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Fukuoka,福岡)에 이르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곳, '하카타 포트 타워.

 

 

 

 

'하카타 포트 타워(博多ポ-トタワ)'는  하카다 국제 여객선 터미널 바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어 

 승선 시간이 남을 때 들리면 좋은 장소이다.

 

 

 

 

타워 앞에 서서 올려다보니 철탑의 붉은 골조가 파아란 하늘과 어울려 화사하게 조화를 이룬다.

후쿠오카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1964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이제 막 50년이 된 철탑 구조물이다.

타워의 설계자는 일본의 내진공학의 선구자로 와세다대학 교수인 '나이토 다추(內藤多仲)'로

그는 나고야 타워, 오사카 스텐가쿠, 벳부타워, 삿포로 타워,도쿄 타워, 하카타 타워를 잇달아 설계했다.

일본 사람들은 나이토 다추 박사가 설계한 이 타워들을 '6형제'라 부른다고...... 

 

 

 

 

후쿠오카의 랜드마크라 불리우는 하카타 포트 타워지만 규모는 크지 않고 실로 아담한 규모이다.

103m에 이르는 높이라니 타워 치고는 조금 낮다고 생각되지만

이곳에 오르면 하카타항과 함께 후쿠오카 전경을 둘러 볼 수 있어 좋다.

 

 

 

 

타워의 입장료는 무료이고 오후 9시 40분까지는 언제든지 둘러볼 수 있어 주경과 야경을 함께 즐길 수 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70m 높이에 있는 전망대에서 후쿠오카시를 둘러볼 수 있다.

 

 

 

 

1층 하카다항 홍보관에 있는 후쿠오카시 전도를 통하여 후쿠오카시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시의 이름은 후쿠오카인데 왜 하카다항구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실 것이다.

1889년까지 이 도시는 나카가와를 중심으로 정치의 중심지인 서쪽은 후쿠오카(Fukuoka,福岡),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인 동쪽은 하카타(博多, Hakata)라는 도시였다.

그런데1889년 두 도시가 통합되면서 도시 이름은 후쿠오카로 부르게 되고 

철도역과 항구의 이름은 그대로 하카타(하카다)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전망대로 한발을 내딛으니 아뿔사! 여기도 철조망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파리 에펠탑 전망대에 올랐을 때 눈앞을 가로막는 철조망에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철조망이겠지만 모처럼 경관을 즐기러 올라온 여행자들에게는

시야를 가로막는 철조망이 정말 아쉬운 부분이라 느껴진다.

 

 

 

 

아쉬운 사진이나마 철조망과 함께 타워에서 보이는 경관을 한컷 한컷 담아보았다.

 

 

 

 

부두에 우리가 타고 온 뉴 카멜리아호가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카멜리아호야! 반갑다.

 

 

 

 

폭 24m, 길이 170m에 총 톤수가 19,961톤, 5층에 이르는 뉴 카멜리아는

화물 220TEU, 승용차 41대, 승객 522명을 실을 수 있는 호화여객선이다.

뉴 카멜리아호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아래 포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뉴 카멜리아호 관련 포스트 : 뉴 카멜리아 라인으로 떠난 후쿠오카 여행

 

 

 

 

하카다 포트 타워에서 내려다 본 후쿠오카 전경을 상세 설명없이 올려 드리자면......

 

 

 

 

 

 

 

 

 

 

후쿠오카의 랜드마크인 하카타 포트 타워는 국제 여객선 터미널 바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후쿠오카에 도착하거나 배를 타고 떠날 때 짧은 시간 여유를 가지고도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입장료 없이 돌아볼 수 있는 관광지치고는 꽤나 괜찮은 뷰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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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랜드 마크, 비엔나의 살아 있는 역사,
비엔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심장으로 비유되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





12세기 중반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340년에 완성된 비엔나의 자랑 슈테판 성당의 외관과 상세한 내부 모습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포스트에서 상세하게 소개해 드렸으니  확인해 보시길 바라며.....





