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운(雲), 문 문(門)......
찬란한 가을빛이 스르르 사라져가고 있을 때 쯤 청도 운문사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돌담길을 지나니 '호거산운문사라'라는 현판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호랑이가 사는 산(虎居山)이라......!
운문사를 둘러싼 산들을 보면 정말로 호거산이라 불릴만큼 산세가 높고 험악하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다. 


 

여승들이 수도하는 절, 청도 운문사.
이곳 여기저기에서는 이렇게 일하고 있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커피 자판기 청소를 하고 있는 여승들도 볼 수 있어 약간의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너무 늦게 간 것일까? 이미 오색찬란한 단풍은 다 떨어지고 겨울색이 완연하다.


 

경내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감나무 끝에 매달린 까치밥 몇개만이 앙상한 나무에 노란빛을 입혀준다.


 

아......이파리가 다떨어지고 남은 나무에 탐스러운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다!
탐스러운 모과 앞을 지날 때에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며 한참이나 바라보게 된다.



 

비가 오락가락하다...... 구름이 짙게 드리우다......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되던 중에
잠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니 다소 을씨년스럽던 경내에도 따사로움이 감돈다.



 

비로전 뒤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비로전 뒷쪽 계곡 위에는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지만 자그마한 문과 함께 출입을 삼가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니 일행 중의 한명이 능청스럽게 손을 뻗어 문 안쪽 빗장을 열더니 다리 위로 올라선다.
"들어가면 안 되는 구역이라는데요?" 하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며 씨익 웃으며 앞길을 인도하길래 
자신도 모르게 살그머니 뒤를 따라 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다리 위에서 경내를 바라보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여러본 와 보았던 운문사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보니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다리를 건너니 경사진 길이 나타난다. 계단 대신에 놓여진 돌이 비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있다.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 뒤로 돌아보니 소나무 가지 아래로 펼쳐지는 다리와 계곡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일반인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금단의 구역으로 들어서니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운문사 경내와는 또 다른 고요함이 불시에 찾아온 침입자를 반긴다.


 

어.....! 여기는 작은 연못도 있고 그 옆에 팔각정도 자리잡고 있어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군데군데 놓여진 아기자기한 모양의 탁자와 의자들.
의자들은 놓여있지만 그 어디서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너무나 조용하다.



팔각정을 지나고 숲길을 지나 내리막길로 조금 걸어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넓은 공간이 나타나도 고요만이 감돌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군데군데 이렇게 귀여운 동물의 모양으로 키운 조경수들도 많은데 봐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드넓은 경내 군데 군데에는 정자나 암자가 세워져 있고 여러가지 돌 조각들이 놓여 있어 눈이 심심치 않다.
비가 많이 내리면 저 작은 다리 아래도 개울물이 졸졸 흐르겠지.


 

걸어가다 뒤돌아보니 뒤로 보이는 산에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남아 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무들은 빛바랜 낙엽들도 다 떨구어 버리겠지.


 

금단의 구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여승들을 만나 눈총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한바퀴 다 돌아보고 나오는데도 다행히 한사람의 여승들도 만나지는 못했다. 


 

작은 문으로 나서니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다리가 눈 앞에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리라.

 

 

운문사 돌담길을 지나 사리암으로 가는 길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여승을 만났다.


 

한참을 걸어가더니 마주 오던 여승을 만나 한참이나 담소를 나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서서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는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허락없이 금단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 괜스레 미안하여 빠른 걸음으로 그들 곁을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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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타임머신 여행을 떠난 듯 6,70년대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계동길.

차 두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은 계동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영진문고와 경기철물건재상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봉산 게스트하우스와 노란벽 작업실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북촌로6길.
얼마 걷지 않아 소나무 내음이 그대로 풍겨나는 듯 단아한 한옥집이 나타난다.

바로 서울 종로구 계동길 북촌마을의 또 다른 진주 '청원산방'이다.






나즈막한 담장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대문채에는 예스러운 글씨체의 '청원산방(淸圓山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담벼락에는 '성심예공원'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 창호 연구소'라는 팻말이 함께 걸려 있다.
이곳 청원산방은 전통창호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라고 하면 되겠다.





