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연재해 왔던 터키 여행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터키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을 몇 권 추천하고자 한다.

직접 현지를 방문한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야 말해 무엇하리오만 직접 여행을 가지 못하더라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는 지식이 또한 쏠쏠하지 않는가..... 아래에 열거한 책들은 터키 여행기를 쓸 때에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준 책이라 특별히 추천할 뿐  출판사 측과는 눈꼽 만큼도 이해 관계가 얽혀 있지 않았음을 밝혀 두면서....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인 '인사이드 가이드'와 '디스커버리 채널'이 공동 작업한 '인사이드 가이드 시리즈'의 '터키'편.
터키인들의 삶과 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문가들의 자세한 소개글과 함께 터키의 매력적인 명소와 호텔, 레스토랑, 스포츠, 축제 등 여러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유적지마다 얽혀 있는 역사적 사실,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의 상세한 소개, 세밀한 현지 지도 탑재가 돋보이며 유명 사진 작가들의 작품성이 뛰어난 사진을 보는 맛이 압권인 책이다.

 

 

야심만만 세계 문화 정복 프로젝트 '큐리어스 시리즈' 제10권. 세계로 향한 지적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문화 체험 가이드북 <터키>편이다. 터키의 역사와 문화에서 사람들의 특성, 언어와 예절, 여행, 음식과 대중문화, 정착과 사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터키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여행, 유학, 사업,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친절한 안내서이다.
 

 

터키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은 '작품' 수준의 사진이 실려 있어서 보는 사람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하는 책. 개인적으로는 터키인의 생활이나 국민성을 탐색할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다. 

 

 

테마가 있는 세계 여행 '터키'편. 터키의 교통정보, 숙박, 생활정보, 일반 상식, 관광명소, 요리에서 선물 고르기까지 여행을 떠났을 때 현지에서 필요한 정보를 망라하고 있다.
  

 

잡지 형식으로 많은 현장 사진을 함께 담고 있고 호텔과 식당의 주소와 연락처도 세세히 수록 되어 있다.  가볍지만 알찬 내용이라서 가이드 북으로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우리 실정에 맞도록 제작한 해외 여행 가이드 북 '세계를 간다' 제22권. 터키여행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해외여행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현지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여행 정보를 정리하였다.  

 

 

관광, 교통, 식사, 숙박 등 필수적인 여행 정보를 가득 담았으며, 해당 지역의 사회, 역사, 문화, 풍속 등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최신 개정판이 새로 업데이트 되었다고 하며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서인지 사진의 사이즈가 너무 작은게 옥의 티.....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은 터키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읽기 쉽게 풀어낸 책이다. 현재의 모습을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역사 이야기와 1만 년을 통해 보는 신화,성서의 무대를 접할 수 있다. 또한 역사와 유적 이야기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외대 터키어과를 나와 터키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터키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저자 이희철은 20년간 터키 연구에 몰구하여 터키의 정치뿐만 아니라 터키의 문화·역사에 남다른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터키에 살면서 피부로 느낀 것을 서술하고 있어서  정확하고 생동감 있는 터키의 모습을 전해준다.

 

 

위에 소개한 책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의 저자 이희철이 20년 이상 터키에 살며 연구와 답사를 한 경험을 토대로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는 칭송을 받는 이스탄불의 문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서양의 비잔틴 제국과 동양의 오스만 제국, 두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조화롭게 지니고 있는 역사의 도시인 이스탄불을 찾는 사람들이 유적지를 문화사적인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문화 등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격동의 도시 '이스탄불'을 소개하는 책. 인류의 역사를 담은 유적들 이야기와 도시민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인 이스탄불의 곳곳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이스탄불이 탄생하기까지의 굴곡의 역사를 소개한다. 또한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모습들이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이스탄불을 통해 나와 다른 모습과 생각들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글로벌시대에 적합한 삶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 이희수 교수는 이스탄불을 너무나 사랑하여 무려 85회를 방문하였다 한다. 따라서 그가 들려주는 이스탄불 이야기에는 인류의 역사를 담은 유적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도시민들의 생활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두 터키 홀릭이 터키 곳곳을 4년 간 누비며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터키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여행기록이다. 터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음까지 사로잡혀 바람처럼 자유롭게 터키 곳곳을 떠돌았다는 두 저자가  터키 사람들과 섞이면서 만들어낸 예측불허의 에피소드가 사진과 함께 맛깔스럽게 펼쳐진다.
 

