고 따스했고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드러나 보였다.

 

 


 

피라미드 안에서 본 전시실과 나선형 엘리베이터의 일부분이다.

 

 


 

피라미드 안 엘리베이터는 아주 재미있다.


나선형의 계단이 피라미드의 바깥과 지하를 연결해주는데
그 속을 원통형의 엘리베이터가 오르고 내리게 되어있다.


즉 엘리베이터를 끼고 나선형의 계단이 있는 특이한 설계의 구조였다.

 

루브르의 전시실은 자연채광으로 되어있었는데 높은 천정 아래 창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작품의 부분 채광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전시 작품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펑펑 찍어대고 있었는데


플래쉬 사용한 사진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고 전부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컴컴한 전시실에 전시작품만 부분 채광으로 해놓고 사진을 못 찍게 하는 미술관만 보아 왔던지라 쪼끔은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루브르에서 제일 유명한 그림은 역시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모나리자'이다.

 

조그만 그림인 모나리자는 큰 전시실의 한 부분을 전부 다 차지하고 있었다.


모나리자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서서 기념 사진을 찍느라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뒤에서는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보이지도 않아서 할 수 없이
옆으로 파고 들어가서야 겨우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다른 전시 작품은 다 그냥 전시되어있는데 모나리자만 유일하게 방탄 유리속에 싸여 있었다.

 

남들이 다 찍는 모나리자를 안 찍고 넘어 갈 수가 없어서 밀리는 인파 속에서 한컷 담아 보았다.
 

정면에서 찍으면 유리로 인한 반사가 염려되어 살짝 옆으로 비껴서서 찍었는데 다행히도 반사되지 않고 잘 나왔다.

 

좋은 사진은 아니었지만 오리지날 모나리자를 찍어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밀로의 '비너스'는 BC 150년 경 멘데레스 지역 안티오키아의 한 조각가가 만들었으며


1820년 에게해의 밀로스섬에서 발견되어 밀로의 비너스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역시 루브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 하나이다.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는 1824 년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여인의 시선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나도 눈을 맞추고 그녀를 응시해 보았다.

 

 


 

드라끄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7월 혁명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파리 시민이 샤를 10세의 전제적인 포고 법령에 반하여 일으킨 소요 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7월 28일의 장면이다.


 


 

미켈란제로의 '빈사의 노예'원래 '모세' 조각상의 주변의 있던 노예상이라고 한다. 





수만점의 루브르의 명화를 하루만에 주마간산으로 돌아 보았다.

파리에 오래 머물며 루브르나 오르세 등에서 더 많은 그림들을 감상하며 보낼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그러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의 꿈이었던 명화들을 루브르에서 만나보았던 기쁨으로 인해 그날 밤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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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궁전은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 있는 바로크양식의 궁전이다.


원래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 다시 커다란 건물 2동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안뜰을 추가하여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다.

이때 정원 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루이 14세는 각 지방의 영주들을 불러 살게 하였으므로 당시 이 궁전에는 약 5천 명이 살았다.


 

게란트가 쓴 <화장실 문화사〉에 의하면 프랑스의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루브르를 버리고 베르사유로 온것도 배설물로 가득찬 루브르를 피해서였다는 것이라는데


당시 궁전을 출입했던 수 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상상하면 그저 아찔해질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안에서 봉지 같은 곳에 변을 보고 창문 밖으로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비라도 오게 되면 온 거리가 오물로 넘쳐 나니 남자나 여자나 오물이 묻지 않기 위해서는

높은 굽의 신발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하이힐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창문에서 날아오는 변이 머리에 맞지 않게 하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를 쓰기 시작했으며

자기 몸에서 나는 배변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 많은 향수를 몸에 뿌렸기 때문에 프랑스에는 향수가 발달되었다.
 


사람들이 정원에 와서 자꾸 볼일을 보는 것을 참다 못한 베르사유의 정원 관리인은

'에티켓(etiquette)이란 출입금지 표지판을 정원 입구에 세웠는데

예의 범절을 의미하는 '에티켓'이란 말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금빛으로 치장한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엄청난 크기의 궁전이 사람을 압도하고


한가운데는 말탄 루이 14세의 동상이 버티고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궁전 앞의 바닥은 대리석 돌판으로 되어있는데 지하 1미터 이상 거대한 돌들을 층층이 깔아 단단히 다졌기 때문에

말과 마차에 의해 바닥이 패이지 않는다고 한다.

 

 




U자형 건물의 한 쪽 부분이다.


궁전 안에는 '헤라클레스방' '왕비의방' 그리고 '풍요의 방' '비너스방' 등 다양한 이름의 방들이 있는데 '거울의 방'은 그 중 인상 깊은방이다.


 




거울의 방은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다.






