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신사에 가면 자식의 대학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대부분의 신사에서는 운세 같은 것을 점칠 수 있는 괘를 팔기도 하고 부적도 파는데 시주함에 돈을 넣으면 주는 운이 적힌 부적 종이를 오미구치(御神籤)라고 한다.

 

오미구치를 펼쳐 보았을 때에 좋은 괘가 나오면 가지고 가고 좋지 않은 괘가 나오면 신사 앞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가는데 대마도의 와다즈미 신사의 문 앞에 매달린 많은 오미구치를 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괘도 많이 나오는가 보다.

 

심지어 이렇게 오미구치 자판기까지 있는데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맨 아래 난 구멍에서 부적이 나온다.  오미구치 자동 판매기는 와다즈미 신사 뿐 아니라 전국의 신사에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돈을  주고 부적을 받는 번거로움과 인건비 절약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일본인의 놀라운 상술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부적까지 자판기로 팔다니.....자판기 천국인 일본다운 아이디어다. 

 일본의 신사에서는 소원을 적어서 매다는 작은 나무판을 따로 사기도 한다.  

여기에 자기 소원을 적어서 매달아 놓거나 걸어놓는데 이 나무판을 에마(繪馬) 라고 한다. 

사랑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에마도 있고...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에마도 있다. 

일본어로 된 에마 중 많은 부분이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소원의 글귀인 것으로 보아 일본에도 입시는 인생의 가장 힘든 관문인 듯 하다.

 

와다즈미 신사에 걸려 있는 에마에는 의외로 한국 사람이 남긴 것이 아주 많았다.
일본의 귀신에게 소원을 빌다니...?
비록 관광지에서의추억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어쩐지 씁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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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부터이다.
그들은 외교적, 상업적 동기에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특히 대마도(쓰시마)사람들이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고 한다.
조선의 역관들은 다른 나라로 유학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역관들은 초량 왜관에 와서 유학을 하며 조선어를 배웠다.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의 남자의 반이 일생에 한번은 조선에 왔다고 하니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어에 능통했던 것 같다.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에서 보면 건너편 산 중턱에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광청사이다.
서산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청사는 길에서도 경사가 급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광청사(光淸寺,고우세이지)는 1727년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학교가 있던 건물이다.

이 조선어학교의 수업은 하루 4시간씩. 매월 27일은 시험을 쳤다.

교재는 1학년 <교린수지> 2학년<전일도인> 3학년<인어대방>이란 책이었는데 통역사 양성이 목적이었는데

교사는 인위문길(仁位 文吉)이라는 20세의 전문통역사였다.

 

 

길에서 광청사 입구까지는 약간의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므로 입구에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다.

지팡이에 붙어 있는 명찰에는 좌수용,우수용이라고 쓰여져 있다.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구별하여 지팡이를 구비해 놓은 것도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절 본당에서 1872년 10월 25일 '한어학소(韓語學所)'가 개소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통역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마도에서 조선어는 매우 인기가 높아 입소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1873년 8월 2일까지 1년간 대마도 고위층 자제 34명을 입소시켰는데 그들 중 10명이 10월 16일 조선말을 더 잘 배우기 위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왔다. 초량 왜관 내에 '초량관 어학소'를 만들었으니 한어학소의 전진 배치였던 셈이다.

 

이들이 이후 경복궁을 드나들며 한일 합병의 통역관 겸 정보원 역할을 했으며 1895년 민비 시해사건 때 투입된 자객들 중에 낀 통역 2명이 이 어학소 출신 대마도인이었다. '초량관 어학소'는 1880년 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자동 폐소되었다.

 

현재 대마도 소학교에서는 5,6 학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어과를 설치해 교육하고 있고 한국인 원어민교사가 있다고 한다. 대마도 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물놀이를 학습하고 있으며 곧 태권도도 가르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조선어학교...이제는 상생하는 이웃이 되기 위해 선하게 쓰여지기만 바랄 뿐이다. 

 

 

광청사를 나와 수선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는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개인 사찰이라 최익현 순국비에 참배키 위한 한국 사람 외엔 거의 찾는 사람도 없는 절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인데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높이 9.5cm의 신라 동조여래현좌불상이 있으며 최익현선생의 순국비와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신라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비각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어서 확인할 수도 없다.

 

 

수선사 내에 있는 '대한국인 최익현 순국지비'. 최익현은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은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수선사에 지장보살이 단체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장 보살들이 여러 가지 무늬의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전번에 서산사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래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의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부모들은 어린 영혼을 지워 버린 몹쓸 짓을 한 자기들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치장을 한다.

 

그리고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어린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다. 

(이 코딱까리만한 지장보살은 서산사(세이잔지)정원에 있는 지장 보살이다.) 

