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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4 남주기 아까운 비경 대마도 아소만 42


대마도 여행의 매력은 아름다운 삼림과 구비구비 이어지는 해안을 맘껏 가슴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인데 그 중에서도 하대마의 카미자까 전망대와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는 발 아래에 펼쳐지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의 절경과 아울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이다.

  

 

 

이즈하라 시가의 북방 약 4Km, 사스(佐須)방면으로 빠지는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높은 평지가 펼쳐진다.

바로 주변 경치가 빼어나 명승지로 알려진 카미자까 공원(上見坂園地)인데 이 곳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대표적 익곡(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전경과 영산으로써 신비하게 둘러서 있는 백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즈하라 마찌와 미츠시마 마찌와의 경계에 있는 카미자까공원은 그 비경으로 인해 

사계절을 불문하고 하이킹, 드라이브 등 가족 동반의 행락지가 되고 있다.  

 

 

이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인데

기존의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씨와 외지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씨가
1245년 이곳 카미자까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씨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으나 어느 쪽이 신라계이며 백제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의 공원 안쪽에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포대 진지 터와 내무반과 참호, 포대 등의 터가 있는데
지금은 무성한 덩굴로 뒤덮인 채 남아있다.  

 

 

공원 가운데에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는데 마지막 대마도주  宗武志가 1964년에 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모양(魚型)을 깎으면서 가만히 바다 조류를 본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지만        

깊은 밤 세계지도를 펴고        

컴퍼스를 잡아       

섬(대마도)을 축으로 크게 돌린다."

 

아마도 대마도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듯 하다. 

      

 

대마도가 일본국에 편입된 이후 행정편제가 바뀌어 소다케유키(宗武志)는 도주(島主)의 자리를 잃고

대신 백작의 작위를 부여 받아 섬에서 떠나 도꾜로 거주지를 옮겼고

덕혜옹주와는 이혼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여 오래 살다 죽었다고 한다.   

 

 

 전망대에 올라서 보니 아소만의 모습이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옅은 아침 안개 속에 가려져 저 멀리의 풍경들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크고 작은 섬들이 군데 군데 늘어선 아소만의 아기자기한 정경은 처음 방문한 이방인에게도 다정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다시 차를 타고 구비 구비 산길을 돌아 와타즈미신사에서 가까운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는 차에서 내려 60m 정도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여 대개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온다.

 

 

에보시타케(烏帽子岳)의 '에보시(烏帽子)'는 '까마귀 모자'란 뜻으로 사방이 다 보인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아소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해발 176m의 전망대에 서니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누워있고 그 사이로 그림같은 바다가 절묘하게 펼쳐져 있었다. 

 

 

겹겹이 겹쳐진 산들과 바다에 떠 있는 107개의 크고 작은 섬,고요하고 평온한 바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서 생성된 리아스식 해안은 아소만을 대마도 최고의 비경으로 만들었다.

이 곳을 흔히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들 부르기도 한다는데

조각배를 빌려 타고 저 섬들의 사이 사이를 누벼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전망대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에는 부산과 일본의 한 중간에 있는 대마도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한 눈으로 보아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근접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쾌청한 날에는 거제도도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아래로 보이는 아소만 일대 연안은 한국인들이 즐겨찾는 낚시터가 몰려 있다.

연중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받는 아소만은 수온이 적절하여 각종 어류가 풍부한데

특히 대형 감성돔과 참돔이 많이 올라오며 물이 아주 맑아 인근에는 진주 양식장도 있다고 한다.  

 

삼림 자원과 해양 자원이 풍부한 아름다운 땅 대마도.. 
오랫동안 우리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곳이었는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쫒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신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는데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으니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고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은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대마도땅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조선 후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서 대마도를 굳게 지키기만 했어도
오늘날과 같이 대마도를 일본에게 주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주기 아까운 땅......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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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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