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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01 무영탑의 슬픈 전설 어린 영지 22


경주 시내를 벗어나 울산쪽으로 7번 국도를 달려 불국사역을 지나면 오른쪽 철로와 같이 달리게 되는데
괘릉 가기전 토비스 콘도 쪽으로 핸들을 꺾어 1km 쯤 가면 고즈녁한 못이 하나 나타난다.
못의 이름은 '영지(影池)',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란 뜻이다.





못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경관 또한 크게 아름다울 것도 없어서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근래에 와서 정자를 하나 짓고 주변에 산책로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찾는 이 별로 없이 시람들의 관심에서 멀기만 한 그런 곳이다.





비 오는 날 찾은 영지는 더욱 더 심심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낚시하는 분 몇 사람이 찾아와서 텐트를 쳐놓고 심심한 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뿐.....
잠시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한바퀴 둘러보는데 못 가의 흙으로 인해 신발만 엉망이 되어 얼마 못 걷고 다시 차로 돌아와야 했다.





심심하고 평범한 영지는 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내려서 돌아 보지도 않는 못이지만

알고 보면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영탑 전설'이 전해져오는 제법 유명한 못이다.





현진건이 쓴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고교시절 국어시간을 통해서 '무영탑에 얽힌 전설'은 어렴풋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무영탑'은 1938. 7. 20∼1939. 2. 7 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현진건의 장편 역사 소설인데
신라 시대 불국사 무영탑의 건립을 중심으로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 비극적 사랑의 전설을 현대 소설로 살려내었다.




무영탑(無影塔)이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 옆에 서 있는 석가탑을 이르는 말이다.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지휘 아래 신라는 불국사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공사에는 많은 백제 출신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되고

대웅전 앞에 세울 석탑을 창건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 출신 석공 아사달이 불려오게 된다.
신라의 부름을 받은 아사달은 아내 아사달을 두고 서라벌로 향하게 되는데......

진정한 석공은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탑을 세우는데 전념해야 하는 법이라 아사달은 아사녀에 대한 그리움도 떨쳐버리고
오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성하는데만 일념을 다한다.
다보탑을 2년 만에 완성하고 이제 석가탑을 세우고 있는 초파일 밤, 불국사에 왕이 행차를 하였다.
일행은 다보탑을 보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일행에 끼어 온 이손의 딸 구슬아기는 극도의 감격을 느꼈다.
왕 앞에 나온 석공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은 서라벌을 넘어 부여까지 퍼지게 되고
손꼽아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혼자 서라벌로 향한다.

천신만고 끝에 불국사에 도착하였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경내로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녀는 입구에서 제재를 받게 되는데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고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곧 결혼한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으니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지고
상심한 그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탑을 뒤늦게 완성한 아사달은 부여로 향하려고 서둘러 불국사 문을 나서다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못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아사녀가 벗어놓은 짚신 한켤레만 아사달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사달은 자신의 못난 처지를 가슴 아파 하며 울부짖으며 못 주변을 방황하며 아내를 그리워했는데
아사녀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을 보고 
망치와 정으로 아사녀를 새긴 후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도 그 당시 조각하였다는 아사녀의 모습을 지닌 돌부처가 영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토함산 기슭에 있는 동리 목월 기념관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사달 추모탑이 있다.

앞면에는 아사달의 예술혼을 석가탑 형태로 표현했으며 뒷면은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을 부조로 나타내었는데 

오랜 세월 기다리다 만나지 못하고 생을 달리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그리움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애틋한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소설 '무영탑'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것이 아니고 역사의 전설을 재구성하여 소설화 한 것이므로

혹자들은 이야기 소설이 정설인 것처럼 문화재 설명서에 실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론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소설에서는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조건 등의 의미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작가 현진건은 신라 예술의 최고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석가탑을 건축하려는
한 석공의 예술혼과 남녀간의 사랑을 결합시켜 한편의 진지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픽션을 만들어낸 것이니
달리 말하면 작자는 그의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나 전설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향전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남원에 가면 실존 인물보다 더 유명한 춘향이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아사달과 아사녀는 사랑을 이루지 못 하고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았지만

오늘날 영지를 같이 거니는 연인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한다는 다소 현대적인 전설도 전해오니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이루길 원하는 연인들은 사랑의 성지와도 같은 영지를 돌아보고 가심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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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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