미리 전화를 걸어보지 않고 방문한지라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두들겨 보았더니
안에서 기척이 나더니 겨자색 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나오신다.
바로 무형문화재 소목장이신 심용식 선생님이시다.
멀리 경주에서 청원산방의 소식을 듣고 집의 내부를 구경하러 왔는데
집안을 돌아보아도 실례가 되지 않겠냐고 물으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직접 집안을 안내해 주신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맞은 편을 바라보니 마주 보이는 안채에도 멋진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이름은 
‘계수헌(桂樹軒)’.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처럼 아름답다는 뜻인데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현판이라고 한다.
대문에 걸려 있는 '청원산방(淸圓山房)'이라는 현판과 함께 우리나라 서단의 거목인 초정 권창윤 선생께서
청원산방이 전통문화와 전통창호의 앞날을 은은한 달빛처럼 비춰 주길 바라는 기대와 소망을 담아 쓴 것이다.




일반적인 한옥의 창호는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는데 반해 청원산방의 창호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주 보이는 창호에 정자매화꽃살문과 솟을빗꽃살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대부분 두겹으로 된 청원산방의 문은 안쪽 문이 간결하면 바깥문은 화려하게, 바깥문이 장식적이면 안쪽문은 담담하게 만들어달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ㄷ자 모양으로 조붓하게 들어앉은 방들에는 귀갑살문, 완자팔각문, 정자살문, 꽃완자문......등 각기 다른 종류의 문과 창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통 창호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인 이집의 
문과 창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 방문객들에게 보여진다고 한다.

 




마당 한구석에는 꽃담이 잘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꽃담 아래에 나무로 꾸며진 수도도 있어 운치를 더해주기도 한다.




마당에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운 모래 위에 구들장돌로 된 댓돌이 깔려 있어서
마치 강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댓돌을 밟고 집안으로 들어가 본다.





장지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8폭 매화 병풍이 다소곳하게 둘러쳐 있고 그 앞에 나무로 된 침상이 자리잡고 있다.





바깥에서 보는 창호 역시 아름답지만 이렇게 안에서 비쳐보이는 소박한 창호는 화려한 창호보다 더욱 아름답다.
이런 창호는 완자창의 기본인 사분합완자미서기문이라고 하는데 보통 화려한 꽃살문의 내부문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역시 안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완자교살문. 우리 조상들의 디자인 감각은 정말 너무나 현대적인 것 같다.






사분합아자미서기문의 제일 안쪽에는 채광과 외부 조망을 위해 유리를 끼웠다.
이맇게 다소곳하고 정갈한 창호로부터 화려하고 특색있는 창호까지 청원산방에는 모든 창호가 다 모였다.

서재 및 응접실의 용도로 보이는 방에는 책과 찻잔, 기념패등이 서가에 빼곡이 꽂혀 있었는데 서가 또한 방의 구조에 맞춰 직접 짜맞춘 것이다.





서재의 꽃완자문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안 마당과 꽃담이 너무나 아름답다.





바깥문은 소박한 세살문이고 안쪽에는 이렇게 화려한 꽃완자문을 두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서재의 남쪽 부분의 창호는 동산 위에 달이 든 것같은 모양의 달아자살문으로 되어 있다.
마치 만월이 방 안에 둥그렇게 뜬 것 같은 창호를 보니 어쩐지 안쪽으로 발을 디뎌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을 양쪽으로 살짝 밀고 들어서니 거기는 심용식 선생의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멋진 컴퓨터방이라니....
더구나 채광을 위해서 이곳의 창호는 한지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 비치는 무심한 대나무가 마치 한폭의 그림같다.




컴퓨터방에서 왼쪽으로 꺾어 살펴보니 세상에......! 여기는 너무나 모던한 주방이다.
블랙과 화이트로 세련되게 매치를 이룬 주방 가구들을 보니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의 오른쪽에 난 빗살불발기문을 밀고 들어서니 이곳 또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이 펼쳐진다.




유리로 칸막이가 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은 놀랍게도 욕실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
욕실에 습기가 많은데 나무가 썩지 않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집안을 하나 하나 설명하면서 설명해주신 후 심용식 소목장께서는
거북이 모양으로 된 대문 빗장까지도 닫았다 열었다 하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창호를 한곳에서 다 만날 수 있는 청원산방을 지으신 심용식 소목장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되던 1969년부터 10여 년 동안
조찬형 선생에게서 전통창호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톱밥가루와 6년을
함께한 끝에 수덕사에 첫 작품을 걸었다고 한다.





이후 심용식 소목장은 이광규, 최영한, 신영훈 선생을 만나 목재 고르는 법, 연장 다루는 법 등
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뿐 아니라
장인의 자세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안목을 배우며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국내외 중요 건축물의 창호 제작에 참여하여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1981년 성심예공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전통창호 제작활동을 했다.






그는 문 하나를 만드는 데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는데.......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으로 모든 창호를 제작한다고 한다.

이러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철학을 집대성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6년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창호제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에는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백 가지 전통창호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물론, 전통 창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창작하기도 하는데......
 





