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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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49회는 완전 미실과 비담을 위해 쓰여진 극본인 듯 하다.
주연인 덕만과 유신의 존재감은 극히 미약한데 반해 미실과 비담에만 온통 드라마의 촛점이 맞추어졌으니.....


선과 악을 넘나드는 야누스적인 캐릭터로 언제 숨겨진 잔인성을 발휘하여 등을 돌릴지 항상 아슬아슬함을 주던 비담은
염종의 꼬드김에 귀가 한껏 얇아져 있는데다가 덕만의 명을 받고 나무 아래서 파낸 비서(秘書)가
막상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였다는 것을 알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록 자신을 버린 어머니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실에게서 돌아온 비담은 땅을 파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거짓말을 덕만에게 하게 되고
미실은 세종과 하종에게 비담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하는데....
50회에서는 미실이 죽게되는 과정과 함께 절대 충성하던 비담이 덕만에게 배신하게 되는 과정이 서서히 전개될 듯 하다.

드라마에서 진지왕과 미실간의 사생자로 등장하는 비담(毗曇).

사실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누구의 아들인지....그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파기된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비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재위 말기인 645년에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으며
647년(선덕여왕 16년)에 비담의 난을 일으켜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다 반란을 일으킨지 10일만에 진압 당한 뒤
동조하여 난을 도모한 30 여명의 진골 귀족과 함께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비담의 가계는 구족(九族)이 멸하였다는 기록 뿐이다.


비담은 상대등이 된 후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유신, 춘추와 경쟁하게 되는데 점차 세력이 밀리게 되자
"여왕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선덕여왕을 폐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는 심히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는데
왕이 안에서 막아내자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유신, 춘추는 월성에 진을 쳤는데 공방이 10 여일이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그 때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비담은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비담군은 사기가 충천해져 군사들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선덕여왕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유신은 여왕의 근심을 지혜로운 언사로 달래주고
경주 율동의 성부산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리에 말을 퍼뜨리기를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반군들이 의심하게 하고
또 흰말을 잡아 제사를 하며 여러 장졸을 독려하며 싸우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충천하게 되어 10일만에 난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유신은 패주하는 비담 등 주모자를 잡아 목을 베고 그의 구족(九族)을 멸하는데
그 사이에 병환이 심했던 선덕여왕은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게 되고 
진덕여왕이 신라 제28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비담은 분명 진골 귀족들의 수장좌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오를만큼 당대 최고위 귀족이었지만
반역을 꾀한 죄로 역모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파기된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더욱 출신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신라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우리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비담..
선덕여왕 비담의 유명세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 둘 찾기 전에는 세간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던 비담의 근거지, 명활산성을 찾아가 본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진입하다 보면 길이 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보문호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음식점들이 있는 곳 바로 끝부분에 위치한 명활산성의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많은 분들이 찾는 보문단지 입구에 비담이 난을 일으켰던 근거지가 있다고 하면 처음 들었다고 놀라시는 분이 더 많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안내판을 지나면 비포장길을 100m도 채 들어가지 않아 바로 나타나는 산성이 바로 명활산성이다.


명활산성(明活山城)은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신라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으로 인정받아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활산성은
근래에 와서 일부 복원,축조되었는데 복원된 부분은 안팎이 돌로 짜여있으며 길이 50m, 높이 3m 가량의 2단으로 쌓았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또한 '명활산성작성비'가  1988년 석성(石城)의 북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데 