 

하지만 첨부한 사진의 사이즈가 작고 사진의 선명도가 떨어지는 점과 개인의 체험기 위주라는 점에서 여행 지침서로 쓰기엔 추천할만 하지는 않다. 

 

 

장편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인데 1, 2권으로 되어 있다. 16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통해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화해의 역사를 조명하는 추리 소설.   

 

 

이야기는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에 버려진 우물 속에서 시작되는데 우물 바닥에 죽어 누워 있는 시체 '엘레강스'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나흘 전에 살해당해 우물 바닥에 던져졌는지를 이야기한다. 세밀화가들 사이의 질투와 긴장감, 낯선 그림에 대한 종교적인 두려움과 그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은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패배감과 함께 세큐레와 카라의 불운한 사랑 이야기에 맞물려 전개된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인류 문화 유산을 총 정리해서 보여주는 명저 중의 명저.
그 중 '오스만의 화려한 황제 슐레이만'은 14세기 비잔틴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져 1923년 터키공화국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대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가장 화려한 팽창과 번영을 이룩했던 황제 슐레이만의 치적과 생애, 예술세계, 당시의 사회상과 역사를 원색의 사진, 삽화로 조명한 주옥같은 책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 당시 세밀화와 톱카프 궁전 보물 등의 방대한 사진 자료를 보는 맛이 쏠쏠한 책. 문고판이라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와 저렴한 가격도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장점이다.

 

 

이스탄불 소재 유적에 관해 가장 자세한 해설과 사진이 나와 있는 책. 아쉽게도 현지 터키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출판한 책이라 이스탄불의 유적지 기념품 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다.
 

 

'하기야 소피아'에 대한 설명만도 13쪽에 걸쳐 나와 있을  정도로 이스탄불의 유적을 상세하게 조명한 책. 현지에 여행을 가신다면 꼬옥 사서 소장하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터키 여행 관련 도서 중 몇권을 소개해 드렸다. 혹, 이 중 한권이라도 읽으실 마음이 나셨다면 터키로 떠날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다 끝난 듯 하다.

자.....그럼 우리 함께 신화의 나라, 환상의 나라, 신과 인간이 함께 사랑한 땅 터키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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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신의 초강림으로 인해 빈곤한 여행객의 주머니를 한순간에 비워버리게 하는 곳...

'그랜드 바자르(카팔르 차르싀)'는 외국인들이 이스탄불에 오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다.

외국의 수반들이 터키 대통령을 방문하면 영부인들은 어김없이 그랜드 바자르를 방문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수천개의 상점에서 판매되는 수백만 종의 물건들은 전 세계의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카팔르 차르싀'는 '지붕이 덮인 시장'이라는 뜻인데 이 시장은 동양 다른 나라의 지붕이 있는 시장의 원조가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되는 실크 로드의 종착점이기도 한 이 곳은  오랫동안 동서양 문물을 교환하는 장소가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비잔틴 제국 때 지어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1461년에 크게 확장한 이후로 시장의 규모는 날로 커져 갔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입구는 18개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누루오스마니에 게이트와 베야즈트 게이트이다.

누루오스마니에 게이트의 박공 머리에는 의장용 무기와 책,깃발이 새겨져 있고

'카팔르차르싀(그랜드 바자르의 터키식 이름) 1461년' 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그랜드 바자르는 지금까지 12번의 강한 지진과 9번의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재난 때마다 복구되었는데 1894년 지진과 1954년 대화재 이후 가장 크게 복구되었다.

 


이 바자르의 전체 면적은 30 ha(약 93,000 평 정도)의 넓이이며 80개의 시장 거리에

약 3,500개 이상의 상점이 있고 15,000명의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시장 안에는 7개의 분수와 하나의 우물, 그리고 커다란 사원 하나와 12개의 작은 사원이 있고 

학교와 목욕탕도 있었는데 1894년 지진 후 복구에서 철폐되었다. 

 


오스만 제국 때에부터 이 시장은 상업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환전소와 은행 등 각종 경제활동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오스만 시대에는 각종 향료나 섬유,나무 등을 파는 전문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19세기 중반까지 노예 시장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도망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각종 골동품 등 왕실의 보물들을 이 시장에서 팔곤 했다.

 


또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레이스 품목 및 고급 천,침대 커버 등도 이 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랜드 바자르의 메인스트리트에는 즐비한 보석상이 제일 많이 눈에 뜨이는데

이는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특히 금장신구에 돈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도시 여인들은 보석이 박힌 금팔지나 금반지를 선호하며 시골 여인들은 순금으로 된 귀걸이,팔찌를 많이 착용한다.

