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有天堂下有蘇杭)' 라는 말로 항주를 묘사한다.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한 항주.

중국 북부 지역에 비해 상해, 소주, 항주를 비롯한
중국 남부 지역은 날씨가 온화하여 사람이 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윤택하여 도로 주변의 농가들도 하나같이 규모가 크고 번듯하다.
거기다 항주의 자랑인 서호 주변에는 부호들의 별장과
리조트, 골프장과 공원,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너무나 여유롭고 부유한 도시 풍경에 여기가 과연 중국인가...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중국 내에는 '서호'라고 불리우는 호수가 약 800 여개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항주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호수  '서호(西湖)'는 도시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항주에 서호가 없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다.' 할 정도로 서호의 아름다움이 주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서호는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리운다.
춘추 전국 말기 월나라 여인인 서시는 어느 날 강변에 서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니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에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오왕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은 보복을 위해 당대 최고의 미인 서시에게 예능을 가르쳐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쳤는데 
부차는 구천의 계략대로 서시의 미모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월나라에게 패망하고 만다.
서시는 중국 역사상 양귀비,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으로 손꼽힌다.


서호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선착장에서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둘레 15km, 면적이 6.3㎢ 에 이르는 방대한 호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수로 인한 토사가 점차 쌓이면서  완전한 호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호수는 백제,소제라는 두개의 제방에 의해 외호, 악호, 서리호, 남호, 북리호의 5개의 호수로 나뉘는데
 백제는 당나라때 지사로 부임한 시인 백거이가 축조했으며, 소제는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축조했다고 한다.


서호의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는 소제춘효, 단교잔설, 뇌봉석조....등 '서호 10경'이 있는데 


서호 10경은 비단 장소의 아름다움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과 하루의 특정 시기, 주변의 풍치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를 말하므로  
서호에서 살지 않는 이상 그 진수를 제대로 맛보기란 어렵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서호를 돌아보는 방법 외에 '뇌봉탑'에서 서호를 조망하는 방법도 있다.

뇌봉탑은 북송 때인 975년 오월(吳越)의 왕 전홍숙이 사랑하는 황비 황씨가 아들을 낳은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여
황비탑이라 불렀으며 건립 당시 성의 서관 밖에 있다 하여 서관전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탑은 서호의 10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뇌봉석조(雷峰夕照)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는 석양 무렵 호수 맞은편에서 바라본 뇌봉탑의 신비로운 경관을 이름이다. 
뇌봉탑에는 백사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는 유명한 경극의 희곡인 '백사전(白蛇傳)'의 토대가 되었다.


원래 뇌봉탑은 벽돌과 목재를 병용한 전목탑으로서 탑신은 벽돌로 축조하였고, 탑 처마와 평좌, 회랑과 난간 등은 목조였다.
 이후 명나라 가정제 때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탑신만 남게 되는데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거나 도굴을 목적으로 탑을 훼손하여 1924년 9월에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이후 80 년 가까이 유적지로만 남아 있다가 2002년 10월에 이르러 완전히 복원하였는데 
전체 높이가 71.67m인 새 뇌봉탑은 기초 부위를 보존하고 8각형과 5층으로 원탑의 형태를 재현하기는 하였으나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탑체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는 등
엄밀한 의미에서 복원이라고 하기 어렵고 다만 1
층에 원탑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적 의미는 깊은 곳이나 완전히 신식탑이라고 할 수 있는 뇌봉탑에 비싼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뇌봉탑 제일 위 전망대에서는 근처에 위치한 공원과 리조트, 식당가들이 한눈에 보이고
서호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과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도 손에 잡을 듯 조망할 수 있다.


소동파는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다 아름답다 했고 위원은 비 오는 날도 좋지만 눈 오는 날이 더 좋다고 했다.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의 서호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만
맑고 화창한 겨울 한낮에 뇌봉탑에 올라 서호를 바라보아도 이 또한 좋은 것을....
심호흡 한번 하고 잠시 서시가 되어 춘추전국시대로 시간 이동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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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주 북서쪽에 있는 '호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이곳은 춘추시대 오왕 '합려'가 행궁을 지었고
합려가 죽은 뒤에 그 아들 '부차'가 아버지를 묻은 곳.