오늘은 슈테판 성당의 상징과도 같은 남쪽 첨탑에 헉헉거리며 올라가서 본 비엔나 전경을 소개해 드릴까 한다.





슈테판 성당의 남탑은 137m의 높이로 비엔나 어디서나 볼수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이다.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남탑은 비엔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등대와 같아서 
시내에서 방향을 잃으면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보고 길을 찾아오면 될 정도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멀리 나갔다가 다시 비엔나로 돌아올 때에 
슈테판성당의 남탑이 보이면 비로소 집에 돌아온듯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하면서 

남탑에 '슈테플(Steffl: Old Steve)'이라는 애칭을 붙여 부르며 사랑하고 있다.

비엔나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하는슈테플인지라 간혹 이 첨탑을 기어 올라가서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브리엘 자츠버거라는 청년은 1658년 황제의 비엔나 개선입성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남탑 꼭대기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며 황제를 환영코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황제의 입성 행렬은 지체가 되었고 날은 어두워 저녁이 되어버려
그 청년은 남탑 꼭대기에서 기다리다가 내려오기도 전에 어둠을 맞게 되었다.
청년은 두려움으로 밤새 남탑에 매달려 지내야 했는데 날이 샌 후에야 사람들이 사다리를 놓고 청년을 구출하러 올라갔다.
놀랍게도 겁에 질려 밤을 지샌 청년의 머리칼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부터 무모하게 남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람은 머리칼이 하얗게 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슈테판성당의 남탑에 직접 올라보기 위해 성당 뒷편에 위치한 조그마한 문으로 들어선다.
슈테판 성당을 관람하는데는 입장료가 없지만 남탑에 올라가려면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도 3.50유로나......





북탑은 남탑보다 훨씬 낮은 60m의 높이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137m나 되는 남탑은 순전히 계단을 통해서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발 하나 겨우 올릴 수 있을 정도의 좁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본다. 하나.....둘....셋....... 





백 쉰 하나, 백 쉰 둘, 백 쉰 셋.......헥헥.......땀이 비오듯 오르기 시작한다.






군데 군데 낙서들과 조그마한 창틀들이 있으면 멈추어서 사진도 찍어보고......




 
이백 스물 일곱, 이백 스물 여덟......@.@ 아이고 다리야......계속 뱅글뱅글 올라가니 머리까지 아파 온다.





으음....이런 곳까지 와서 낙서를 휘갈기는 사람들이 있구나.





여기도 낙서....저기도 낙서.....성한 벽이 안 보일 정도로 낙서 일색이다. 그래도 한글 이름이 없어서 다행이다.





삼백 열 하나......삼백 열 둘.....
어.....! 정신이 혼미해서 계단 수를 얼마까지 세었는지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에라......! 계단 수 세는건 포기해 버리고 계속 올라간다......
헥헥헥헥헥헥.....땀 삐질 삐질 삐질 삐질.......흐른 땀이 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빙글빙글 계단을 돌다보면 나타나는 문양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어둠을 뚫고 비추는 햇살도 너무나 반갑고......





한참이나 오르니 이렇게 햇살이 환하게 비친다. 다 왔나 보다...하고 좋아했더니 아직도 더 올라가야 한다.





이제 다 와 가는건가? 평소에 운동 좀 해둘껄......어두운 계단을 하염없이 뱅글뱅글 오르자니 정말 정신이 혼미하다.





지상에서 72m 지점에 이르면 이렇게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한때 화재 감시를 위한 소방대가 주둔했었다고 한다.  물론 이곳에 근무하던 소방대원들도 모두 걸어서 올라갔다고.......





지금은 소방대원은 없고 텅빈 공간에 조각상들만 비치되어 있다.





히잡 쓴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길래 황망하게 한 컷......





드디어 전망대의 문이 보인다. 만세~~~!!!!