터키 남자의 부의 척도는 그의 아내가 착용한 금팔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터키인들은 여유 있을 때 금팔찌를 하나씩 사모은다.
 

 
그랜드 바자르의 어느 보석상 앞 거울에서 주인의 양해를 구한 후 귀걸이를 고쳐 끼우고 있을 때

보석상 주인이 "당신이 한 귀걸이가 무슨 보석이냐"고 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이건 이미테이션"이라고 했더니 그 주인은 "왜 이미테이션을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보석상 주인은 필자의 남편이 돈이 없는 아주 불쌍한 남자려니.....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질 좋기로 유명한 터키 카펫의 가장 오래된 카펫 생산지는 콘야인데 13세기에 이미 카펫 제작소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이스탄불 인근에 카펫 공장이 많이 들어서 손으로 짠 수공예 카펫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카펫은 면,양모,실크로 만드는데 양모로 된 카펫을 제일 선호한다.

60년 이상 된 수공예 카펫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제작 연도가 확실치 않을 때에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여야 한다고 한다.

비싸지 않고 대중적인 카펫은 길게 짜 두었다가 손님의 원하는 대로 이렇게 잘라서 팔기도 한다.

관련 포스트 : 눈을 의심케 한 이스탄불 매직 카펫쇼

 


문양의 나라 터키의 접시에는 저마다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터키인들의 대표적 기념품  '나자르 본주(Nazar Boncugu)'는 파란색 바탕으로 된 유리에 까만 눈이 그려진 일종의 부적인데

열쇠 고리,키 홀더,목걸이,팔찌....각가지 형태로 다 있다. 

영어로는 이블 아이(악마의 눈)라고도 하는데 가장 강력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들을 도망가게 하며 타인의 질투나 질시를 빨아들여 주위의 재난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모든 집의 들어가는 입구나 상점의 문 옆에는 어김없이 이것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련포스트 : 밤이 더욱 아름다운 도시 쿠샤다시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터키의 기념품 가게도 본국에 돌아가기전에 돈을 다 쓰고 싶어하는

외국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쓸모 없고 조잡한 물건들이 많다.

바자르나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흥정의 기술을 배워두어야 하는데

터키 상인은 가격을 얘기할 때 가장 높은 가격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깎아 달라고 하면 얼마에 사기를 원하냐고 묻는다.

상인이 제시하는 가장 높은 가격과 소비자가 원하는 가장 낮은 가격의 차이를 줄여나가다가

가장 적정한 선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데 그 가격은 대체로 처음 부른 가격의 반 정도가 되는 편이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요구하는 손님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니 주의할 일이다. 
 


터키인의 대부분은 청결을 소중하게 여겨 닦을 것이 없는 깨끗한 유리창도 닦고 또 닦는다. 
 


바자르 안에는 점포도 많지만 여러가지 편의 시설들도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카페도 군데 군데 있어서 '차이'를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즉시 '차이'를 배달해 준다.

우리나라처럼 쟁반을 들고 오트바이를 탄 아가씨가 오는게 아니고 잘 생긴 총각들이 '차이'를 들고 온다.

왜냐하면 식당이든, 가게이든, 카페이든 터키의 모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이기 때문이다.

대신의 여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간이 찻집에는 물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곳곳이 간이 음식점도......
 


쇼핑하다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의자들도 군데 군데 마련되어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환전소도 군데 군데 있는데 카드도 받는다.

그러나 집집마다 카드 단말기가 없는 경우가 많아 카드를 들고 점원의 뒤를 따라 골목 사이로 들어가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도 카드를 든 점원이 하도 빨리 걸어서 앞으로 가는 바람에 골목에서 사람을 놓쳐 어리둥절했던 경험이 떠오른다.
 

 
 이 시장에서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흥정인데 터키의 상인들의 상술은 아주 특별하다.

그들은 터키식 차(차이) 한 잔으로 장사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거래는 차로 시작하여 차로 끝나게 된다.

 손님이 가게 에 들어오면 일단 차이부터 권하고 거래가 이루어지면 또 한번 차이를 권하는 것이다.

들어와서 차이 한잔 하고 가라는 말로 손님을 부르는데

차이를 얻어 마시고 물건을 사지 않고 나온다고 해서 욕 얻어먹을까...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기는 이스탄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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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누구에게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단 하나, 바로 '아야 소피아 (터키어,Ayasofya)',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Αγία Σοφία)'라고 불리우는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중 최대의 걸작으로 AD537년에 완공되었다.
교회가 건축된 이후로 제국의 멸망까지 새로운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야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축물도 건축되지 못했으므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오르기도 했다.