그가 작업한 전통 창호 작업들을 보면 낙산사 원통보전, 동학사, 백담사 대웅전, 불국사 선원, 불영사, 석남사, 송광사, 
수국사, 수덕사, 운문사. 운주사,해인사 비로전 ......등 사찰의 꽃살문들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춘전, 양화당, 문정전, 창덕궁 인정전 등 궁궐의 꽃살문,




과천 제비울미술관, 교보문고 대문,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직동 운경재단, 양평 돌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사랑방, 프랑스 고암서방....등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전통 창호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인데도 옛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청원산방. 

아무리 훌륭한 전통문화라도 현대에서 고유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인정받아 재해석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하고 고민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개발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심용식 소목장.

창호 연구와 제작은 물론 자신의 예술 세계를 물려 줄 수 있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창호가 박물관에만 전시되어 있는 죽은 전통이 아니고 현대인과 함께 숨쉬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열정을 아끼지 않는 심용식 소목장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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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산내면을 지나 구비구비 운문사로 향하는 산길은
'운치있다'는 표현이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아침나절 내린 비로 인해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는 안개 구름이 낮게 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아름드리 숲들은 싱그러운 얼굴로 여행자를 반긴다.





운문사 입구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니 도시 생활에서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씻겨지는 듯 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다보면 숨이 차고 땀이 나기 마련인데
운문사는 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차량으로도 사찰 입구까지 바로 진입이 가능하다.





아름드리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기분좋게 걷다보면
금방 사찰 입구에 다다라 요즘 같이 더운 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호거산 운문사...호랑이가 살았던 산이라고 해서 호거산이라고 하나보다.





호거산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둘러싸인 산세는 예사롭지 않고 높은 산허리에 안개가 걸리니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범종루를 거쳐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모으는 것은 바로 입구에 자리잡은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이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거의 땅을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처진소나무라 불리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의 이 아름다운 소나무는 천년 기념물 180호로 지정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처진 소나무 관련 상세 포스트 : 막걸리 먹고 자라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를 돌아보다 보면 한 사찰에 대웅보전이 두군데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운문사의 가장 중심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신 대웅보전인데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이 대웅보전은 1994년에 건립되었다.





운문사 신 대웅보전의 너무나 아름다운 꽃살문은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님의 작품이다.




















다른 하나의 대웅보전은 신 대웅보전의 앞쪽에 약간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라 시대에 건립한 운문사는 4번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 44년(1718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의 간격을 넓게 잡아 칸수에 비해서 건물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1994년에 새롭게 대웅전을 지은 후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했으므로 비로전으로 불리우다가
문화재청에서 보물 835호로 지정한 이후에 원래의 이름인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다시 찾게 되었다.





2007년에 해체 보수하였으므로 단청이나 꽃살문이 너무 산뜻하여 세월의 흔적이  도리어 느껴지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678호)은 높이 5.4m의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층 기단에는 앉아 있는 8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만세루는 학승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써 주요 행사 때만 사용하는 곳이다.





운문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사찰에
전국 5대 비구니강원 중에 학풍이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운문승가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내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은 학승들의 수행을 위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 내부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승가대학 건물 바로 옆의 공양간의 문이 열려 있기에 살짝 들여다 보니
비구니스님들이 공양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반들반들 윤이 난 엄청나게 큰 무쇠솥이 눈에 확 들어왔다.

240명의 학승들은 공부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어 운문사 경내에서는 이처럼 청소를 하거나 농사일을 하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찰 경내는 드넓고 쾌적하며 대웅보전 뒤에는 야생화 단지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나 데이트하는 커플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더구나 사찰의 바로 옆 계곡에서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마져 불어오니 
요즘 같이 후텁지근한 날,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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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에서 울산쪽으로 7번 국도를 달려 불국사역을 지나 

토비스 콘도 쪽으로 접어들어 1km 쯤 가면 나타나는 자그마한 못, 영지.
그리 특별하지도 경관이 빼어나지도 않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못과 다를 바 없는 못 영지.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 영지(影池)는 슬픈 전설이 깃들여 있는 역사가 오래 된 못이다.
이 평범한 못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석가탑 건립과 비롯하여 기록된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전설을
작가 현진건이 재구성하여 소설화한 역사 장편 소설 '무영탑'에 나오는 바로 그 못이기 때문이다.





무영탑(無影塔)이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 옆에 서 있는 석가탑을 이르는 말이다.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지휘 아래 신라는 불국사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공사에는 많은 백제 출신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되고
대웅전 앞에 세울 석탑을 창건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 출신 석공 아사달이 불려오게 된다.
신라의 부름을 받은 아사달은 아내 아사달을 두고 서라벌로 향하게 되는데......