탑 위 전망대의 공간은 비교적 좁은 공간이다.  올라가면 사방이 확 트여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아서 약간은 실망이다.
첨탑 위인지라 조그마한 기념품 샵과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하나가 전부인 좁은 공간이다.





기념품들은 비엔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 가격은 비싼 편이다.





전망대의 벽에도 이곳을 왔다 간 세계 각국 사람들의 낙서가 잔뜩......손이 닿을 수 있는데까지 열심히 써놓았다.





훤하게 트여 있으면 좋으련만 안전을 위해서 창을 작게 내었나보다.
조그마한 창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려면 앞 사람이 물러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창을 통해 밖으로 내다보니 와아.....!
비엔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 아래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25만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성당 지붕의 모자이크 타일도 손에 잡힐 듯 하다.
저멀리 왼쪽에 교회처럼 뽀족한 첨탑을 갖춘 건물은 비엔나 시청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얀 쌍둥이 첨탑은 보티프 교회(Votivkirche), 
가운데 초록색 돔을 갖춘 건물은 성 베드로 교회(Peterskirche)이다.





정문 양쪽에 서 있는 이교도의 탑을 줌인해서 보니 장식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정교하다.
성당 바로 아래에서 올려볼 때에는 그 모습을 잘 파악할 수 없었는데......






멀리 보이는 보티프 교회(Votivkirche, 봉헌교회)를 향해 줌을 당겨보았다.

마치 하얀 레이스를 늘어뜨린 것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쌍둥이 첨탑이 너무나 아름답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암살 미수 사건을 감사하여 그 동생 멕시코 황제 페르디난도 막시밀리안이 세운 교회인데
1879년에 봉헌된 이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네오-고딕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비엔나에는 가끔 직사각형으로 된 건조한 빌딩들도 군데 군데 보이지만 대부분은 5층 이하의 건물들이 많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좁고 어두운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올라올 때는 "왜 사서 이런 고생을 하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발 아래 펼쳐지는 비엔나의 기품있는 건물들을 보니 왜 슈테판 성당이 비엔나의 랜드마크로 불리우며
비엔나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지가 실감이 되었다.

오를 때는 정말 '개고생'이지만 꼭대기에 오르면 성취감과 아울러 비엔나를 발 아래 두는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비엔나 슈테판 성당 남탑 전망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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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브룬 궁전과 함께 비엔나의 랜드마크라 불리우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을 찾아 보았다.

비엔나 구시가지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슈테판 성당 앞에 이르니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 아래 성당의 위용이 정말 대단하다.




전체적으로 성당이 침침해 보인다. 야간 조명이 약해서 그런가? 
자세히 살펴보니 성당 전면과 남탑 일부가 공사중이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아름다운 슈테판 성당의 완벽한 모습을 대할 수 없어 약간은 아쉬웠지만
유럽의 많은 유명 성당들이 대부분은 언제나 보수공사 중인걸 많이 보았던지라 여기서도 그런가 보다....할 수 밖에 없었다.





12세기 중반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340년에 완성된 슈테판 성당은 초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나,
1359년에 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실내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비엔나 사람들은 이르기를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이 비엔나의 영혼이라면
슈테판성당(Stephansdom)은 비엔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심장이라고 말한다.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전쟁의 포화도 견디어낸 슈테판 성당은 그야말로 비엔나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밤늦은 시간 도착하여 외부만 둘러보고 간지라 다음날 낮시간에 다시 성당으로 가보았다.
입을 다물지 못 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와 함께 밤시간에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지붕의 사라센 문양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남탑으로 올라가는 출입구 앞에 선 남녀가 너무나 왜소하게 느껴질 만큼 성당의 규모가 크다.
멀리서 찍지 않으면 제대로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 없는지라 성당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보이는데로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본다.

















