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속에서 나온 듯한 마카오 성도미니크 성당에서 100여m쯤  가다 오른쪽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골목 가운데 쯤에서 독특한 모양으로 생긴 이층 벽돌집을 만나게 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벽돌집의 이름은 '로우카우 맨션(Lou Kau Mansion, 盧家大屋)'.

 

 

 

 

1889년, 청나라 시대에 지어진 이집은 중국의 부유한 사업가 '로우카우'의 가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외관도 그러히지만 가옥 배치도를 봐도 맨션이라 할만큼 큰 규모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내부가 엄청 화려해서 맨션이라 불리우는건가? 조금은 궁금한 마음이 든다.

 

 

 

 

중국 스타일의 청회색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건물 외관은 단순하고 다소 어둡기까지 한데

로우카우 맨션은 후기 청 왕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인 '시관'스타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층으로 된 저택은 풍수지리에 의해 설계되고 내부는 동서양의 양식을 적절히 혼합하였다.

 

 

 

 

예를 들면 입구에 나무 문양으로 조각된 병풍을 놓는 것 등인데

중국인들은 풍수지리는 집안에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믿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건물 안이 약간은 답답하다고 느껴질만큼 규모가 작은 편은데

따로 뜰이나 정원을 두지 않고 가운데 부분을 터서 하늘을 통하게 하여 정원을 대신해 약간의 숨통을 틔웠다. 

내부 장식은 섬세하고 화려하지만 규모로 보면 마카오에서 손꼽히던 부자의 집이라기엔 뭔가 조금은 소박하다.

 

 

 

 

 내부 곳곳에는 동서양의 문화가 적절히 혼합된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이 많이 보여 심심치 않다. 

 

 

 

 

 

 

특수한 패턴의 벽돌과 만주 스타일의 창문, 포르투갈식 블라인드 등이 동서양의 혼합 양식을 잘 보여준다.

 

 

 

 

분명히 중국식 저택인데 방으로 통하는 문 위의 아취 모양은 로마식이고

 

 

 

 

 

 

로마식 아취 아래는 동양화풍의 꽃과 새가 새겨지고......모두 이런 식이다.

 

 

 

 

 

 

포르투갈식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보는 이의 시선을 강하게 붙잡는가 하면

소박하고 무심한 회색 벽 아래엔 깔끔하기 짝이 없는 전통 중국식 의자가 놓여져 있다.  

 

 

 

 

서양식의 화려한 창 옆에 있는 난과 국화 문양의 병풍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다.

 

 

 

 

건물의 가운데는 이렇게 2층까지 정방형으로 뚫린 공간이 자리잡고 있는데


 

 

 

집 안에 하늘을 통하게 한 것은 비가 떨어지는 운치를 집 안에서 볼 수 있게 했고
비를 재화로 여겨 비가 집 안에 들어오듯 재산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원한 것이다.

 

 

 

 

 

 

뚫린 하늘 아래 2층 문을 열면 반대편까지 훤하게 드러나 채광은 물론이고 통풍까지 잘 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건물 가운데 공간에는 돌로 물받이를 만들어 비가 올 때는 빗물이 이곳으로 배수구로 빠져나가게 해주니 
아열대지방의 집중호우를 슬기롭게 이기고 건물을 시원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멋진 공간이다.

 

 

 

 

 

 

이층의 창문들 또한 독특하다.

육각형으로 된 창문틀 사이의 하얀 부분은 얼핏 보면 창호지를 덧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굴껍질이다.

커다란 굴 껍질을 평평하게 문질러서 창호지대신 문살 사이에 끼우기 때문에 견고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직사광선은 피하고 밝은 빛은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하며 비에 젖지 않는 장점이 있다. 

 

 

 

 

마카오의 날씨는 대체로 온화하지만 비가 많이 오고 습도가 높기 때문에 채광과 통풍이 신경을 쓴 점이 곳곳에 보인다.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삶의 지혜가 집안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건물의 구석에 있는 공부방은 보는 이를 감동시킨다.

 

 

 

 

공부방 바로 앞에 대나무를 심어두고 공부에 지칠 땐 바라보며

피로를 풀게 하고 대나무의 푸르름과 곧음을 배우게 한 것이다.

 

 

 

 

이 저택의 주인인 로우카우(盧家)는 은행업으로 많은 돈을 번 마카오의 유명한 부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번 부자의 저택치고는 그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중국의 사상가 정관잉의 저택인 만다린 하우스(Mandarin House)가 1,200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인 것에 비해서

로우 카우 맨션은 1/10정도도 안 되어 보이는 다소 소박한 규모이다.

 

 

 

 

로우카우는 그가 번 많은 돈을 마카오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런 공로로 그가 세상을 떴을 때 마카오 정부는 조기를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로우카우, 그는 마카오의 빈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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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근하고 화사한 봄날 오후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을 찾아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란 말..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사회지도층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富不三代)"란 말이 있지만 경주 최부잣집의 경우엔 예외이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무공 최진립이다.

 청백리로 유명한 최진립은 지극히 검소해 300년 부의 토대를 닦았는데 

최국선을 비롯한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 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12대 300년 이상을 만석꾼으로 일가를 이룬 경주 최부잣집의 300년 이상을 이어온 <가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아라.(큰 벼슬을 하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라.(신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남들이 어려울 때 재산을 모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가문의 며느리 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가난을 체험해 보아서 어려운 사람을 이해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교동에 자리잡은 최씨 고택을 돌아본다. 

최씨 고택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 경에 건립된 집이다.  

 이 고택은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데  


 원래는 99칸이었던 이 집은 현재 대문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채로 오래 방치되었는데 


 근래에 옛 모습 그대로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하인들이 기거하던 곳은 대문채이고 


 대문채 옆 텃밭에서 마주 보이는 곳은 안채이며 오른쪽이 유명한 최부잣집의 고방이다.


최부자집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고방... 

 소작농들에게서 거둔 볏섬을 차곡차곡 쌓아두던 고방은 크기도 크거니와 건물의 높이도 엄청 높다.


 이 고방의 열쇠는 마님 만이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비어 있어 자물쇠로 잠글 필도 없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지금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는 듯 하다.


 안채 앞의 절구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사실 이 집 뿐 아니라 입구 오른 쪽에 있는 요석궁(현재 음식점)을 비롯하여

이 일대에 있는 모든 집이 다 최부자의 집이다.


 만석 지기 최부자집의 일년 소작 수입은 삼천석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천석은  집 안에서 쓰고 일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데에,

나머지 일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에 썼다고 한다.

쌀 일천석이라면 당시의 경제 규모로선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최부자집에 과객이 많을 때엔 일백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집 안에 다 수용을 못해 최부자집 주변의 집으로 과객을 보낼 땐

반드시 과메기와 쌀을 같이 보내 손님을 대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과객들이 떠날 때엔 과메기와 하루 양식,노잣돈까지 챙겨서 보냈다고 한다. 


 최부자집의 과객 대접이 융숭하다는 소문은 경상도,전라도 뿐 아니라

이북 지역까지 널리 퍼졌다고....


이런 만석 지기 재산은 12대에 끝나게 된다.

하지만 자녀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씨 고택을 방문하는 이들은 한결같은 감동을 받고 나서게 된다. 


  '부불 삼대(富不三代)'라고 부자가 3대를 이어가기 힘든 세상에

12대를 부를 누린 최부자집의 가훈에서 받은 교훈보다 더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렇게 지켜 온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시켰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300년간 묵묵히 실천해 온 최부잣집의 교훈을 본받는

재벌이나 지도자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나타나 주길 바라면서 최씨 고택의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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