거울의 방 하나를 완성하는데만 8년이 걸렸을 정도로 호화로운 거울의 방은 화려하기가 그지없으며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과 순은으로 치장된 실내 장식품의 조화는 관람객을 꿈속으로 안내한
다 .


이 방은 궁정의식을 치르거나 외국특사를 맞을 때 사용되었으며
화려한 내부장식을 한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으로 이어진다.



 

 



벽지는 모두 비단으로 되어있고 크리스탈 샹들리에......대리석 바닥.......최고급 카페트들로 장식된 궁전의 방들은
 

그 당시 궁정의 호화로운 생활을 말해주는 듯 하다.





 


루이 14세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방의 보좌는 높지 않았고 의자도 중국이나 우리의 옥좌보다 소박하게 느껴졌다.



 




루이 14세의 침실의 침대는 엄청나게 높이가 높아서 
저길 어떻게 기어올라가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궁전 내부를 비룻하여 정원 등 모든 구조가 당시 태양왕이라 불리우던 루이 14세의 이 침실을 중심으로하여 설계되었다.




 



왕비의 방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형 초상이 벽에 걸려있었다.

 






왕비의 침실의 모습이다.

이 침실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3명의 왕비가 거주하였다.


방의 모든 집기는 황금으로 되었으며 벽지는 아름다운 꽃무늬의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천정 또한 황금과 프레스코화로 치장한 후 크리스탈 상들리에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베르사유의 모든 방은 다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나
(심지어 회화 작품 조차도 플래쉬를 사용해서 찍어도 무방하다.)

이 왕비의 침실만큼은 플래쉬를 터뜨려서 사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당시 베르사유의 모든 사생활은 공개되어 있어서 누구나 정문에서 빌려주는 칼과 모자만 있으면

궁전에 들어와 아름다운 정원과 왕을 볼 수 있었던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


그래서 그런지 모든 방의 한면에는 벽이나 문이 없이 다 오픈되어있어서 복도를 걸어가면서 방을 다 볼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침실조차도 한쪽 벽은 없이 복도를 지나며 방안을 다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수많은 귀족 부인들은 그녀들의 우상 마리 앙투아네트의 화장하는 모습, 옷갈아 입는 모습,식사하는 장면을 따라다니면서 보았다고 하는데

목욕하는 모습 뿐만 아니라 심지
어는 그녀의 출산하는 모습까지도 다 공개되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귀족 부인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아기를 출산했다고도 한다.






베르사유의 수많은 그림 중에 눈에 뜨이는 그림은 자끄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대관식'이란 그림이다.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대관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는 교황 피우스 7세가 참석했는데 그가 제관인 사를마뉴관을 씌우려 관을 들어올리자


나폴레옹은 그걸 두손으로 받아 들고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내빈들을 바라보며

꼿꼿이 선 채로 자신의 머리위에 관을 올려 놓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관이 아닌 월계관을 스스로 자기의 머리에 썼는데

그것은 자기가 로마 황제의 뒤를 이은 세계의 통치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그림은 황제 대관식 이후 황후 조세핀의 머리 위에 황후관을 씌워주는 모습과


그 당시 참석한 100 여명의 유력 인사와 친척들을 자세히 그림 세밀기록화인데


루브르 박물관에도 이 그림과 꼭 같은 그림이 있다.

당시에는 한 화가가 똑 같은 두개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흔하였다고 하는데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져 있는 그림과 베르사유 궁전에 걸려 있는 그림에는 다른 점 하나가 있다.

 

 

그림 왼쪽에 일렬로 서있는조세핀의 딸 중 한명이 루브르에 걸린 원작과는 다르게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루브르에 걸린 대관식 그림에는 여인들의 옷 색깔이 모두 같다)


그녀가 바로 자끄 루이 다비드가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한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다비드는 자기의 연인을 이런 방법으로 부각시켜 사랑을 표현하였다.


 


베르사이유 궁의 정원과 숲은 그 화려함과 더불어 광대한 규모의 아름다운 경치로


대혁명전까지는 면적이 6000 ha에 이르렀으나 오늘날은 95 ha로 그 규모가 축소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루이 14세......


70년 통치기간 동안 전쟁으로 일관해 영토를 확장한 위대한 군주였던 그는
많은 문화 유산도 남겼지만


이곳에서 매일 밤 호사스런 사교 파티를 열었다한다.


이러한 사치와 전쟁으로 프랑스의 국운은 쇠퇴하였고 루이 16세가 20세에 즉위하였으나


무능과 시대의 변화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1789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1789년 시민들은 베르사유를 습격하기에 이르고


왕비 앙투아네트는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2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탈출을 시도하지만 발각 되어


파리로 끌려와 옥에 갇히게 되니 1792년 왕정은 끝나고 공화국이 선포된다.




이로써 베르사유의 화려한 영광도 끝이 나고


이곳은 그 시절 자취를 보기 위해 모이는 관광객들을 위한 박물관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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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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