성당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 본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 정문은 '
거인의 문'(리젠토르: Riesentor)이라고 부른다.
문의 이름은 '거인의 문'이지만 문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문으로 들어가니 성당 입구 벽의 문양이 참 특이하다.
돌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마치 노끈을 정교하게 엮어서 세워둔 것 같이 보인다.





슈테판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 미사를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시절 성가대원으로 활약한 곳이기도 한 곳 답게 엄청나게 큰 파이트 오르간도 눈에 뜨인다.




중앙 제단 뒷편에 있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2차 대전의 포화 중에서도 손상을 입지 않고 온전히 보존이 되었다.





슈테판성당의 성직자들은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유리창을 떼어 지하 카타콤(지하묘지)에 숨겨 두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중세 건축의 당시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당 천정을 줄 지어 떠받치는 큰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기둥은 망토를 걸친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석상이다.
특이한 것은 성모의 망토 안에 여러 사람의 얼굴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모의 망토에 싸여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석상은 
'
보호의 망토를 입은 성모(Madonna with the Protective Cloak)'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조각품이다.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내장을 비롯해서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씨씨)의 내장 등 합스부르크 왕조 인물들의 내장들이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다시 성당 바깥으로 나와 이번에는 높이 솟아있는 탑들을 살펴본다.



늘 흐리고 잔뜩 찌푸린 비엔나의 겨울 오후에도 가끔 이렇게 파아란 하늘이 드러날 때가 있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이고 있는 지붕 장식은 하나하나가 다 정교한 예술 작품이다.








정문 양쪽에 서 있는 두개의 탑은 모양이 이교도 사원의 탑과 흡사하게 생겨서 '이교도의 탑'이라 불리운다.





슈테판 성당의 뒷편에 있는 탑은 각각 남탑과 북탑이다.
비엔나의 랜드마크인 남탑이 완성된 것은 1359년이었고
1450년, 프레데릭 3세 황제 때에 북탑의 건설이 착수되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독수리탑이라고도 불리우는 북탑은
남탑의 장엄함에 비추어 규모면에 있어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남탑과 대칭하여 세우려 했던 북탑은 1511년에 꼭대기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장식만 추가된채 공사가 중단되었다. 
137m인 남탑에 비해 북탑의 높이는 60m로 규모가 훨씬 작지만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남탑에 비해서 북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갈수 있다.
전망대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인 품메린(Die Pummerin,큰 종)가 있는데 무게는 21톤이나 된다고......




슈테판 성당의 자랑은 뭐니뭐니 해도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137m 높이의 남탑이다.
비엔나의 사방 어디서나 볼수 있는 남탑은 마치 등대와 같아서 
시내에서 방향을 잃으면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보고 찾아오면 될 정도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슈테판성당을 보고 이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온듯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하며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슈테플(Steffl: Old Steve)'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하고 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비엔나의 랜드마크 슈테판 성당.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다는 137m 첨탑의 343개의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가서 찍은 사진은
다음 포스트에서 소개해드리길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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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에 여행 오는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은 비엔나 시내 헤츠가세역(驛) 근처에 있는 한 시영 아파트이다.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획일적인 아파트만 보시던 분들이 이 시영 아파트 앞에 서신다면
여기가 동화의 나라의 일부인가......아니면 놀이 동산 건물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비엔나의 유명한 랜드마크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화가이자 생활 디자이너, 건축가, 환경주의자, 평화주의자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1928~2000)가 
비엔나 중심가에 있던 낡은 시영 아파트를 생물이 살아 숨 쉬는 아파트로 개조한 건물이다.





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피폐할데로 피폐해진 비엔나에서는 
서민들의 시급한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영 아파트들이 많이 지어졌는데
되는대로 지어진 시영 아파트들의 환경은 그야말로 열악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편의 시설은 하나도 없이 오직 주민들의 성냥갑 같은 방들이 복도에 감방처럼 줄지어 들어서고
수십 가구가 공동 수도 하나, 공동 화장실 하나를 공유해야 하는 형편이었다고....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 지어진 시영 아파트의 재건축을 위하여
비엔나 시청은 시영 아파트 재건축 디자인 공모를 했는데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디자인이 채택되게 된다.

