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예술의 전당을 바라보는 강 건너 마을은 '금장리'라고 불리워왔는데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서천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알천이 만나 소용돌이치는 이곳을

금장리라고 부른 까닭은 바로 이곳 야산 위에 금장대(金丈臺)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기팔괴'의 하나인 금장대는 그동안 아무것도 없이 그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2010년 11월부터 발굴을 시작해 정면 5칸, 측면 3~4칸의 건물로 추정되는

장방형 석축을 발굴한 후 같은 크기의 정자를 복원하기 시작하여

2012년 9월 4일 준공식 후 지구촌 문인들의 잔치인 국제펜(pen)대회도 이곳에서 개최하였다.

 

필자는 금장대를 지금처럼 복원하기 이전에도 여러번 이곳에 올라보았고

무녀도의 배경이 된 금장대 아래 깊은 늪인 '애기청소'에 대해서 포스팅한 적도 있었는데

터만 남아있던 금장대가 새로 복원되었다기에 궁금한 마음을 안고 금장대를 찾아보았다.


 

 

 

서천(형산강)의 서쪽에 위치한 금장대의 전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지나 강변로에서 우측으로 빠져 서천둔치로 내려가 본다.

 

 

 

 

나즈막한 야산인 금장대 왼쪽으로는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오른쪽으로는 금장 아파트 단지가 펼쳐지는데

금장대 바로 앞은 서천(형산강)과 북천(알천)이 서로 만나 소용돌이치며 깊은 소를 이루는 곳으로 

그 이름을 '애기청소(예기청소)'라고 한다. 

 

 

 

 

금장대를 맞은편에서 바라보면 애기청소의 푸른 물에 그 모습이 비쳐 마치 길쭉한 땅콩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작년까지는 아무 것도 없던 금장대 언덕 위에 커다란 정자 하나가 날아갈 듯 올라앉은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 렌즈를 줌인하여 보니산뜻한 단청을 입힌 정자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크고 웅장한 정자 현판에는 '금장대'라는 글씨가 너무나 선명하다.

 

 

 

 

강 건너에서 금장대의 전체 모습을 살펴 보았으니 이제 직접 금장대로 올라갈 차례이다.

강변로에서 동대교를 건너 동국대병원 맞은편에 새로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장대로 올라가본다.

 솔향기 폴폴 풍기는 나즈막한 숲길을 잠시 걸으니 금방 금장대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입구를 통해 금장대 마당에 올라서니 맞은편에서 보기보다 정자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

새로 단장한 단청은 눈부시게 산뜻하고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처마는 날렵하게 하늘로 그 날개를 들었다.

 

 

 

 

 오후 10시 늦은 시간까지 올라가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정자 위로 신발을 벗고 올라가 본다.

 

 

 

 

정자 위에 올라서자마자 아름드리 기둥들 사이로 경주시내가 한눈에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면적이 20칸에 이른다니 정말 넓고 시원하게 잘 지어졌다.

 

 

 

 

정자 한가운데 다기들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신라인 한분에게 시선이 간다. 

"차 한잔 하시고 가이소~"하며 감로차 한잔을 부드럽게 권하는 신라인.

웬 신라인이 이곳에서 차를 베푸시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신라문화제의 일환으로 이곳에 오는 시민들에게 다도시연을 하시는 중이란다.

 

 

 

 

신라의 토기들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다기들은 그 모양새도 정말 재미있다.

 

 

 

 

이런 뿔 모양의 찻잔으로 차를 마신다면 다 마실 때까지 잔을 내려놓기 힘들테니 술잔으로 치면 원샷잔인 듯 하다.

 

 

 

 

 베풀어주신 따스한 감로차 한잔으로 몸을 따스하게 한 후 난간에 기대어 기러기도 쉬어 갔다는 금장대의 경치를 즐겨본다.

신라시대에는 망자들의 영원한 휴식처였던 강 건너 황성동에는 대규모 아파트들과 예술의 전당이 들어섰다.

 

 

 

 

금장대 오른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서천 위를 가로지르는 동대교와 서천교가 운치를 더한다.