진정한 석공은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탑을 세우는데 전념해야 하는 법이라 아사달은 아사녀에 대한 그리움도 떨쳐버리고
오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성하는데만 일념을 다한다.
다보탑을 2년 만에 완성하고 이제 석가탑을 세우고 있는 초파일 밤, 불국사에 왕이 행차를 하였다.
일행은 다보탑을 보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일행에 끼어 온 이손의 딸 구슬아기는 극도의 감격을 느꼈고 왕 앞에 나온 석공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은 서라벌을 넘어 부여까지 퍼지게 되고 손꼽아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혼자 서라벌로 향한다.
천신만고 끝에 불국사에 도착하였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경내로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녀는 입구에서 제재를 받게 되는데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고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곧 결혼한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으니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지고
상심한 그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탑을 뒤늦게 완성한 아사달은 부여로 향하려고 서둘러 불국사 문을 나서다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못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아사녀가 벗어놓은 짚신 한켤레만 아사달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사달은 자신의 못난 처지를 가슴 아파 하며 울부짖으며 못 주변을 방황하며 아내를 그리워했는데
아사녀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을 보고 망치와 정으로 아사녀를 새긴 후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 말았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아사달이 아사녀를 생각하며 조각하였다는 돌부처는 현재도 남아 영지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영지 석불 좌상이'라는 팻말을 따라 길에서 몇 걸음 걸어가니 곧 이어 나타나는 석불좌상.
불상은 몸체와 대좌,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고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옷을 걸치고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로 앉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여 무릎 위에 내렸다.
석불이 앉은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를 다른 돌로 조각하였는데
상대에는 연꽃을, 중대에는 안상을 조각하였고 하대에도 연꽃 24송이를 조각하였다.






석불좌상 앞에서 가까이 서서 석불의 얼굴을 올려 보는 순간 '헉...'하는 낮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이 기괴한 얼굴의 석불은 도대체 뭐지.....
석불은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했는데 보는 이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아니라 얼굴 부분이었다.






석불의 얼굴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다.
가슴은 살짝 볼록하고 허리는 잘록하여 여성스러움을 잘 드러낸 몸체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얼굴 부분과 머리 부분은 눈, 코, 입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통일신라 초기의 석불이라 오래 되어 이렇듯 심하게 마모된 것인가 했더니
지역민들의 얘기로는 6.25 당시에 이 불상을 표적으로 삼아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부분에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도 발견되는걸 보면 표적으로 썼다는 증언들이 사실인 듯 하다.






붕대를 친친 감고 무덤에서 바로 일어난 미이라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
거기다 가늘게 내리던 비로 인해 빗방울이 석불 위로 흘러내리니 마치 피가 흐르는 듯한 형상이라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머리와 가슴에 피를 철철 흘리는 얼굴없는 석불.....
마치 아사달을 기다리다 지쳐 결국은 영지에 뛰어든 아사녀의 슬픈 사랑과
아사녀를 잃은 것을 탄식하다 아사녀의 모습을 조각하고는 아내와 함께 세상을 버린 아사달의 고뇌처럼
오늘도 영지 입구에 말없이 서서 슬픈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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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를 벗어나 울산쪽으로 7번 국도를 달려 불국사역을 지나면 오른쪽 철로와 같이 달리게 되는데
괘릉 가기전 토비스 콘도 쪽으로 핸들을 꺾어 1km 쯤 가면 고즈녁한 못이 하나 나타난다.
못의 이름은 '영지(影池)',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란 뜻이다.





못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경관 또한 크게 아름다울 것도 없어서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근래에 와서 정자를 하나 짓고 주변에 산책로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찾는 이 별로 없이 시람들의 관심에서 멀기만 한 그런 곳이다.





비 오는 날 찾은 영지는 더욱 더 심심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낚시하는 분 몇 사람이 찾아와서 텐트를 쳐놓고 심심한 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뿐.....
잠시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한바퀴 둘러보는데 못 가의 흙으로 인해 신발만 엉망이 되어 얼마 못 걷고 다시 차로 돌아와야 했다.





심심하고 평범한 영지는 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내려서 돌아 보지도 않는 못이지만

알고 보면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영탑 전설'이 전해져오는 제법 유명한 못이다.





현진건이 쓴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고교시절 국어시간을 통해서 '무영탑에 얽힌 전설'은 어렴풋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무영탑'은 1938. 7. 20∼1939. 2. 7 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현진건의 장편 역사 소설인데
신라 시대 불국사 무영탑의 건립을 중심으로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 비극적 사랑의 전설을 현대 소설로 살려내었다.




