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3.26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 경주최부잣집 55
  2. 2008.02.11 화재 직전 숭례문의 아름다운 자태 3





  포근하고 화사한 봄날 오후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을 찾아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란 말..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사회지도층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富不三代)"란 말이 있지만 경주 최부잣집의 경우엔 예외이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무공 최진립이다.

 청백리로 유명한 최진립은 지극히 검소해 300년 부의 토대를 닦았는데 

최국선을 비롯한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 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12대 300년 이상을 만석꾼으로 일가를 이룬 경주 최부잣집의 300년 이상을 이어온 <가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아라.(큰 벼슬을 하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라.(신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남들이 어려울 때 재산을 모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가문의 며느리 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가난을 체험해 보아서 어려운 사람을 이해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교동에 자리잡은 최씨 고택을 돌아본다. 

최씨 고택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 경에 건립된 집이다.  

 이 고택은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데  


 원래는 99칸이었던 이 집은 현재 대문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채로 오래 방치되었는데 


 근래에 옛 모습 그대로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하인들이 기거하던 곳은 대문채이고 


 대문채 옆 텃밭에서 마주 보이는 곳은 안채이며 오른쪽이 유명한 최부잣집의 고방이다.


최부자집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고방... 

 소작농들에게서 거둔 볏섬을 차곡차곡 쌓아두던 고방은 크기도 크거니와 건물의 높이도 엄청 높다.


 이 고방의 열쇠는 마님 만이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비어 있어 자물쇠로 잠글 필도 없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지금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는 듯 하다.


 안채 앞의 절구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사실 이 집 뿐 아니라 입구 오른 쪽에 있는 요석궁(현재 음식점)을 비롯하여

이 일대에 있는 모든 집이 다 최부자의 집이다.


 만석 지기 최부자집의 일년 소작 수입은 삼천석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천석은  집 안에서 쓰고 일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데에,

나머지 일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에 썼다고 한다.

쌀 일천석이라면 당시의 경제 규모로선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최부자집에 과객이 많을 때엔 일백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집 안에 다 수용을 못해 최부자집 주변의 집으로 과객을 보낼 땐

반드시 과메기와 쌀을 같이 보내 손님을 대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과객들이 떠날 때엔 과메기와 하루 양식,노잣돈까지 챙겨서 보냈다고 한다. 


 최부자집의 과객 대접이 융숭하다는 소문은 경상도,전라도 뿐 아니라

이북 지역까지 널리 퍼졌다고....


이런 만석 지기 재산은 12대에 끝나게 된다.

하지만 자녀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씨 고택을 방문하는 이들은 한결같은 감동을 받고 나서게 된다. 


  '부불 삼대(富不三代)'라고 부자가 3대를 이어가기 힘든 세상에

12대를 부를 누린 최부자집의 가훈에서 받은 교훈보다 더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렇게 지켜 온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시켰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300년간 묵묵히 실천해 온 최부잣집의 교훈을 본받는

재벌이나 지도자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나타나 주길 바라면서 최씨 고택의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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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사이 숭례문이 속절없이 다 타 버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다 타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연.실.색.......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을 다 견디고
꿋꿋이 살아서 육백년을 건재해 온 국보 1호

 .

 .

지난 달 숭례문에 사진 찍으러 갔을 때에 그 수려함과 장엄함에 반하여
아무런 제재도 없이 누구나 그 근처를 다 오갈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또 저녁이 되어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는 점에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 것이 비단 숭례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화재에는 취약한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화재 진압 장비 하나 번듯하게 없이
달랑 소화기 몇 대 비치되어 있는 것이 정말 불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루 밤 사이에 속절없이 타서 무너져 버리다니..... 

                                                                                              

조선 시대에 화재가 났다 하더라도 대처하는 것이 이보다는 나을 듯 하다.
자기 집,자기의 재산이면 이렇게 안일한 대처를 했을까.....
정말 어이없는 화재로 인해 우리의 국보 1호를 몇 시간 만에 홀랑 태워먹었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이 있을까....
눈물이 나고 목이 메인다....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우리 나라의 자존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건지...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담은 숭례문의 모습을 쓰라린 심정으로 공개할까 한다.
지난 달 남대문 카메라점에 부속품을 사러 갈 때에 숭례문 바로 옆에 차를 주차했기 때문에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숭례문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

원형대로 복원하는데에는 거의 5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이제 당분간 보기 힘든 아름다운 숭례문의 모습을 몇 장 여러분 앞에 올려 드린다. 

 

 

평소에 그 옆을 지나쳐도 힐끗 올려다 보기만 했지...자세히 살필 생각을 별로 안 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숭례문은 그 위엄과 수려한 자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비둘기들이 휘...날아서 숭례문 지붕으로 모여 앉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숭례문은 서울 성곽의 정문이다.  또한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7년(1398년)에 처음 건립한 후 세종30년(1448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숭례문 중앙 현판의 글씨는 지봉유설에 의하면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어 일반 백성들이 드나 들 수 있게 하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석축과 새로 보수하여 끼워넣은 석축이 혼합되어 있다. 

 

 

홍예문 위에 정면 5 칸,측면 2 칸인 2 층 문루를 세우고 문루 위에 다시 처마를 4 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처마 끝은 여러 개의 나무로 짜 맞추어 댄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이다. 

 

 

숭례문의 잡상(雜像)은 모두 아홉인데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잡상 뒤에 비둘기가 잡상의 일부분인 것 처럼 앉아 있다. 

건물 내부의 2층 바닥은 널빤지로 깐 나무이고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 만이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깐 우물 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성곽 흔적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숭례문의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문갈고리들도 장중한 대문의 위세에 한 몫을 한다. 

 

 

 

 홍예문 안 쪽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이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석축들의 흔적.... 전란이 스쳐 간 상처들이 곳곳에 있었고.... 

 

 

 

 

천정화는 세밀하고 화려하여 목이 아프도록 오래 쳐다 보게 만든다. 발이 넷 달린 청룡의 모습. 마주 보고 있는 황룡의 모습. 구름의 모습이 단순화, 회화화되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숭례문 안 쪽의 사진을 찍고 나오니 웬 청년들이 나와서 주변에 꽂혀 있던 깃발을 거둔다. 

 자세히 보니 아까 퇴근하던(?) 수문장과 수문군이다.
숭례문 근처 어디인가에서 복장을 갈아입고 나와 깃발을 수거해서 다시 일반인의 모습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웬 여자가 촌스럽게 남대문 사진을 찍고 난린가...하는 표정으로 흘깃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숭례문 앞을 지나가는데 대부분 한번 올려다 보지도 않고 지난다.
그들에게 숭례문은 매일 생각없이 스쳐 지나는 길가의 전봇대나 다른 바 없이 느껴진다.

 언제나 바로 옆에서 늘 있어온 그림자 같은 숭례문.....
너무나 가까운 곳에 편안하게 있어서 우리에게 그 귀중함을 전해 주지 못하였나 보다.
우리의 유산,우리의 귀한 문화재는 다른 이가 와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때에 우리 것은 보존되어지는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이 여느 문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을 본다.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위 아래로 있을 경우 불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로써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데
현판의 그 불꽃이 숭례문을 한순간에 태워버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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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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