  

 

이 건물은 537년에 건설되어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 동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친 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던 시절에 회칠하여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35년에 교회도,이슬람 사원도 아닌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아야 소피아를 방문하기 위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쓰인 입구로 들어선다.

3개의 돔이 예배당인 아야 소피아는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첫번째 건축물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섯개의 돔 건축중의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의 구조를 보면 중앙 돔 정점까지의 높이는 56.6m 이니 무려 1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다. 

건물의 전체 길이는 100m이고 내부 공간의 크기는 75m X 70m로 내부 넓이는 7,570 평방미터(2,300평)에 이른다. 

 

 

 외랑 벽에는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알려주는 설명 판넬이 여러개 붙어 있다.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사실 이 자리에 세워진 세번째 건물인데 AD 360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이
메갈로 에클레시아(거대한 교회)라는 목조 건물을 세웠지만 404년에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416년에 다시 지어진 교회는 532년에 니카 혁명 기간 동안 반란군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두번째 교회의 토대와 계단,부서진 박공 부분은 현 '아야 소피아'입구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외랑의 한 부분에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작품들과 걸개,소형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랑을 거쳐 내랑으로 들어서면 길이가 60m, 넓이가 11m인 내랑의 천정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벽들은 모두 대리석과 아름다운 돌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가 있는데 9개의 문 중 맨 끝의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이 드나드는 문이다.
 한가운데의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고 황제의 문 보다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관직자,사제,대신들이 사용하였다.
황제의 문에 붙어 있던 금판과 대신의 문에 붙어 있던 은판은 라틴군에 의해 도난당했다.  


 

 황제의 문 위 박공 머리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 보좌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고
양 원 안에는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엄청나게 거대한 돔이다.
동서로 31m, 남북으로 33m인 중앙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는데 이 창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 준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으므로 대리석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었단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4개의 창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10세기경에 보수할 때 파손되어 채광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대리석 판을 얇게 잘랐으면 돌판을 통하여 빛이 비칠까...

 돔의 한가운데는 원래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 이 그림은 코란의 문구로 덮이게 되었다. 

 

 

본당의 후진의 반원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다.
이층의 왼쪽 끝에 가면 더 잘 보이는 이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는 그림 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고
 옆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도 있다.

 

 

 돔 옆 네 코너에는 3개의 날개가 달린 체루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천사의 얼굴은 각각 사자,황소,독수리 ,그리고 천사의 모습이었으나
역시 오스만 제국 이후 다각형의 별 모양으로 덮여 버렸다.

 

 
중앙 안 쪽 부분에는 금색으로 장식된 '미흐랍(Mihrab)'이 있다.
미흐랍이란 '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을 말한다.
이슬람 교도들이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할 때 엎드리는 방향을 표시하는 것인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에 이곳에 미흐랍이 설치되었다.

 

 

미흐랍의 오른편에는 이슬람 예배의 설교단이 있는데 이슬람의 설교자인'이맘'이 금요일에 설교했던 곳이며
미흐랍의 왼쪽에는 1849년에 만든 오스만 술탄의 화려한 옥좌가 있다.

 

 

벽과 코너에는 8개의 거대한 원판이 걸려 있는데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미흐랍의 오른쪽의 판은 알라, 왼쪽에는 무하메드,
그리고 나머지 판들에는 이슬람 초기 칼리프(종교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직경 7.5m의 이 둥근 판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훌륭한 달필이라고 하는데
아라비아 문자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는 글씨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야 소피아를 짓기 위해 5년간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와 소아시아의 대리석 석광에서 가져 왔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와 수학자가 함께 설계해서 세운 이 건물은 가장 자리로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본당에는 40개,위층 갤러리에는 67개가 있고  돔 형식으로 된 이 건물의 한 가운데에는 전혀 기둥이 없다.

 

 

이 기둥들은 에페스의 항구 체육관,레바논의 아폴로 신전 등에서 가져 온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해서 로도스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었다.
기둥과 벽의 대리석의 문양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자연스럽다.

 

 
하트 모양이 너무나 귀여운 기둥 앞에서 아야 소피아 경비원의 모습을 사진에 같이 담아 보았다.
눈웃음치기를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이지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엔 좀 근엄한 자세를 보인다.
그래야 더 공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그렇지만 이 직원의 굳게 다문 입에도 미소가 서려 있는걸 볼 수 있다.