딱딱하고 획일적인 건물들 일색인 비엔나 한가운데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알록달록한 동화의 집 같은 시영 아파트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 환경과 안 어울린다'는 염려 등으로 부정적 여론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입주 신청자가 3만명이나 폭주하는 등 많은 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되자
시영 아파트 재건축 프로젝트는 1983년에 시공하여 1986년에 완공하게 된다.
훈데르트바서는 비엔나 시민들을 위해 무보수로 참여했다는 재건축 프로젝트에 일화도 전한다.

완공식에 7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등 대성황을 이루자 아파트 재건축은 매우 성공적인 평가를 이끌어냈고
한 사람의 예술가가 엄청난 시너지를 창출해낸 모범 사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비엔나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비엔나의 명물이 되었다.




이렇게 지어진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대지 총면적은 1,543㎡이고,
층수는 3층부터 9층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52호가 거주하는 각 주택의 규모는 30~150㎡ 정도인데 주택 외에도 4개의 사무실, 16개의 개인 테라스,
3개의 공동 테라스, 2개소의 어린이 놀이터와 윈터가든(winter garden),
카페로 구성된 복합 주거 시설로 자리잡았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는 전경을 찍기 위해 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에서 보아도 전체의 모습이 앵글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자연에는 바로 잰 듯한 반듯한 직선은 없다'인위적인 직선을 거부한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앞길도 이렇게 자연의 동산을 그대로 옮겨온 듯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앞에 서서 위로 올려다 보니 건물 외벽에 자라나 있는 나무와 함께 제일 먼저 알록달록한 벽의 색감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화이트, 옐로우, 레드, 블루, 블랙.......건물에서는 잘 쓰지 않는 화사하고 다양한 색채가 모두 한 곳에 쓰였는데
훈데르트바서에게 다채롭고 눈부신 색깔의 집은 행복한 집과 같은 의미이다.

 



유럽의 겨울이 대부분 그렇듯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를 방문한 날도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 많이 흐린 날이었다.
어제 저녁 살짝 내린 비로 인해 건물은 부분적으로 비에 젖어 있어 사진이 많이 우중충하게 나온 것이 흠이다.
훈데르트바서는 비오는 날에는 모든 사물이 비에 젖어 고유의 색감이 더 빛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오는 날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자기의 중간 이름을 레겐탁(Regentag, 비오는 날)이라 짓기도 했지만
화가가 아닌 초보 사진가에게는 흐린 날 보다는 밝고 화사한 날의 사진이 더 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훈데르트바서는 건물이나 집을 지을 때 그 안에 자신의 이념과 꿈을 반영하고 싶어 했는데
블루마우 리조트, 슈피텔라우 소각장, 쿤스트하우스빈에서처럼 훈데르트바서의 집들의 창은 하나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단독 주택을 지을 수 없어서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 사는 요즈음, 
남이 설계하고 지은 집으로 이사온 사람들은 획일화된 아파트에서 자신의 존재와 개성을 드러내기는 힘든 일이라서
창문을 에워싼 공간만큼은 스스로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훈데르트바서는 이 권리를 '창문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이 창에서 팔을 뻗쳐 닿는 범위는 개인의 공간이며 그 공간만큼은 세입자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다’
라는 문구를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세입자 계약서의 첫 문구에  써넣었다고 한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모든 세입자는 자신의 창문을 알록달록하게 칠할 수도 있고 색색의 타일로 장식하기도 한다.