명활산에 산성을 쌓고 세운 기념비인 높이 66.8의 이 기념비는 현재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성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혀 있는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꽉 차게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공사 실무자의 이름 및 담당거리,
④ 공사담당 위치, ⑤ 축성참가자의 수, ⑥ 공사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첫머리의 '신미년'(辛未年)이라는 간지는 551년(진흥왕 12)으로 추정되며,
공사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은 성곽 축조 규모 및 인력 동원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비에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상인나두'(上人邏頭)·'장인'(匠人)·'서사인'(書寫人) 등의 여러 직명도 기록되어 있어
남산신성비와 함께 신라시대 사회제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비담의 난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법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는데
이로써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비담의 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갔고 이들이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제가 실시된다.
이후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신라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신라 중대(中代)가 시작되었으며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선덕여왕, 미실의 죽음도 눈앞으로 다가왔다.
덕만의 강적 미실이 죽고 나면 이제 비담이 덕만의 주적(主敵)이 되는 일만 남아 있는데
덕만을 흠모하며 덕만에게 완전한 복종을 하고 있던 비담이 어떻게 덕만에게 발꿈치를 들게 할지는 오로지 작가의 펜끝에 달려 있을 듯....
야누스적인 캐릭터지만 미워하면서도 배척할 수 없는 나쁜 남자 비담의 앞으로의 역할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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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포스를 물리치고 단연 인기를 끌고 있는 비천지도의 화랑 알천랑.
알천(閼川, 577~686)은 역사적으로도 선덕,진덕여왕 시대 최고의 무장이며
신라 최고 의정 기관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알천랑은 신라를 건국한 공신인 소벌공의 25대손으로 '알천'은 젊은 시절 이름이고 본명은 '소경'이다.
(성씨는 진주 소씨로 소지섭의 조상님이 되신다는...^^)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알천의 업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선덕여왕이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의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므로 나라의 서남쪽 변경에 있는 옥문곡에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을 예지하고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마침 백제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 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선덕여왕 7년 겨울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과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 당시 술종,·임종,·호림, 염장, 유신
등과 함께
나라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산 우지암이란 곳에서 회의를 연일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좌석으로 달려들어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피하였지만
알천은 그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아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알천의 담력과 용맹은 당대 최강이었을 듯.....

그는 선덕여왕 7년(638)에 이찬 등을 지낸 뒤 각간(角干)에 올랐고
당시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회의 의
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이 화백회의 의장이었을 당시,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 임종, 호림, 염장, 유신
등이었다.
647년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진덕여왕 1년(6
47)에는 반란으로 죽은 비담
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으니
알천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알천은 화백회의에서 섭정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며 김춘추에게 양위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니 김춘추(유승호)는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太宗武烈王)이다.

당시에는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알천이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더라면 왕위를 한번 노려볼만도 한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배경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신흥귀족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
치적 책략이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무열왕 3년(656년) 무열왕은 신라개국공신인 소벌도리에게 문열왕(文烈王)의 시호를 내렸는데
일설에는 왕위를 양보한 알천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그의 선조인 소벌공을 문열왕으로 추봉하였다고도 한다.
그후 알천은 늦도록 손자가 없다가 꿈에 선조 소벌도리가 지목한대로
660년 3월 2일 금성에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뒤 며느리 석씨가 손자 복서를 낳았다.
이에 손자가 태어난 기쁨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천에서 경(慶)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알천은 581년에 태어나 6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10세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인물이다.


알천랑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알천'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이승효의 열연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경주 사람들에게 '알천'이란 이름은 경주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를 가려면 보문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변을 따라서 보문단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덕동댐에서 시작하여 보문호수에 고였다가 경주시내를 관통하여 서천(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의 중심을 흐르는 이 강이 바로 '북쳔(北川)'으로도 불리우는 '알천(閼川)'이다.



경주에서는 알천의 이름을 가진 지명을 강 인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알천을 따라 뻗은 북쪽 도로의 이름은 알천 북로이며 



알천의 북쪽 수직으로 뻗은 도로는 알천길이다.



주소에서도 알천길이라는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수퍼 이름도 알천 수퍼이다.



알천에 가로놓인 교량은 4개가 있는데 그중 교육청과 소방서를 연결하는 교량의 이름은 알천교이다.



특히 알천변의 고수부지에는 테니스장, 정구장, 족구장, 게이트볼장 등 체육시설과
인라인, 자전거, 산책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멀티풀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어 경주 시민의 휴식처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보문 입구에서부터 공설운동장 입구 경주축구공원까지 10개소에 이르는 잔디 축구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해마다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를 비롯하여 국가 대표 축구팀의 단골 전지 훈련 장소로 쓰이고 있는 경주의 자랑거리이다.