 

 

 아야 소피아 안에는 이렇듯 고양이가 제 세상인양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슬람 국가는 거의 고양이 천국이랄 수 있는데 무슬림들의 고양이 사랑은 이슬람 예언자 무하메드가
자신의 옷자락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옷자락을 잘랐다는 얘기에서 기인한다.
반면 개는 아주 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라서 그런 것일 듯....

 

 

 '눈물 기둥, 혹은 땀흘리는 기둥(Weeping Column)'라는 기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기둥의 물에 닿는 것만으로 병이 나으며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기둥인데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기 때문에
현재는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판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 엄지를 넣고는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 돌릴 수 있으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너도 나도 엄지를 넣고 돌려 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바퀴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입구의 오른 쪽과 왼쪽에 놓여 있는 1,250 리터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는 16세기에 페르가몬의 고대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거에는 문 밖에 놓여 있어서 이슬람 교도들이 물로 몸을 청결케 하는데 사용했다는데
발굴 당시 이 엄청나게 큰 항아리 안에 보물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2층 갤러리는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되던 곳이다.
갤러리란 건축물에서 벽을 따라 그 길이만큼 만든 좁은 발코니,또는 플랫폼을 말하는데
화랑(畵廊)을 뜻하는 '아트 갤러리'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갤러리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니고 비탈길인데 그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에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갤러리의 한쪽 부분은 그야말로 '화랑'으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현대 타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갤러리에서 아래 층을 내려다 보니 사람이 자그마하게 보이는게 아찔하기 보이며 높이가 실감이 난다.

 

 

 갤러리 오른쪽의 입구에 있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면 비잔틴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디시스(Deesis)'불리는 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인데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표정은 선명하고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다.

 모자이크를 보면 아랫부분이 회칠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3일간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허용되었지만
아야 소피아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메흐메드 2세는 이 건물을 파괴치 말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건물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교회는 이슬람 사원이 되었고 모자이크로 된 아름다운 기독교 성화들은 회칠로 뒤덮여졌다.
그리고 아야 소피아 건물 바깥에 네개의 미나레트(이슬람 첨탑)도 그 때 세워지게 된다.
1930년대 미국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성화 복원 작업으로 회칠로 뒤덮인 성화들은 이제 하나하나 옛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오른쪽 복도 안쪽 벽에 있는 모자이크는 요하네스 콤네소스 2세와 이레네 황후가
아들인 알렉시우스와 함께 (알렉시우스는 꺾어진 벽쪽에 있어서 사진에 담아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께 헌금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왼쪽에 있는 모자이크는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여제(女帝) 조에와 그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제 조에는 세번 결혼했는데 처음 이 모자이크에는 그의 첫남편인 로마노스 3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결혼할 때마다 모자이크에서 남편의 얼굴과 머리 위에 쓰인 문구를 바꾸었다.
72세로 죽은 조에의 얼굴만이 젊은 시절 얼굴 모습 그대로이다.

 

 

갤러리에서 내려와 출구인 남쪽 입구문으로 나가는 통로의 벽과 천정의 타일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아야 소피아의 내부를 다 관람한 후 나오는 마지막 남쪽 출구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예수께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 소피아를 손에 들고 예수께 봉헌하고 있어 시선을 끈다.

아야 소피아에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바라본 아야 소피아는 석양 무렵의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데
때마침 정원에 서 있던 검은 차도르의 두 여인과 함께 어울려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그 시대에 어쩌면 저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건축 기술로도 따라잡기 힘든 노하우가 자리잡고 있었을 듯 하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던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1500년 이상 한 자리에 서서 이스탄불의 흥망 성쇠를 바라본 건축물....
 아야 소피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역사의 흐름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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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장식된 푸른 유리창과 아름다운 타일로 인해서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 불리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sultanahmet camii,술탄아흐메드 자미)'은 터키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히포드롬의 동쪽에 있는 이 사원은 성 소피아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있어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게 되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원래 이 자리는 비잔틴 제국의 궁전이 있던 자리인데 궁전은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다 파괴되었고 이 후 술탄 아흐메드 1세 황제는 성 소피아 사원을 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성과를 능가하려는 야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이 사원을 1609년에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하게 된다.