 

가는 곳마다 턱받이로 장식한 지장 보살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만제키바시(만관교) 다리 옆 숲에 있던 지장 보살들은 하나같이 파란 색깔의 턱받이로 치장하고 있었다.
 

 

뒤에 광배가 있는 수선사의 이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선 한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일본의 부처는 석가모니불조차도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화꽃 턱받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본인들의 불심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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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만제키바시(만관교,萬關橋)는 1897년에 굴삭을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시킨 일본 군사용 운하에 놓인 다리이다.

 길이 210m의 철교인 만제키바시 아래에는 만제키 운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다리는 3차로 건설된 다리인데 1차로 건설된 다리는 1897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되었다. 리 길이는 100m. 폭은 5.5m. 높이는 약 36m로 일본 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이다.  2차로 만든 다리는 1956년에 완성한 다리로 길이는 약 81m. 폭은 5.5m. 높이는 약 30m이다. 아치형 철교로 다리가 완성됨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게 되었다. 

 3차로 건설된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완성된 것이다. 길이 210m. 폭 10m. 높이 약36m의 이 다리로 인해 섬 전체의 도로망 정비와 함께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는데 두번째 다리는 이후에 철거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러일 전쟁의 와중에서 이 다리 아래 만제키 운하를 일본 해군의 전략적 거점으로 십분 활용하여 당시 해군 전력상 세계 최고로 꼽히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로 유도시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해전이 일어났던 시대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 강병 정책으로 해군력 증가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대륙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부산까지에 이르는 항로의 단축이 필수적이었다.  그 일환으로 1900년에 일본 해군의 주도하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운하를 개통하게 된다. 대마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 해협  만제키 운하 건설을 하게 되니 이 운하가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 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영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있었는데 1904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에게 10일에 개전하자는 선전포고를 하고 이틀 앞선 8일에 기습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하게 되니 바로 러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지라 일본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는데 1905년 3월 만주의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이 패퇴되는 일이 벌어지자 러시아는 이런 전력의 약세를 보충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시키게 된다. 

 


이때 일본 해군은 함정을 준비하여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발틱 함대가 이 함정에 빠지기를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돌아 대한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했는데 일본이 이것을 알고 영국의 협조를 얻어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는 하는 수 없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러시아 함대가 도중 기착지로 예상되었던 상해에 들르지 않고 항진을 계속하자 연료와 시간의 절약을 위한 항로의 최단 거리를 예상한 일본 함대는 대마도에서 대기하게 되는데 발틱 함대는 일본의 예상대로 쓰시마 해협으로 항진해 왔다.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제독은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다!" 고 외치면서 일본 함대에게 정신무장을 시켰고 결국 발틱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의 정면과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협공에 의해 괴멸되고 만다.


이 해전은 발틱 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여명 사망과 일본 해군 3척 침몰, 전사 117명이 말해주듯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던것이다.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로 일본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러시아는 짜르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그 이후 일본의 야욕은 더욱 더 팽창 일로의 길을 걷게 되어 그 해(1905년) 가쓰라-테프트협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 제국 지배의 승인을 받아낸후 한국의 주권을 박탈당하는 음모가 무르익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5년 뒤 1910년 대한 제국은 강제 합병(한일합병)을 당하게 되니 우리나라는 일본에 35년간을 지배당하게 되는 치욕적인 병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니 이 다리는 일본에서는 <전승의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통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하의 물은 오늘도 여전히 푸르기만 하고....  

이곳을 찾는 여러 여행객들은 다리 위에서 운하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감탄을 그치지 않는다. 

 

발틱 함대와 일본의 함대가 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던 만제키 운하의 오늘은
요트와 함께 여유로운 휴가를 누리는 평화의 운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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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여행하는 동안 필자의 관심을 가장 끈 부분은 일반인들의 주택의 모양이었다.
이즈하라나 히타카츠의 시내 일부분 상가를 제외하고는
대마도의 대부분의 일반 주택은 거의 일본의 전통 가옥 형태이다.
(이런 형태로 우리나라 안에 있는 일본식 가옥은 적산 가옥이라 한다.)

오래 된 주택은 물론이고 새로 짓는 주택도
외관은 거의 일본 전통 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이 것은 시내이든 어촌이나 농촌으로 가든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일본의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에 대해서 감탄이 가는 부분 중에 하나이다.

시내 중심지 대부분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어서 전통 가옥을 가장 잘 보존해야 할 경주에서조차 
시내 곳곳에 브랜드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요즈음..
일본의 이런 전통 가옥 보존이 내내 부럽기만 하다.

대마도 여행 중 수많은 일본식 가옥들을 보고 스치면서 담은 사진 몇 장을 올려 드린다.
대부분 달리는 차 안에서 담은 사진이라 상태가 고르지 않음을 이해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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