알천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경주의 알천과 관련된 지명을 소개하니
경주 알천이 알천랑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가...... 하고 오해하는 분도 계신 듯 하다.
하지만 알천의 역사는 육부촌 시절의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오히려 경주를 흐르는 중심 강인 알천의 이름을 따서 '알천(閼川)'이라고 이름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을 듯 하다.
그 점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


경주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이 알천으로 인해 역사가 바뀐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삼국유사는 이 꿈에 전혀 다른 두 해몽을 기록해 놓았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이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이후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버리자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왕위 계승 1순위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 때 김주원의 집은 알천(북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왕위 계승 2순위인 김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제 38대 원성왕이 된다.
이때 알천을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아들은 바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오늘날에는 덕동댐과 보문호수가 세워져 치수 관리를 하는 바람에 알천의 물이 줄어들었지만
신라시대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나서 알천 양쪽 마을 전체를 다 덮칠 만큼 큰 강물이었으니
만약에 그때 비가 오지 않았고 알천물이 불어나지 않았더라면 김주원이 왕이 되었을 것이고 신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또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된 화랑이 생겨난 배경에도 알천과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신라 24대 진흥왕 원년인 540년, 
삼산공의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화랑의 전신)가 되었는데 그녀는 수하에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南毛公主)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미진부(법흥왕의 외손인데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미실,미생을 낳음, 2세 풍월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이복자매인 지소태후 역시 미진부를 사랑하였으므로 남모를 도와 그녀를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준정은 남모가 원화가 되려는 것을 막고 자신이 계속 원화로 남아 있으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1세 풍월주)의 낭도를 그녀에게 더하여 주기까지 하니 준정은 투기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남모공주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데 따르던 낭도들은 그녀의 행방을 찾느라 서라벌 곳곳을 뒤지다가 
궁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집으로 꾀어 술을 먹였다네
준정이 공주를 시기하고 있었다네
술 취한 공주를 강물에 빠뜨렸다네
공주는 돌밑에 깔려 죽었다네
불쌍한 공주는 아직도 물속 바위 밑에 누워있다네…

궁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궁 안에 살던 왕족의 아이들이 배워 부르면서 뛰어다닌 것인데
이는 사건의 내막을 아는 누군가가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퍼뜨린 것이다.
진흥왕의 황후 지소태후는 준정을 잡아들여 추국하니 정말 남모의 시체는 노래에 나오는것처럼 알천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준정은 남모에게 술을 먹여 쓰러지게 한 후 자신의 낭도들을 시켜 남모를 죽여 알천에 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지소태후는 바로 준정을 사형에 처하고 원화 제도를 페지하고 선화(仙花,국선화랑)를 화랑으로 삼았으니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미녀인 준정과 남모, 2명을 원화로 뽑았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했다'고
단순히 준정이 자신보다 미모가 빼어난 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랑세기 2세 풍월주 미진부편을 보면 지소태후가 남모의 낭도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위화공(원화가 폐지되자 1세 풍월주가 됨)으로 하여금 그 수를 갑절로 늘리도록 하자
세력에서 열세에 몰린 준정이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다 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최대의 정치 단체인 '화랑도'의 탄생 배경에는 여성들의 이같은 세력 다툼이 숨어있었고 그 배경에 알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알천

알천과 관련해 북쪽인 동천마을과 남쪽인 구황마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덧붙여 본다.
동천마을(새주소로 알천길)에는 신라 41대 헌덕왕릉이 있고 구황마을에는 분황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암곡 가내골 등 험준한 여러 계곡에서 급경사로 흘러내리는 알천의 물은 해마다 여름이면 두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어 동천사람은 헌덕왕릉에 빌고 구황사람들은 분황사 부처에게  빌었다.

구황마을의 기도가 세어지면 큰 홍수 때 알천물길이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동천마을의 피해가 크고 헌덕왕릉이 훼손됐다.
동천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덕왕릉에 빌면 알천물길이 반대로 흘렀다.
그래서 물길이 북쪽으로 치우쳐 흐르면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에서 땀이 흘렀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렸다.

헌덕왕의 영혼과 분황사 부처가 치열하게 싸우자 알천 냇물의 홍수는 마침내
남쪽으로도 못가고 북쪽으로도 못가고 하늘로 치솟아 홍수가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우유빛깔 알천랑이 떠오르는 알천, 남모공주가 물속에 잠겨 죽었다는 알천, 김주원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알천(북천)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날만큼 큰 냇물이었다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물이 거의 줄어 든 상태이다.
경주시에서는 2010년 이후 형산강 물을 보문호수로 끌어올려 알천물이 사계절 가득 흐르게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주의 상징 '알천'을 느긋이 산책하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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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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