 

 

14세에 술탄의 자리에 오른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이 사원이 완공된지 1년만인 27세에 위장병으로 사망하였으니 권력과 부귀 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블루 모스크는 이스탄불과 터키 전역에서 6개의 미나레(첨탑)가 있는 유일한 사원이다. 술탄 아흐메드 1세는 건축가 메흐메드 아아에게 첨탑을 황금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금'의 터키어 발음은 숫자 '6'과 비슷하기 때문에 건축가는 이 점을 잘못 이해했고 그래서 금 대신에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6개의 미나레가 있는 사원을 지었다고 전한다. 

 

 

미나레에는 발코니가 2,3개씩 붙어 있어서 블루 모스크에는 총 16개의 발코니가 있다.
 

 

 

이 건물은 회교 신학교, 병원, 아라스타 바자르, 왕릉, 대상들의 숙소, 학교, 그리고 대중 우물이 사원과 함께 있는 사원 복합 건물이다. 사원 복합 건물을 짓기 위하여 비잔틴 왕궁,히포드럼(전차 경기장)의 관중석, 그리고 많은 귀족의 궁전들이 파괴되었는데 이 곳이 사원 자리로 선택된 것은 토프카프 궁전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의 부속 건물중의 하나인 아라스타 바자르(시장)는 사원의 축대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바자르이다.

 

 

사원의 부속 건물인 카페나 레스토랑의 임대료는 사원의 운영 자금으로 충당된다. 


 

외부에서 바깥 정원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 다섯개가 있는데 가장 중앙문에는 체인이 걸려 있다. 체인이 걸려 있는 이유는 말을 타고 사원에 들어오는 술탄이 다른 사람들처럼 경건하게 말에서 내려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계단을 올라와서 내부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3개가 있는데 내부 정원의 규모는 72 X 64m로 사원 본당의 규모와 거의 맞먹는다. 중앙에는 육각형 세정용 분수가 있는데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서 손발을 닦는 의식을 가지는 곳이나 지금은 그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이슬람 신도들은 남쪽과 북쪽 벽면에 있는 수도 시설에서 예배를 보기 전에 손발을 닦는다.
 

 
본당 입구에는 경찰과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고 이슬람 사원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하므로 비닐 봉지가 많이 구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입문은 나무문이나 철문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장막으로 둘둘 말아서 가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입구의 높이를 낮게 해 둔 것은 역시 어느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일 듯.....

 

 

사원의 본당의 규모는 51m X 53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실내는 의자가 없고 모두 카페트로 되어 있는데 이 이미지는 빌려온 사진이라 필자가 방문했을 때의 카페트와는 다르다. 그리고 양 옆에 나무 벤치처럼 생긴 것들은 신발을 놓는 곳인데 밖의 신발장이 꽉 찼을 때 사용된다.  본당 안에는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오일 램프가 까마득한 천정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게 눈길을 끄는데 엄청나게 화려하고 거대한 이 크리스탈 오일 램프는 오래 전에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이슬람 사원에는 메카의 방향으로 '미흐랍'(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 )이 있는데 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오른쪽 뒷편으로 미흐랍이 보인다. 

 

 

이 사원을 '블루 모스크'라고 서양인들이 부르는 이유는 사원 내부의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과 그림의 색들이 거의 푸른 색과 녹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사원의 내부 장식에 사용된 21,043개의 푸른 타일은 이즈닉 타일(이즈미르에서 생산한 타일)이다.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아치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은 타일과 내부 장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사원에는 전체 260개의 창문이 있는데 처음 지을 때 사용되었던 베네치안 유리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고 지금 있는 것들은 모조품이다.  중앙의 돔과 동서로 난 반원형 지붕,그리고 벽과 기둥에 쓰여진 글씨는 모두 이름난 서예가의 작품이며 내용은 코란의 인용문이다. 

 

 

바닥에 깐 카페트는 유명한 실크 카펫 제조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슬람 사회에서는 모든 기도회가 카펫이 깔린 바닥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터키의 카펫의 제조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바닥에 깔린 카펫을 자세히 보면 일일이 구획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구획은 바로 한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이슬람 예배의 모습을 보면 엎드려 메카의 방향으로 절을 할 때에 줄이 매우 질서 정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질서정연한 줄의 비결은 바로 이 카펫에 있는 것이다.  

   

사원 안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였는데 관광객이 버글버글하는 시끄러운 실내에서도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코란 삼매경에 빠진 사람.....  