무영탑(無影塔)이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 옆에 서 있는 석가탑을 이르는 말이다.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지휘 아래 신라는 불국사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공사에는 많은 백제 출신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되고

대웅전 앞에 세울 석탑을 창건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 출신 석공 아사달이 불려오게 된다.
신라의 부름을 받은 아사달은 아내 아사달을 두고 서라벌로 향하게 되는데......

진정한 석공은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탑을 세우는데 전념해야 하는 법이라 아사달은 아사녀에 대한 그리움도 떨쳐버리고
오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성하는데만 일념을 다한다.
다보탑을 2년 만에 완성하고 이제 석가탑을 세우고 있는 초파일 밤, 불국사에 왕이 행차를 하였다.
일행은 다보탑을 보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일행에 끼어 온 이손의 딸 구슬아기는 극도의 감격을 느꼈다.
왕 앞에 나온 석공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은 서라벌을 넘어 부여까지 퍼지게 되고
손꼽아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혼자 서라벌로 향한다.

천신만고 끝에 불국사에 도착하였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경내로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녀는 입구에서 제재를 받게 되는데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고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곧 결혼한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으니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지고
상심한 그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탑을 뒤늦게 완성한 아사달은 부여로 향하려고 서둘러 불국사 문을 나서다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못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아사녀가 벗어놓은 짚신 한켤레만 아사달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사달은 자신의 못난 처지를 가슴 아파 하며 울부짖으며 못 주변을 방황하며 아내를 그리워했는데
아사녀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을 보고 
망치와 정으로 아사녀를 새긴 후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도 그 당시 조각하였다는 아사녀의 모습을 지닌 돌부처가 영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토함산 기슭에 있는 동리 목월 기념관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사달 추모탑이 있다.

앞면에는 아사달의 예술혼을 석가탑 형태로 표현했으며 뒷면은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을 부조로 나타내었는데 

오랜 세월 기다리다 만나지 못하고 생을 달리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그리움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애틋한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소설 '무영탑'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것이 아니고 역사의 전설을 재구성하여 소설화 한 것이므로

혹자들은 이야기 소설이 정설인 것처럼 문화재 설명서에 실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론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소설에서는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조건 등의 의미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작가 현진건은 신라 예술의 최고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석가탑을 건축하려는
한 석공의 예술혼과 남녀간의 사랑을 결합시켜 한편의 진지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픽션을 만들어낸 것이니
달리 말하면 작자는 그의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나 전설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향전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남원에 가면 실존 인물보다 더 유명한 춘향이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아사달과 아사녀는 사랑을 이루지 못 하고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았지만

오늘날 영지를 같이 거니는 연인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한다는 다소 현대적인 전설도 전해오니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이루길 원하는 연인들은 사랑의 성지와도 같은 영지를 돌아보고 가심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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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나 사찰을 방문했을 때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꽃살문'이다.

 우리 문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현대 미술 작품에서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단순하고 때로는 화사한...그리고 따스한 정감이 묻어나오는 꽃살문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만큼 독특한 자랑스런 한국의 문화 유산이다.

 

최순우 전 국립 중앙 박물관장은

"조선 목수들의 손으로 가누어진 한국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때때로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능가할 만큼 세련된 '면의 분할'을 적잖이 보여 주었다.

한국의 창살무늬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차원은 사뭇 눈맛의 후련함을 맛보게 해준다.

은근하게 둥글고 알세라 모를세라 모를 죽이면서 후련한 분할을 즐기고 있다"며

우리  문살 무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꽃살문은 북쪽에서 자란 100~200년짜리 소나무를 3년 동안 바람에 말린 다음
4년째 창고에 보관했
다가 꽃과 살을 조각하고
문틀에 끼워 맞춘 뒤 단청을 입혀 완성한다고 한다.

 

평소에 사진으로 담아두었던 몇몇 사찰의 꽃살문 중에서 오늘은
신라 천년을 대표하는 가람, 불국사의 
아름다운 꽃살문을 집중적으로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대웅전 전면의 솟을살문에는 잎사귀 모양이 새겨져 있다. 
터키옥색으로 칠해진 단청이 오랜 세월로 인해 벗겨진 것이 한층 운치있게 보인다. 


  
솟을살문이란 씨날살과 모든 빗살에 다양한 무늬를 짜넣어 아주 복잡하면서도  규칙적이고 화려한 문살무늬를 말한다. 
 '솟'은  돋아낸, 돋우어낸, 도드라진의 뜻으로 이 문에는  거의 모두 꽃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있어  '솟을'이라 붙인 듯 하다.