 

 

파노라마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8192X1856)

 

넥스-5(NEX-5)의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서 금장대에서 본 풍경을 파노라마로 담아보았는데

사진 가운데 보이는 북천(알천)은 덕동댐과 보문호수를 지나 시내 한가운데를 흘러 이곳 애기청소로 흘러든다.

애기청소는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무녀 모화가 망자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빠져죽은 곳으로 유명한데

신라 자비왕 때는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던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어디서든 백로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주이지만 금장대 앞 애기청소에는 유난히도 백로가 많이 날아다닌다.

금장대 뒤 동국대학교 뒷산에 백로서식지가 있어서 그런지 이곳 애기청소는 백로의 최대 먹이공급처이자 놀이터인 것 같다.

 

 

 

 

백로뿐 아니라 기러기, 청둥오리 등 철새들도 여기저기 헤엄쳐 다닌다.

신라의 '삼기팔괴(三奇八怪:3가지 진기한 보물과 8가지 괴상한 경치)'중 '하나인 '금장낙안(金臟落雁)'은

'신라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 높은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서라벌이 한눈에 굽어 뵈는데, 

애기청소 푸른 물에 비치는 전망이 아름다워 날아가던 기러기도 잠시 내려서 쉬어 간다'고 한다는데서 비롯된 말이니

금장대에 올라서면 오늘도 서라벌이 한눈에 보이고 푸른 물에 비치는 풍광은 여전히 아름답다.



Copyright 2012.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명활산을 지난 알천(북천)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다
경주 동국대 앞 금장대 앞에 이르르면 영일만으로 흘러가는 서천과 만나게 되는데
두 물길이 만나 휘감아 돌면서 깊은 늪(沼)을 이루는 곳이 바로 애기청소다.





이곳 애기청소는 김동리의 단편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되기도 했는데 

무녀인 모화가 망자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어 빠져 죽은 곳이다.
물이 차갑고 깊기로 유명한 이곳은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 넣고도 밑이 안 닿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어릴 적부터 경주에서 살아오던 이들은 더운 여름날 알천이나 남천에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이곳 애기청소는 죽은 애기 귀신이 발목을 잡아끈다는 소문으로 인해 소름끼쳐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예전부터 이상하리만큼 꼭 한 해에 한 사람 씩 빠져죽는 물놀이 사고가 있어서
매년 봄에는 이곳에서 원혼을 달래기 위한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애기청소(예기청소라고도 함)에 개한 명칭에는 몇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첫째, 신라 제20대 자비왕대에 을화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
둘째 조선시대 경주 지방 사대부들이 예기(藝技)인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라는 설,
셋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이후에 와전되어, 매년 한명씩 어린아이(애기)들이 빠져 죽는데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되었다는 설,
넷째 신라시대 귀족의 딸인 예기 또는 애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에
친구들과 같이 금장대에서 소나무에 매어 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아래 강물에 빠져 죽은 이후로
이곳에서 
물놀이나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익사 사고가 자주 일어나
애기청소라 불렸다는 설 등이 전하나 그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한다.





애기청소를 내려다 보는 절벽 위에는 '금장대'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누각의 주춧돌만 남아 있다.
높이 90m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인 금장대에 오르면 경주 남쪽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동쪽으로는 금장교, 서쪽으로 동대교와 장군교와 함께 형산강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금장의 기록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로 이곳이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기팔괴(三奇八怪)란 경주의 예로부터 세 가지 진기한 보물과 여덟 가지 괴상한 풍경이 있는 것을 이름인데
팔괴 중 금장낙안이란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 높은 바위에 올라서 바라보면 서라벌이 한눈에 다 보이고
금장대 아래 푸른 물에 비치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날아가던 기러기도 잠시 내려서 쉬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만큼 금장대에서 바라본 경치가 좋았음을 상징하고 있다.