 

 

소지품은 내팽겨쳐 놓고 한 쪽 구석에서 누워 잠자는 사람.....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등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고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들은 사원에 준비되어 있는 히잡으로 머리에 쓰거나 어깨를 가려야 한다. 이슬람 사원은 입장료는 없지만 출구에 준비된 헌금 상자에 돈을 넣으면 되는데 이슬람 교도나 이방인이나 돈을 넣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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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제국의 수도, 유럽과 아시아의 가교...이 명칭이 모두 가능한 곳은 세계에서 단 하나.....바로 이스탄불이다.


이곳은 단순히 이스탄불로만 부르기에는 성이 안 찰 정도로 '감동이 밀려오는 도시'이다.
터키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이희철 박사에 따르면이스탄불은 "아! 이스탄불..." 이란 감탄사로 로 불러야 느낌이 차 오는 그런 도시라고 한다.  

 역사 시간에 우리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던 동로마 제국이 AD 330년부터 AD 145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번창했고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도 AD 1453년 부터 AD192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니1600년간 세계를 주름잡은 대제국의 수도를 지낸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골든 혼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 이미지 출처: http://www.reisenett.no

            이스탄불 2,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단 몇 줄로 줄여서 설명해 보면.... 이스탄불의 가장 오래 된 이름은 '라고스'였다.현재의 사라이부르누에 세워진 라고스라는 도시는 BC 660년  '비잔티움'이 이 도시에 세워질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비잔티움이란 명칭은 그 지역에 새롭게 거주한 그리스인 메가라 족의 족장 '비자스'의 이름을 딴 것인데이 명칭은 로마 시대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까지 계속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헤레나 여제, 이미지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

 AD 324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상업,교통,방어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비잔티움에 도시 재건을 시작하여6년 만인 AD 330년에 완공하고 이름을 '노바 로마'로 하였으니 바로 '새 로마'라는 뜻이다.그리하여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바뀌게 된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그린 그림, 이미지 출처 :http://www.constantinople.org.uk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제국 내부의 경제 파탄 및 부패로 인해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두 아들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정치,경제적으로 강해지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비해상대적으로 약해져 있던 서로마는 AD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되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던 동로마 제국에 의해 이어져 나가게 된다.

  성 소피아 성당(하기야 소피아)              

               로마 제국의 상속자이자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은 황제의 강력한 지배와 군사적 통치권을 강화하게 되는데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AD)때에는 국력을 확장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는등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스탄불 시내를 둘러싼 비잔틴 시대 성벽 

       이로써 비잔티움 천도 AD 330년부터 AD1453년 수도 함락까지  1123년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이미지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에 제동을 건 것은 11세기말 튀르크계인 셀주크 제국이었으니셀주크의 침공과  십자군 원정에 의해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비잔틴 제국은 점점 약소국으로 전락하다셀주크 투르크족이 건설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매드 2세의 침공으로 인해 AD 1453년 비잔틴 제국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 당하게 된다. 

  전성기 오스만 터키의 영토, 이미지 출처 :http://www.bahaullah.org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칭하는데 이후 16세기 쉴레이만 1세 황제 때에 동서 정벌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최대의 영토를 가지게 된다.또한 메카의 정복과 함께 마호메트의 자손들에게 내려오던 '칼리프'라는 칭호를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이어받게 되니 오스만 제국은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1912년의 이스탄불,   이미지 출처 :http://www.dimitris.gr

  건국 초부터 쉴레이만 황제 때까지 오로지 영토 확장에만 주력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하여 최대 전성기와 함께 점점 쇠퇴가 오기 시작하는데17세기 후반 빈공격 당시 곤경에 봉착한 것을 계기로 수 차례에 걸친 패전을 겪은 뒤 인해 제도를 서구화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다.

 이스탄불 전경, 이미지 출처 : http://www.firstworldwar.com

20세기 초 열강들의 영토 점령으로 인해 패색이 짙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독일이 패전하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될 형편에 놓이게 되고400년 이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그리스조차 아나톨리아(터키 중부의 땅)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선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이미지 출처 :http://lh4.ggpht.com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부(터키어로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여 열강에 의한 영토 점령에 반대하고 민족적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데 1921년 아나톨리아로 공격해온 그리스 군대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대패시키니 다른 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철수하게 된다.1923년 로잔평화조약에 따라 공식 국가 승인을 받아 1923년 정식으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니이스탄불은 제국의 수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륙에 있는 앙카라로 넘기게 된다.  

   이스탄불의 위스크다라 지역 (가이드북 스캔 이미지)


그러나 아직도 터키의 경제, 문화, 관광의 중심지는 이스탄불이라고 할 수 있으니 
터키 여행에서 이스탄불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앙꼬없는 진빵'이 되고 마는 격이다.