식물을 키워 이렇게 덩쿨이 드리워지게 창문을 장식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목걸이처럼 사슬을 걸기도 하며
혼자만의 발코니로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





일본에 여행 다녀온 기념품일까....? 이렇게 일본 남자 어린이날의 상징인 고이노보리를 드리워 남들보다 튀어보이는 집도 보인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알록달록한 건물 외벽에
풍성하게 자라나 있는 나무들은 보기만해도 행복한 집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데
그가 디자인한 건물은 어디나 지붕과 마당은 물론 계단과 실내에까지 무성한 식물로 넘쳐난다.

 




우리를 보호해주고 살 공간을 제공해 주는 집을 제 3의 피부라고 표현했던 그는

집이 세워짐으로 인해 빼앗겨버린 식물의 생활 공간을 식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빼앗은 식물의 공간을 건물에다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디자인한 모든 건물은 옥상과 마당, 계단을 가리지 않고 식물을 심었다.





심겨진 식물은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주고 인간은 식물로 인해 기쁨이 더욱 넘치게 되는데 
인간은 식물을 통해 그늘을 얻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먼지와 소음에서 벗어나 편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



또 자연을 그대로 집의 일부로 들여놓기를 원했던 훈데르트바서는 
풍성한 나무와 함께 꼭 물이 흐르는 분수를 건물에 설치했는데 이제는 겨울이라 기능이 분수의 기능이 중단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사유 재산의 개념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시영 아파트가 임대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임대 아파트는 일정한 거주 기간이 지나면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비엔나의 시영 아파트는 한번 거주한 사람은 평생 그 집을 비우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상속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수에 알맞은 집을 임대할 수 있는데 독신자는 작은 크기의 아파트를 ,
결혼해서 가족의 수가 늘어나면 여러 가족이 살 수 있는 더 큰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건물, 같은 면적의 아파트에 산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소득에 따라서 임대료가 다르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득이 적은 가장이라도 가족의 수가 많으면 큰 아파트에 살면서 임대료를 적게 내고
소득이 높은 독신자는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임대료를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재정적인 능력이 부족한 가장이라도 내 가족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공간을 저렴한 임대료로 얻을 수 있다니....!
서민 복지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환상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평생 번 돈을 저축해도 서울 소재 아파트 하나 사기 힘든 형편이라
모든 사람들이 집 장만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렇게 평생 임대해서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주어진다면 집 장만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살아 숨 쉬는 예술 작품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도 정말 좋지만 서민 복지를 위한 오스트리아의 임대 아파트 제도는 정말 부러운 부분이었다.
우니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한시바삐 도입되어 우리 서민들의 휘어진 허리가 쭉 펴질 때가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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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장식된 푸른 유리창과 아름다운 타일로 인해서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 불리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sultanahmet camii,술탄아흐메드 자미)'은 터키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히포드롬의 동쪽에 있는 이 사원은 성 소피아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있어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게 되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원래 이 자리는 비잔틴 제국의 궁전이 있던 자리인데 궁전은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다 파괴되었고 이 후 술탄 아흐메드 1세 황제는 성 소피아 사원을 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성과를 능가하려는 야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이 사원을 1609년에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하게 된다.

 

 

14세에 술탄의 자리에 오른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이 사원이 완공된지 1년만인 27세에 위장병으로 사망하였으니 권력과 부귀 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블루 모스크는 이스탄불과 터키 전역에서 6개의 미나레(첨탑)가 있는 유일한 사원이다. 술탄 아흐메드 1세는 건축가 메흐메드 아아에게 첨탑을 황금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금'의 터키어 발음은 숫자 '6'과 비슷하기 때문에 건축가는 이 점을 잘못 이해했고 그래서 금 대신에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6개의 미나레가 있는 사원을 지었다고 전한다. 

 

 

미나레에는 발코니가 2,3개씩 붙어 있어서 블루 모스크에는 총 16개의 발코니가 있다.
 