금장대 아래 바위에서 내려다 보니 살얼음이 얼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벽 아래 강물은 시퍼런 색깔을 띠고  있어 수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3~4km 위에서 형산강 본류와 남천이 합쳐지면서 물길이 세어지는 곳으로
불어난 물길은 곧바로 흘러내려 오다 금장대 아래서 휘돌아 하류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렇듯 깊은 소(沼)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곳 금장대에는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암각화란 바위나 동굴의 벽면에 기호나 물건의 모양을 새겨 놓은 그림을 이르는 것인데 
이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유적조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암각화는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되는 범위에 걸쳐 새겨져있는데
공식적인 명칭은 '경주 석장동 암각화'이고 경상북도 기념물 98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27점이 확인된 이곳의 암각화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새겨진 그림은 기하문 8점과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성기(女性器) 3점, 배 1점, 그외 동물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등이 있는데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색이라고 하며
특히 검과 결합된 여성기의 그림 등은 포항 칠포리 암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문외한인 필자의 눈으로는 한 두가지 형태만 알아 볼 수 있을 뿐 나머지 그림은 마모가 심해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쉬운 점이다.

 

 


암각화를 돌아보고 금장대에서 내려와 저녁 어스름이 깔려오는 애기청소를 다시 돌아 보니 
무녀도 마지막 장면에서 넋두리를 하며 물 속에 잠기는 모화의 마지막 피맺힌 절규가 들려오는 듯 하다.
"불러 주소 불러 주소. 우리 성님 불러 주소, 봄철이라 이 강변에 복숭아 꽃이 피그덜랑, 이내 소식 물어 주소."

 

Copyright 2011.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글이나 사진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하루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하늘의 구름들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데.....
어느날 경주 알천 하늘에 나타나 거대한 두 날개와 길고 긴 꼬리를 붉게 불태우며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 마리 피닉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새 '피닉스(phoenix)'. 
'불사조'로 알려진 이집트의 '피닉스(phoenix)'는 그 크기가 독수리만 했고
빛나는 주홍빛과 황금빛 깃털을 갖고 있었으며 우는 소리가 음악과도 같았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의 문헌들은 한마리만 존재하는 이 피닉스의 수명이 500년 이상이라고 기록한다.  


   

피닉스는 수명이 다해가면 향기로운 가지들과 향료들로 둥지를 만들어, 거기에 불을 놓아 그 불 속에 스스로를 살랐다.
그러면 거기에서 새로운 피닉스가 기적처럼 솟아올라서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태양의 도시)로 날아가
그곳에 있는 태양신의 사원 제단 위에 그 재를 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죽어가는 피닉스가 헬리오폴리스로 날아가 제단의 불에 스스로를 바치고
거기에서 새로운 피닉스가 나오는 것으로 전해 온다.



 

저 피닉스의 두 날개 사이에 올라타서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상상을 잠시 해 보았다.

하늘로 끝없이 올라가다 수직 하강을 하면 얼마나 짜릿할까....그런 상상을......




 
2008년 12월 14일 17시 16분 경주 알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김유신의 포스를 물리치고 단연 인기를 끌고 있는 비천지도의 화랑 알천랑.
알천(閼川, 577~686)은 역사적으로도 선덕,진덕여왕 시대 최고의 무장이며
신라 최고 의정 기관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알천랑은 신라를 건국한 공신인 소벌공의 25대손으로 '알천'은 젊은 시절 이름이고 본명은 '소경'이다.
(성씨는 진주 소씨로 소지섭의 조상님이 되신다는...^^)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알천의 업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선덕여왕이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의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므로 나라의 서남쪽 변경에 있는 옥문곡에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을 예지하고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마침 백제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 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선덕여왕 7년 겨울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과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 당시 술종,·임종,·호림, 염장, 유신
등과 함께
나라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산 우지암이란 곳에서 회의를 연일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좌석으로 달려들어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피하였지만
알천은 그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아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알천의 담력과 용맹은 당대 최강이었을 듯.....

그는 선덕여왕 7년(638)에 이찬 등을 지낸 뒤 각간(角干)에 올랐고
당시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회의 의
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이 화백회의 의장이었을 당시,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 임종, 호림, 염장, 유신
등이었다.
647년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진덕여왕 1년(6
47)에는 반란으로 죽은 비담
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으니
알천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알천은 화백회의에서 섭정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며 김춘추에게 양위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니 김춘추(유승호)는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太宗武烈王)이다.

