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포스를 물리치고 단연 인기를 끌고 있는 비천지도의 화랑 알천랑.
알천(閼川, 577~686)은 역사적으로도 선덕,진덕여왕 시대 최고의 무장이며
신라 최고 의정 기관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알천랑은 신라를 건국한 공신인 소벌공의 25대손으로 '알천'은 젊은 시절 이름이고 본명은 '소경'이다.
(성씨는 진주 소씨로 소지섭의 조상님이 되신다는...^^)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알천의 업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선덕여왕이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의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므로 나라의 서남쪽 변경에 있는 옥문곡에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을 예지하고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마침 백제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 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선덕여왕 7년 겨울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과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 당시 술종,·임종,·호림, 염장, 유신
등과 함께
나라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산 우지암이란 곳에서 회의를 연일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좌석으로 달려들어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피하였지만
알천은 그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아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알천의 담력과 용맹은 당대 최강이었을 듯.....

그는 선덕여왕 7년(638)에 이찬 등을 지낸 뒤 각간(角干)에 올랐고
당시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회의 의
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이 화백회의 의장이었을 당시,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 임종, 호림, 염장, 유신
등이었다.
647년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진덕여왕 1년(6
47)에는 반란으로 죽은 비담
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으니
알천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알천은 화백회의에서 섭정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며 김춘추에게 양위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니 김춘추(유승호)는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太宗武烈王)이다.

당시에는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알천이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더라면 왕위를 한번 노려볼만도 한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배경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신흥귀족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
치적 책략이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무열왕 3년(656년) 무열왕은 신라개국공신인 소벌도리에게 문열왕(文烈王)의 시호를 내렸는데
일설에는 왕위를 양보한 알천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그의 선조인 소벌공을 문열왕으로 추봉하였다고도 한다.
그후 알천은 늦도록 손자가 없다가 꿈에 선조 소벌도리가 지목한대로
660년 3월 2일 금성에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뒤 며느리 석씨가 손자 복서를 낳았다.
이에 손자가 태어난 기쁨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천에서 경(慶)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알천은 581년에 태어나 6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10세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인물이다.


알천랑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알천'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이승효의 열연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경주 사람들에게 '알천'이란 이름은 경주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를 가려면 보문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변을 따라서 보문단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덕동댐에서 시작하여 보문호수에 고였다가 경주시내를 관통하여 서천(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의 중심을 흐르는 이 강이 바로 '북쳔(北川)'으로도 불리우는 '알천(閼川)'이다.



경주에서는 알천의 이름을 가진 지명을 강 인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알천을 따라 뻗은 북쪽 도로의 이름은 알천 북로이며 



알천의 북쪽 수직으로 뻗은 도로는 알천길이다.



주소에서도 알천길이라는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수퍼 이름도 알천 수퍼이다.



알천에 가로놓인 교량은 4개가 있는데 그중 교육청과 소방서를 연결하는 교량의 이름은 알천교이다.



특히 알천변의 고수부지에는 테니스장, 정구장, 족구장, 게이트볼장 등 체육시설과
인라인, 자전거, 산책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멀티풀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어 경주 시민의 휴식처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보문 입구에서부터 공설운동장 입구 경주축구공원까지 10개소에 이르는 잔디 축구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해마다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를 비롯하여 국가 대표 축구팀의 단골 전지 훈련 장소로 쓰이고 있는 경주의 자랑거리이다.



알천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경주의 알천과 관련된 지명을 소개하니
경주 알천이 알천랑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가...... 하고 오해하는 분도 계신 듯 하다.
하지만 알천의 역사는 육부촌 시절의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오히려 경주를 흐르는 중심 강인 알천의 이름을 따서 '알천(閼川)'이라고 이름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을 듯 하다.
그 점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


경주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이 알천으로 인해 역사가 바뀐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삼국유사는 이 꿈에 전혀 다른 두 해몽을 기록해 놓았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이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이후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버리자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왕위 계승 1순위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 때 김주원의 집은 알천(북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왕위 계승 2순위인 김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제 38대 원성왕이 된다.
이때 알천을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아들은 바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오늘날에는 덕동댐과 보문호수가 세워져 치수 관리를 하는 바람에 알천의 물이 줄어들었지만
신라시대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나서 알천 양쪽 마을 전체를 다 덮칠 만큼 큰 강물이었으니
만약에 그때 비가 오지 않았고 알천물이 불어나지 않았더라면 김주원이 왕이 되었을 것이고 신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또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된 화랑이 생겨난 배경에도 알천과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신라 24대 진흥왕 원년인 540년, 
삼산공의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화랑의 전신)가 되었는데 그녀는 수하에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南毛公主)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미진부(법흥왕의 외손인데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미실,미생을 낳음, 2세 풍월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이복자매인 지소태후 역시 미진부를 사랑하였으므로 남모를 도와 그녀를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준정은 남모가 원화가 되려는 것을 막고 자신이 계속 원화로 남아 있으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1세 풍월주)의 낭도를 그녀에게 더하여 주기까지 하니 준정은 투기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남모공주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데 따르던 낭도들은 그녀의 행방을 찾느라 서라벌 곳곳을 뒤지다가 
궁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집으로 꾀어 술을 먹였다네
준정이 공주를 시기하고 있었다네
술 취한 공주를 강물에 빠뜨렸다네
공주는 돌밑에 깔려 죽었다네
불쌍한 공주는 아직도 물속 바위 밑에 누워있다네…