 

 

이 건물은 회교 신학교, 병원, 아라스타 바자르, 왕릉, 대상들의 숙소, 학교, 그리고 대중 우물이 사원과 함께 있는 사원 복합 건물이다. 사원 복합 건물을 짓기 위하여 비잔틴 왕궁,히포드럼(전차 경기장)의 관중석, 그리고 많은 귀족의 궁전들이 파괴되었는데 이 곳이 사원 자리로 선택된 것은 토프카프 궁전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의 부속 건물중의 하나인 아라스타 바자르(시장)는 사원의 축대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바자르이다.

 

 

사원의 부속 건물인 카페나 레스토랑의 임대료는 사원의 운영 자금으로 충당된다. 


 

외부에서 바깥 정원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 다섯개가 있는데 가장 중앙문에는 체인이 걸려 있다. 체인이 걸려 있는 이유는 말을 타고 사원에 들어오는 술탄이 다른 사람들처럼 경건하게 말에서 내려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계단을 올라와서 내부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3개가 있는데 내부 정원의 규모는 72 X 64m로 사원 본당의 규모와 거의 맞먹는다. 중앙에는 육각형 세정용 분수가 있는데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서 손발을 닦는 의식을 가지는 곳이나 지금은 그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이슬람 신도들은 남쪽과 북쪽 벽면에 있는 수도 시설에서 예배를 보기 전에 손발을 닦는다.
 

 
본당 입구에는 경찰과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고 이슬람 사원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하므로 비닐 봉지가 많이 구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입문은 나무문이나 철문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장막으로 둘둘 말아서 가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입구의 높이를 낮게 해 둔 것은 역시 어느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일 듯.....

 

 

사원의 본당의 규모는 51m X 53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실내는 의자가 없고 모두 카페트로 되어 있는데 이 이미지는 빌려온 사진이라 필자가 방문했을 때의 카페트와는 다르다. 그리고 양 옆에 나무 벤치처럼 생긴 것들은 신발을 놓는 곳인데 밖의 신발장이 꽉 찼을 때 사용된다.  본당 안에는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오일 램프가 까마득한 천정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게 눈길을 끄는데 엄청나게 화려하고 거대한 이 크리스탈 오일 램프는 오래 전에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이슬람 사원에는 메카의 방향으로 '미흐랍'(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 )이 있는데 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오른쪽 뒷편으로 미흐랍이 보인다. 

 

 

이 사원을 '블루 모스크'라고 서양인들이 부르는 이유는 사원 내부의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과 그림의 색들이 거의 푸른 색과 녹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사원의 내부 장식에 사용된 21,043개의 푸른 타일은 이즈닉 타일(이즈미르에서 생산한 타일)이다.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아치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은 타일과 내부 장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사원에는 전체 260개의 창문이 있는데 처음 지을 때 사용되었던 베네치안 유리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고 지금 있는 것들은 모조품이다.  중앙의 돔과 동서로 난 반원형 지붕,그리고 벽과 기둥에 쓰여진 글씨는 모두 이름난 서예가의 작품이며 내용은 코란의 인용문이다. 

 

 

바닥에 깐 카페트는 유명한 실크 카펫 제조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슬람 사회에서는 모든 기도회가 카펫이 깔린 바닥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터키의 카펫의 제조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바닥에 깔린 카펫을 자세히 보면 일일이 구획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구획은 바로 한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이슬람 예배의 모습을 보면 엎드려 메카의 방향으로 절을 할 때에 줄이 매우 질서 정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질서정연한 줄의 비결은 바로 이 카펫에 있는 것이다.  

   

사원 안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였는데 관광객이 버글버글하는 시끄러운 실내에서도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코란 삼매경에 빠진 사람.....  

 

 

소지품은 내팽겨쳐 놓고 한 쪽 구석에서 누워 잠자는 사람.....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등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고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들은 사원에 준비되어 있는 히잡으로 머리에 쓰거나 어깨를 가려야 한다. 이슬람 사원은 입장료는 없지만 출구에 준비된 헌금 상자에 돈을 넣으면 되는데 이슬람 교도나 이방인이나 돈을 넣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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