당시에는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알천이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더라면 왕위를 한번 노려볼만도 한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배경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신흥귀족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
치적 책략이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무열왕 3년(656년) 무열왕은 신라개국공신인 소벌도리에게 문열왕(文烈王)의 시호를 내렸는데
일설에는 왕위를 양보한 알천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그의 선조인 소벌공을 문열왕으로 추봉하였다고도 한다.
그후 알천은 늦도록 손자가 없다가 꿈에 선조 소벌도리가 지목한대로
660년 3월 2일 금성에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뒤 며느리 석씨가 손자 복서를 낳았다.
이에 손자가 태어난 기쁨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천에서 경(慶)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알천은 581년에 태어나 6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10세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인물이다.


알천랑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알천'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이승효의 열연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경주 사람들에게 '알천'이란 이름은 경주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를 가려면 보문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변을 따라서 보문단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덕동댐에서 시작하여 보문호수에 고였다가 경주시내를 관통하여 서천(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의 중심을 흐르는 이 강이 바로 '북쳔(北川)'으로도 불리우는 '알천(閼川)'이다.



경주에서는 알천의 이름을 가진 지명을 강 인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알천을 따라 뻗은 북쪽 도로의 이름은 알천 북로이며 



알천의 북쪽 수직으로 뻗은 도로는 알천길이다.



주소에서도 알천길이라는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수퍼 이름도 알천 수퍼이다.



알천에 가로놓인 교량은 4개가 있는데 그중 교육청과 소방서를 연결하는 교량의 이름은 알천교이다.



특히 알천변의 고수부지에는 테니스장, 정구장, 족구장, 게이트볼장 등 체육시설과
인라인, 자전거, 산책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멀티풀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어 경주 시민의 휴식처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보문 입구에서부터 공설운동장 입구 경주축구공원까지 10개소에 이르는 잔디 축구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해마다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를 비롯하여 국가 대표 축구팀의 단골 전지 훈련 장소로 쓰이고 있는 경주의 자랑거리이다.



알천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경주의 알천과 관련된 지명을 소개하니
경주 알천이 알천랑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가...... 하고 오해하는 분도 계신 듯 하다.
하지만 알천의 역사는 육부촌 시절의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오히려 경주를 흐르는 중심 강인 알천의 이름을 따서 '알천(閼川)'이라고 이름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을 듯 하다.
그 점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


경주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이 알천으로 인해 역사가 바뀐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삼국유사는 이 꿈에 전혀 다른 두 해몽을 기록해 놓았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이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이후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버리자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왕위 계승 1순위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 때 김주원의 집은 알천(북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왕위 계승 2순위인 김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제 38대 원성왕이 된다.
이때 알천을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아들은 바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오늘날에는 덕동댐과 보문호수가 세워져 치수 관리를 하는 바람에 알천의 물이 줄어들었지만
신라시대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나서 알천 양쪽 마을 전체를 다 덮칠 만큼 큰 강물이었으니
만약에 그때 비가 오지 않았고 알천물이 불어나지 않았더라면 김주원이 왕이 되었을 것이고 신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또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된 화랑이 생겨난 배경에도 알천과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신라 24대 진흥왕 원년인 540년, 
삼산공의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화랑의 전신)가 되었는데 그녀는 수하에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南毛公主)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미진부(법흥왕의 외손인데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미실,미생을 낳음, 2세 풍월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이복자매인 지소태후 역시 미진부를 사랑하였으므로 남모를 도와 그녀를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준정은 남모가 원화가 되려는 것을 막고 자신이 계속 원화로 남아 있으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1세 풍월주)의 낭도를 그녀에게 더하여 주기까지 하니 준정은 투기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남모공주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데 따르던 낭도들은 그녀의 행방을 찾느라 서라벌 곳곳을 뒤지다가 
궁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집으로 꾀어 술을 먹였다네
준정이 공주를 시기하고 있었다네
술 취한 공주를 강물에 빠뜨렸다네
공주는 돌밑에 깔려 죽었다네
불쌍한 공주는 아직도 물속 바위 밑에 누워있다네…