궁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궁 안에 살던 왕족의 아이들이 배워 부르면서 뛰어다닌 것인데
이는 사건의 내막을 아는 누군가가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퍼뜨린 것이다.
진흥왕의 황후 지소태후는 준정을 잡아들여 추국하니 정말 남모의 시체는 노래에 나오는것처럼 알천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준정은 남모에게 술을 먹여 쓰러지게 한 후 자신의 낭도들을 시켜 남모를 죽여 알천에 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지소태후는 바로 준정을 사형에 처하고 원화 제도를 페지하고 선화(仙花,국선화랑)를 화랑으로 삼았으니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미녀인 준정과 남모, 2명을 원화로 뽑았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했다'고
단순히 준정이 자신보다 미모가 빼어난 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랑세기 2세 풍월주 미진부편을 보면 지소태후가 남모의 낭도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위화공(원화가 폐지되자 1세 풍월주가 됨)으로 하여금 그 수를 갑절로 늘리도록 하자
세력에서 열세에 몰린 준정이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다 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최대의 정치 단체인 '화랑도'의 탄생 배경에는 여성들의 이같은 세력 다툼이 숨어있었고 그 배경에 알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알천

알천과 관련해 북쪽인 동천마을과 남쪽인 구황마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덧붙여 본다.
동천마을(새주소로 알천길)에는 신라 41대 헌덕왕릉이 있고 구황마을에는 분황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암곡 가내골 등 험준한 여러 계곡에서 급경사로 흘러내리는 알천의 물은 해마다 여름이면 두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어 동천사람은 헌덕왕릉에 빌고 구황사람들은 분황사 부처에게  빌었다.

구황마을의 기도가 세어지면 큰 홍수 때 알천물길이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동천마을의 피해가 크고 헌덕왕릉이 훼손됐다.
동천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덕왕릉에 빌면 알천물길이 반대로 흘렀다.
그래서 물길이 북쪽으로 치우쳐 흐르면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에서 땀이 흘렀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렸다.

헌덕왕의 영혼과 분황사 부처가 치열하게 싸우자 알천 냇물의 홍수는 마침내
남쪽으로도 못가고 북쪽으로도 못가고 하늘로 치솟아 홍수가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우유빛깔 알천랑이 떠오르는 알천, 남모공주가 물속에 잠겨 죽었다는 알천, 김주원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알천(북천)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날만큼 큰 냇물이었다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물이 거의 줄어 든 상태이다.
경주시에서는 2010년 이후 형산강 물을 보문호수로 끌어올려 알천물이 사계절 가득 흐르게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주의 상징 '알천'을 느긋이 산책하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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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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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은 조연들의 활약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드라마이다.
얼마전 백제군과의 아막성 전투씬에서 용맹함과 카리스마있는 지도력을 보여
단연 검색 순위상위에 랭크된 알천랑을 비롯해
샤방샤방한 풍월주 호재,
카리스마 호위 무사 대남보등의
10화랑이나 미실을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는 꽃중년 설원랑,
코믹 연기를 담당한 죽방, 고도 등 드라마에서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무르익은 연기를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그 중에서도 미실의 동생으로 출연해서 매번 얄미운 <썩소>로 
시청자에게 각인된 미생(美生) 정웅인을 미실궁 세트장에서 만나 보았다.





원래 꽃미남으로 서라벌 일대를 주름잡았던 미생이 맡은 배역인지라 정웅인의 의상 또한 화려하고도 품위가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기보다 실제 모습은 훨씬 멋지고 풍채도 당당하다.





이요원,고현정,엄태웅 같은 주연급 배우들은
일반인이나 기자는 물론 스텝들에게도 사진 찍히는걸 완강히 거부하는 통에 사진 찍기가 정말 어려운데 반해
정웅인은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요청에 기꺼이 허락하고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야간이라 조명이 너무 어두워 플래쉬를 터뜨리며 몇 장 눌렀더니 
"플래쉬 안 터뜨리면 더 잘 나오는데..."하고 코치까지 해 준다...ㅎㅎ





어설픈 사진 애호가인 필자의 셔터 세례에도 정웅인은 즐겁게 여러번 포즈를 바꾸며
카리스마있는 표정, 재미있는 표정, 귀여운 표정을 번갈아 지어 주어 진정한 연기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톱스타들이 간혹 보여주기도 하는 폐쇄성 같은 것은 도무지 찾을 수도 없었고 
마치 자주 만난 옆집 아저씨같은 소탈함과 친근감을 그에게서 느낄 수가 있었다.