무늬의 종류에는 솟을꽃문, 솟을민꽃무늬, 솟을모란꽃문, 국화문, 연꽃문, 잎사귀문,
  금강저문등이 있고
꽃문이 새겨진 바탕살은 네모나 마름모 혹은  육모, 팔모로 짜임새가 되어있다.  

 문짝의 아랫부분에도 어김없이 다양한 무늬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 서편은 띠살문으로 되어 있다.



띠살문은 기본적인 무늬인 날살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양새로 주로 일반 가옥의 문살 무늬로 많이 쓰였다.
날살이 창에 세로로 놓이면 띠살은 가운데의 문살로 들어선다.  

 

 대웅전 후면은 우물살문으로 되어 있다. 우물살문은 일명 井字 살문,또는 격자살문이라 하는데 
살과 씨살을 서로 똑같은 칸으로 짜나가 우물 무늬를 만들어가는 무늬살문이다.
살칸이 많고 촘촘하여 문짝도 더 튼튼해지므로 일반집에서  흔하게 많이 쓰는 문살인데
눈에 띄는 아름다움은 별로 없지만 규칙적인 이음이 단아하고 소박하게 보인다.  

 무설전 동편은 빗살문으로 되어 있다.



빗살문은 두 살을 서로 어긋나게 짜나가 마름모 무늬를 만들어나가는 문살인데
우물살을 모로 뉘어 약간의 멋을 부린 문살이라 할 수 있다.    

비로전 문살은 격자살문으로 되어 있다. 



 
솟을민꽃살문과 격자살문이 혼합된 형태이고 



 규칙적이고 정돈된 격자살문의 변형인데 매우 현대적으로 보인다.  

  

 수수하고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대웅전,무설전,비로전등의 꽃살문을 둘러보고
관음전으로 향하면 꽃살문의 화려함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관음전 전면 중앙의 꽃살문은 얼마나 화려한지 마치 현대의 디자인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바로 옆문의 솟을민꽃살문도 색상이 더없이 화려하다. 

무늬와 색감이 가히 예술이다. 

관음전 측면의 문살도 같은 솟을민꽃살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의 붉은 색조와 꽃살문의 터키옥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문을 열고 안 쪽에서 본 창호는 햇살을 받아 더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건물의 후면으로 돌아가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관음전은 제일 뒷편의 법당인데다 후면은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뜸한 곳인데
거기에 불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벽 한가운데 문이 하나 뿐이라 알지 못할 신비스러움에 매료되어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솟을민꽃살문의 형태인데 꽃과 이파리가 함께 새겨져 있고 녹색과 터키옥색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꽃살문의 색깔과 문설주, 문인방, 녹슨 장석들의 색깔의 조화가 정말 멋들어진다. 

 귀퉁이가 뜯어져 나간 이파리도 있는데 그것조차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 온다.   

  열리지 않는 문이지만 문고리를 당겨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아름다운 꽃살문..
꽃살문의 아름다운 자태에 취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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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침략이나 점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상 자부하는 일본에게는 사실은 쓰라린 추억이 있다.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서 대마도와 이끼섬이 공격을 받아 초토화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의 현장 코모다하마 신사는 
카미카자 전망대에서 출발한 차는 섬을 가로 질러 반대편 해안의 포구 마을 코모다(小茂田)에 있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해류를 따라 오면 저절로 도착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대륙에서 대마도로 배가 다니는 뱃길이 열렸던 곳이다.

 

이 곳은 또한 고려말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 점령을 위해 처음 상륙한 장소이기도 한데 거기에 코모다하마(小茂田濱) 신사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일본의 신사는 도리이(鳥居)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신사
앞에 '天'이라는 글자 모양으로 서 있는 문을 말한다.
신의 사신이라 믿는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鳥居,도리이는 '새'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는데 솟대 위에 새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 신앙과도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도리이는 흔히 붉은색으로 칠을 하여 신사의 신성한 공간과 평범한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또 산이나 바위 같은 곳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양에는 수많은 변형이 있지만, 2개의 원통형 수직기둥 위에 직사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첫번째 가로대는 기둥의 양쪽 끝을 지나 바깥까지 뻗어 있고 두번째 가로대는 그보다 약간 아래쪽에 걸쳐져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불교와 함께 일본에 전래된 인도의 아치형 관문인 '도라나'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들은 만주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대문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코모다하마 신사의 도리이는 흰색에 붉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으며 우리들이 흔히 '귀신 안테나'라고 부르는 신을 부르는 대나무가 양 쪽에 세워져 있고 도리이 아래의 굵은 동아줄에는 하얀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금줄과 같은 용도로 쓰여 그 곳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듯 하다.