궁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궁 안에 살던 왕족의 아이들이 배워 부르면서 뛰어다닌 것인데
이는 사건의 내막을 아는 누군가가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퍼뜨린 것이다.
진흥왕의 황후 지소태후는 준정을 잡아들여 추국하니 정말 남모의 시체는 노래에 나오는것처럼 알천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준정은 남모에게 술을 먹여 쓰러지게 한 후 자신의 낭도들을 시켜 남모를 죽여 알천에 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지소태후는 바로 준정을 사형에 처하고 원화 제도를 페지하고 선화(仙花,국선화랑)를 화랑으로 삼았으니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미녀인 준정과 남모, 2명을 원화로 뽑았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했다'고
단순히 준정이 자신보다 미모가 빼어난 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랑세기 2세 풍월주 미진부편을 보면 지소태후가 남모의 낭도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위화공(원화가 폐지되자 1세 풍월주가 됨)으로 하여금 그 수를 갑절로 늘리도록 하자
세력에서 열세에 몰린 준정이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다 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최대의 정치 단체인 '화랑도'의 탄생 배경에는 여성들의 이같은 세력 다툼이 숨어있었고 그 배경에 알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알천

알천과 관련해 북쪽인 동천마을과 남쪽인 구황마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덧붙여 본다.
동천마을(새주소로 알천길)에는 신라 41대 헌덕왕릉이 있고 구황마을에는 분황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암곡 가내골 등 험준한 여러 계곡에서 급경사로 흘러내리는 알천의 물은 해마다 여름이면 두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어 동천사람은 헌덕왕릉에 빌고 구황사람들은 분황사 부처에게  빌었다.

구황마을의 기도가 세어지면 큰 홍수 때 알천물길이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동천마을의 피해가 크고 헌덕왕릉이 훼손됐다.
동천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덕왕릉에 빌면 알천물길이 반대로 흘렀다.
그래서 물길이 북쪽으로 치우쳐 흐르면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에서 땀이 흘렀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렸다.

헌덕왕의 영혼과 분황사 부처가 치열하게 싸우자 알천 냇물의 홍수는 마침내
남쪽으로도 못가고 북쪽으로도 못가고 하늘로 치솟아 홍수가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우유빛깔 알천랑이 떠오르는 알천, 남모공주가 물속에 잠겨 죽었다는 알천, 김주원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알천(북천)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날만큼 큰 냇물이었다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물이 거의 줄어 든 상태이다.
경주시에서는 2010년 이후 형산강 물을 보문호수로 끌어올려 알천물이 사계절 가득 흐르게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주의 상징 '알천'을 느긋이 산책하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루비™

,




비 그친 휴일 아침..오랜만에 나가는 아침 산책이다.


가뭄 끝 촉촉히 내린 단비로 꽃과 풀들이 오랜만에 생기가 가득하다.


아....북천 둔치가 온통 영산홍과 좀씀바귀꽃으로 뒤덮였다.


가도가도 끝없이 꽃길이 되었다.


곧게 뻗어 있는 길에도....


구불구불한 길에도 온통 영산홍으로 뒤덮였다.


하얀 꽃,빨간 꽃,분홍 꽃...색깔도 다양하다.


지난 밤 내린 비로 꽃이파리 마다 대롱대롱 물방울이 달렸다.


비에 젖어서 이파리 빛깔이 더욱 더 선명하고 싱그럽다.


대롱 대롱 매달린 물방울은 금방이라도 발등 위에 똑.... 떨어질 것만 같다.


이렇게 큰 물방울 안에는 꽃도 하늘도 다 들어 있다.


찍어주어서 고맙다고 양팔을 벌리고 반갑게 인사하는 영산홍.


새로 돋아난 연둣빛 이파리들도 비에 젖어 한층 더 싱그럽다.


힘차게 양팔을 휘저으며 걷는 동네 아저씨의 뒷모습이 오늘 따라 더 경쾌해 보인다.


걷는 이도 앉아 쉬는 이도 다 꽃향기에 취하는 기분좋은 휴일이다.


떨어진 꽃잎마져 싱그러운 비온 후 아침.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