 동서양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rmation-turkey.net


딱딱한 역사를 읽어 내려가는데는 언제나 지루함이 따른다.
하지만 2,700년 내려온 이스탄불의 역사를 위와 같이 단 몇 줄로 간단히 기술하여 보았으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인 이스탄불을 이해하는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자~그럼.....무한감동이 밀려오는 도시 이스탄불로 떠나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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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작은 도시 셀추크(Selcuk)는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유적지 에베소(에페스,Efes)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에베소 도시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127개의 기둥이 있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졌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고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 등 기독교 유적들도 남아 있는 곳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너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를 찾아가 본다. 

 

그리스 밧모섬 사도요한기념수도원의 요한&nbsp;모자이크화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 주셨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옆에 있던 요한에게 자기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으므로 그 때부터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고 마리아의 말년까지 보살폈다.(요한복음19:26-27)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 당시부터 네르바 황제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는데 교회 사학자 유세비우스(Eusibios)에 의하면 AD 37년~42년 사이에 있었던 헤롯 아그리파의 박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에 요한도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에베소로 왔다고 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황제의 독약과 뜨거운 기름통에 던져지는 심한 박해 속에서 살아났으며 밧모섬의 극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내며 요한 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의 향년 95세였다.


사도 요한의 유해는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는데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축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황제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로 증측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퇴락하였고 일부 유적만 복구된 상태에 있는데 이곳에서 개종하고 회개한 유대인과 이방인에세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소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리석 바닥의 십자형 구멍에 물을 끌어들여 세례를 주던 이곳은 초대 기독교 이래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져왔다. 

 

 

사도 요한 교회는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에는 자미(이슬람 사원)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무너져 쌓여 있는 돌덩어리에는 그 당시 새겨진 묘한 낙서들도 간혹 눈에 뜨인다.
우리 나라의 고누와 같은 놀이판이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확실한 것은 그 당시 사람만이 알 일이다.

 

 

사도 요한 교회의 유적 뒤로는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자리잡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방문할 수가 없다.

 

 

사도 요한 교회는 너무나 퇴락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고 축소 모형에서 원래의 웅장했던 규모와 아름다움이 짐작될 뿐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도 요한 교회 언덕 위에 서니 아래로는 마을의 한적한 전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마을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기둥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이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인 크로이소스가 BC 550년경에 지은 이 거대한 신전은 어마어마한 크기(약 55×110m)로 인해 고대 7대 불가사의에 올랐는데 높이 19m에 지름이 1.2m나 되는 무게 24톤의 기둥이 127개나 있었다고 하고 신전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이 즐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거대한 신전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원했던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미치광이가 BC 356년 불을 질러 소실되었는데 그후 재건되고 다시 지진등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구되기를 7번, 결국은 더 이상 복구되지 않고 무너져 내린 기둥들은 교회나 궁궐 등을 짓는데 실려나가서 오늘날은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형편이다. 
한 때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랭크되었던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든 현장을 그 당시 사람들은 예측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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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부의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다소(Tarsus)는 사도 바울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 다소에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으니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문은 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역사적인 장소.






BC 41년 면세 헤택을 베풀기 위해 타르수스(다소)를 내방중이었던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암살된 후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 카시우스 를 도와준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로 향하는데
키드누스 강에서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게 된다.

                                                                                                    
그 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온통 꽃들이 깔려있고 금접시와 보석 박힌 금술잔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치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29살의 클레오파트라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금빛 차양 안에 비스듬이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화려한 파티에는 많은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지금까지 파티에 쓴 비용은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 혼자 '10,000 세스텔치아'를 써보죠...."
그러더니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온 몸에 값비싼 보석을 많이 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양 쪽 귀에 늘어뜨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가장 눈에 뜨였다.식초잔을 받아 든 클레오파트라는 한 쪽 귀걸이를 떼내어 식초잔에 담구어 버리는데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식초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 버리고 만다.



진주가 다 녹자 클레오파트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져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쓴 책 '박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시저를 사로잡아 이집트를 지켰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도 지혜와 미모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BC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키프로스,시리아,리비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 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고 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져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 BC31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간의 전쟁인 '악티움 해전'에서 참패하게 되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자기의 가슴을 물게 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후세의 혹평가들은 이 문을 일러 '암캐의 문'이라고도 한다고.....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






문이 서있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지금은 강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가 버려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다 지켜본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오늘날 그 일부만 남아 다소의 거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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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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