 

 


이곳은 일본이 외세에게 처음으로 점령을 당한 곳이다.
합포(마산)를 출발한 고려와 몽골의 연합 일본 정벌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 5일 오후 4시경 하대마도의 사스우라에 상륙했는데 바로 오늘날의 코모다(小茂田)이다. 팔번우동기(八幡愚童記)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 바다를 뒤덮은 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무사였다.

 

 

전투는 10월 6일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대마도의 일만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전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 도주 소오 스케쿠니는 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려몽연합군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단숨에 초토화시킨 후
곧장 큐슈의 후쿠오카 상륙을 개시하기 위해 후쿠오카 앞 바다에 진을 쳤다. 그런데 태풍이 올 계절이 아닌데도 큰 태풍이 쯔시마해협을 덮쳐 려몽 연합군은 싸워보지도 못한 체 태풍에 큰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이에 이 태풍을 신이 준 바람(神風)이라고 여기고 행운을 주는 좋은 길상의 의미로 새기고 있다.

신풍(神風).....가미카제... 돌아올 수 없는 연료만 채운 일인승 경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연합군의 함선으로 돌진하여 자폭하던 특공대 가미카제. 바로 이 려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에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실은 이곳은 한국과는 또 다른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1419년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상륙하여 점령하고 약 2주간 머문 곳인데도 어디에도 이에 관한 흔적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에 관한 흔적을 없앤 것은 아닐까...생각이 들었다.

 

 

신사의 들어가는 입구에는 같은 도리이가 또 서 있었고 가운데에도 역시 코모다하마 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신사 앞의 석등은 지붕이 투구처럼 볼록하고 끝 귀가 말려올라간 일본 석등의 전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의 신사 건물의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의 8작 지붕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어 있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긴 직사각형 형태의 배례전이 신을 모신 본전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신사 건물에서는 항상 앞쪽이 배례전인데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문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있는데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있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는데 이 신물은 신의 현신(現身)으로 생각되어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의 지붕 장식도 역시 도리이의 형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사 문 앞마다 우리나라의 금줄처럼 굵게 꼰 새끼줄과 하얀 종이가 함께 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사에 들르는 일본인은 신사 앞에서 반드시 손과 입을 씻은 다음 배례전 안의 복전함에다 돈을 넣고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나무나 청동으로  따위로 만듬)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그리고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에서 사찰의 대웅전에 들어갈 때의 방식과 비슷하다.

 

 

신사의 내부는 경배를 올리기 위한 배례전과 신을 모신 본전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본전으로 가는 통로가 보인다.

 

 

코모다마하 신사 내부에는 몽골군과의 전투도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는데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위령제를 지낸다. 코모다마하 신사는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신사 앞에 놓여 있는 포탄에는 명치 30년(1897년)의 전리품이라고 쓰여져 있다. 

 

 

신사 배례전 바로 옆에는 원구 칠백년 평화지비(元寇七百年平和之碑)가 서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듯 비의 맨 위에는 비둘기가 새겨져 있었는데
우리가 왜구(倭寇)라고 하듯이 그들도 원구(元寇)라고 부르는 걸 보니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이 때 寇라는 한자는 '도둑'이라는 뜻...

 

 

신사 마당 옆에는 복전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길쭉한 나무판에 빼곡이 적혀 있었다. 일만엔, 오천엔,삼천엔,이천엔......거기다 방어 한 마리,과자, 청주 두병.... 이런 품목도 눈에 뜨이는데 복전의 액수가 많을수록 이름이 상단에 붙어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神道)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 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 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를 세워 모신다. 일본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어 마을 곳곳에 빨간 도리이가 세워져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도(神道)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에서의 의식을 중시한다. 그러나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은 후 두 번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박수를 두 번 친다.  

 

 

신사에는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과 관련하여 일본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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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유명 사찰 만송원(반쇼인,萬松院)을 찾아가는 길.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잡은 만송원은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의 산기슭 입구에 있다.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한 만송원은「쓰시마 번주 소가묘소」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이다.

 

 

 

 

 

이 사찰은 초대 번주 요시토시의 보리사로써

제2대 번주 요시나리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 곳에 역대 쓰시마 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불사공구(佛事供具)인 삼구족(三具足 : 향로, 촛대, 고배)과 고려불(관세음보살반가사유상),

고려판경문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 가져간 국보급 불상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사찰은 우리 나라나 중국의 사찰과는 외관이나 성질이 매우 다르다.