정웅인은 드라마 매회에서 코믹한 모습과 절제된 모습을 동시에 갖춘 미생의 캐릭터를 확실히 보여주는데
8년만에 재도전하는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연극 무대에서 다져진 안정된 연기력을 맘껏 발휘하여 
드라마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감초연기자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라며...
여러가지 즐거운 표정과 포즈로
기꺼이 초보 사진사의 모델이 되어주신 멋진 정웅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정웅인의 배역인 '라벌 최고의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던  '미생(美生)' 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화랑세기 10대 풍월주 十世 美生郞 (10세 미생랑) 편>에서 중략하고... 생략하여...  요약해 보았다.

서기 550년에 태어난 10세 풍월주 미생랑(美生郞) 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아시다시피 미생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인데 
진흥대제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은 까닭에 미생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제는 여러번 불러 입궁시켜 동륜태자,금륜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우게 하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고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공주들과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다.
이에 진흥대제가 문초하려 하자 사도황후가 비호하였고
진흥대제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미실의 명을 받아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가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라 말에 오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미진부공이 그를 화랑에서 쫓아내려 했지만 미실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문노는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 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하며 내치려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미생을 싫어했고 미생 또한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에 사다함이 곤란하였다.

미실의 남편 세종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생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서기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미생의 나이는 이미 36살이었고
3년 동안 풍월주의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니 하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미생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래 사람의 마음을 몰랐고
성품 또한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화랑도으로 있었기에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만여명이라 함) 모두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기에 유화((遊花)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고 
미생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미생을 천간성(天奸星)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거할 때도 시첩 수십인이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고 하니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고 하고
진(陳)나라의 사신은 이르기를 자기 나라에도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른바 서라벌 최고의 플레이보이라고 할 수 있다.

미생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는데 미생의 아들인 백생(白生)·월생(月生)·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고
드라마에서 미실의 호위무사로 등장하는 백호비도의 수장인 화랑 '대남보'도 미생의 아들이다.

미생이 백명이나 되는 아들을 사랑하는 정은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는데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품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어머니 묘도부인을 뵈러 갔는데 묘도부인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미생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라고 물으면
미생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주었기 때문에 여러 아들이 미생을 사모하여 따랐다.
미생은 매번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출근하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으므로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지만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미생이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생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생의 노비가 미생의 옥배를 훔친 일이 있는데 미생이 처벌하려하자
노비는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미생의 어머니 묘도부인이 미생을 보고 꾸짖어 
"노비는 수족이요,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부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현사(賢士)를 높이고 무리를 사랑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고 하였더니
미생은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 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하였더니 도둑질은 이내 스스로 그쳤다.

또 미생은 일찍이 동륜태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 다녔는데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를 맺었다.
동륜태자가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죽고 난 후 미생은 당두의 처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 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미실이 곧 미생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고 꾸짖었다.
미실의 말을 들은 미생은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자는 미생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는데 미생은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미생은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였다.
미생은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미생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미생이 조부(調府)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진평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리자 미생은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고 하였다.
당두의 처는 미생의 세 아들을 낳았는데 미생은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일을 서라벌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겼다고 한다.
미생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며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묘도부인은 사도 태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서
미생을 비롯한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미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색공지신(色供之臣: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 하였다.
미생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은 것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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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기 60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6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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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고 부귀로운 화류(花柳)의 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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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화랑세기'는 1989년에 발견되어 오랜동안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책.
원자는 김대문인데 그에 의해 화랑세기가 쓰여진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보는 사람은 자기들이 알고있는 신라의 모습과 따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
당시에 사용하지 않던 글자들이 있다는 점등을 들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화랑세기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삼국사기 자체가 신라인 후손에 의해
유교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므로 신라사회를 미화했을 수 있으며
그밖의 다른 유물들을 볼때 화랑세기에 나타난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풍속등은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사회의 자유로운 성풍속은 성행위를 묘사하는 각종 토우들이나 성적인 장난감, 삼국유사의 직접적인 성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 이후 유교의식에 젖어 있던 우리네 상식으로는 여성의 지위가 생각 외로 높았던 신라 사회와 
조선에 비해서 너무나 자유로웠던 신라사회의 성의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든 아니든 화랑세기에 그려져 있는 10대 풍월주 화랑 미생은
드라마에 비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간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여자와 돈을 밝히고 향락에 치우친 불성실한 인간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의리 빼면 시체인 
전형적인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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