일본의 사찰은 외관상 신사와 매우 흡사하지만 신사는 반드시 도리이(鳥居)가 있는데 비해 사찰에는 그것이 없고

신사 주위에는 묘지가 없는데 일본의 사찰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 묘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정문 오른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인왕상이 팔을 들고 서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어 '아'상이라고 하는데 범어에서 시작을 의미한다. 

 

 

 

 

정문 왼쪽에 있는 인왕상은 입을 다물고 있어서 '훔'상이라고 하고 이는 끝을 의미한다.

 

 

 

 

 

절의 정문은 닫겨 있어 옆으로 통해 돌아가니 다 사그러져 가는 매표소가 있었다.

입장료는 300엔....무지 비싸다.

일행이 열명이라고 하니 깎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반값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절 옆 문 바로 옆 담벼락에 돌로 만든 북이 서 있었다.

북에는 삼태극이 선명하고 또아리를 튼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 이 북의 이름은 칸코(諫鼓,간고)이다.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울리라는 것인데

영주가 선정을 베풀어서 인민들이 북을 칠 일이 없으므로 새들만 놀고 갔다고 하여

당시의 평화로움을 말해주고 있는데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세워둔 것 같다. 

 

 

 

 

산문(절문)을 안에서 본 모습인데 일본 사찰의 정문은 항상 닫겨 있어서 측문을 통해 들어온다.

현존하는 이 절문은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1568∼1600)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다.

 

 

 

 

만송원의 본당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몇 번의 화재로 인해 남아있는 것은 산문과 그 양 옆에 시립해 서 있는 인왕의 목상, 그리고 뒷산의 묘소 뿐이다.

절의 일주문을 지나 한참 가면 사천왕상이 나오고 대웅전,약사전,명부전,산신전....등등

여러 불각이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달리 법당 하나 달랑 있는게 일본 사찰의 특징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 끝에 삼구족이 전시되어 있었다 .

삼구족(三具足) 이란 동으로 만든 향로, 화병, 촉대(초를 꼽는 대) 세트를 말하는데

화병은 뚜껑에 사자가 앞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양이 특이하며

촉대는 새가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부리로 촉대를 물고 있는 진기한 모습이다 

 

 

 

 

이 삼구족은 조선통신사 기간 중 우리 왕실에서  대마도 번주에게 하사한 것이다.

 

 

 

 

 

신 벗고 들어간 법당은 다다미가 깔려 있고 우리 나라의 대웅전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굵은 대나무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본당의 본존불은 십일면관음불(十一面觀音佛)으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내부가 매우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의 법당만 보다가 만송원의 법당을 보니 여기저기 불구들이 널려 있는 모습들에서 매우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본당의 왼쪽에 까만 흑돌의 지장보상이 빨간 턱받이를 하고 있다.

일본 전국의 마을이나 절, 계곡 어귀에 있는 부조나 석상은 어김없이 지장보살인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이렇게 한결같이 앞치마 같기도 하고 턱받이 같기도 한 옷을 입혀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곳의 지장 보살은 조선의 임금이 그동안 선린 외교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주는 등 국교를 다시 맺는데  많은 공헌을 한

대마도주 '소우요시토시'의 죽음을 애도하여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세 틀이 있었는데 대동아전쟁때 두 틀이 공출을 당해 무기로 사라지고 지금은 한 틀만 남게 되었다 한다.  

 

 

 

 

 

법당 오른쪽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 문장인 등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는 단아한 등이 걸려 있었고

그 옆의 유리창문으로 되어 있는 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역대 장군들의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유리 사이로 보니 어두운 방 안에서 위패나 촉대등을 구별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인 등나무 문장이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지는 햐쿠칸키(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宗가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묘지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이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도 대조선무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번주 요시나리(義成)와 요시마사의 묘는

다른 묘에 비해 훨씬 커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던가를 짐작케한다.

 

 

 

 

이 곳은 일본 3대 묘지(万松院 / 石川縣 金澤의 前田家 / 山口縣 萩市의 毛利家)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사적이다  

 

 

 

 

묘지 쪽에는 둘레가 무려 6~7m나 되고 높이가 35~40m나 되는 삼나무(大杉)가 세 그루 있다.  

 

 

 

수령이 1600년이라고 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으로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마도는 큐슈와 우리나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서인지 소나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잡목을 비롯한 삼나무와 노송나무를 쉽게 접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스기'라고 하는 삼나무는 수분을 흡수하지 않고 
물 속에서 쉽게 부패하지 않아
일본에서는 선박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한다.

사찰보다, 잘 보존된 묘지보다 더 부러운 것은 이렇게 오래 된 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마도를 돌아 다니는 동안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섬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삼림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미인의 다리같은 삼나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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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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