그런데 기이하게도 장례를 치른 삼일 뒤에
흰 호랑이가 무덤 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호구(虎丘)'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무덤이기 보다는 작은 언덕 같이 보이는

높이40m의 호구의 정상에는 소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호구탑이 서 있다. 

20ha나 되는 광대한 호구의 묘역을 돌계단을 통해 오르면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물인 감감천이 나오고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차 내리쳤더니 돌이 무우 베듯 갈라졌고
보검은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전무결하였다는 '시검석(試劒石)'을 지나
 '천인석(千人石)'이라는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는 합려의 무덤이 완성되고 그 아래 명검과 보물들을 숨겨두고는
 그 비밀을 지키기위해 공사에 참여한 인부 1천명을 이곳에서 죽였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하고 
 양대(梁代)에 유명한 고승인 '도생'이 이곳에서 설법을 하자 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전설도 있는 바위이다. 

천인석 앞 절벽 사이에도 샘이 솟아나 사철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는데
오왕 합려를 장사 지낼 때에 이 곳에 훗날 명검으로 전해지는 검들이 포함된 
보검 삼천 자루를 매장했다고 하는 사실을 안 월왕 구천과 진시황, 손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보물을 찾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중에도 진시황은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지시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다.
 지금은 이 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검지(劍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검지의 벽면에는 크고 작은 글씨들이 쓰여져 있었는데 그 중에
'풍학운천(風壑雲泉)'이라고 쓴 큰 글씨는 송나라의 유명한 서법가인 '미불'의 필체라고 한다.  

 그 중에도  '호구검지(虎丘劒池)'라고 커다랗게 쓴 붉은 글씨가 제일 눈에 띄는데 

  '호구검지'의 네 글자 중에 '검지(劍池)'라는 두 글자는 안진경의 필적이고 앞의 '호구(虎丘)' 두 글자는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가호구(假虎丘) 진검지(眞劍池)'라는 말이 전한다고 한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한 사람의 필체 같이 보인다. 

 검지를 지나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쌍정교(雙井橋)를 지난다. 

 계곡 위 높이 솟은 다리 가운데 구멍을 통해 저 아래에 흐르는 물을 보니 저절로 다리가 오그라든다. 

 소주에는 '호구'가 제일 높은 산이다.
산의 높이는 해발 40m, 이쯤이면 산이라 하기보단 언덕이라고 해야겠지만
평평한 지대인 소주에선 제일 높은 산일 뿐 아니라 그 위에 47.5m의 탑이 서 있으니
호구탑은 그야말로 소주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팔각형 모양의 7층 호구탑은 북송 건륭 2년(961년)에 완공되어 수 차례의 전란과 더불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는데
현재 우리가 보는 호구탑은 대부분 청 말기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호구탑은 몇 차례의 보수 공사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으로 약 2.48도 기울어져 있어서 '동양의 피사탑'이라고도 불린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호구탑 밑에 합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
무덤이 탑을 지탱하기 힘들어 지반 침하가 일어나면서 탑이 기울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15층 아파트와 거의 맞먹는 높이이니 탑 바로 아래서 보면 목이 아플 정도이고
뒤로 물러가서 찍어도 탑의 전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었다.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소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안전 문제로 인해 호구탑 내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어 아쉬운 점이었다. 

 소주의 상징과도 같은 호구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꽃축제와 단풍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구를 가고자 한다면 봄이나 가을에 방문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호구의 주위는 숲과 운하가 매우 아름답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데이트 장소로도 좋다.
이렇게 가마를 타고 황후가 된듯한 호사를 누리는 것도 꼭 해보아야 할 일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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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멀지 않은 도시 소주(蘇州,쑤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도시이다. 

 

 인구 약 600만의 이 도시는 역사적인 도시로 일찌기 춘추전국 시대엔 오(吳)나라의 수도였다.
소주는 저지대에 위치한데다 연간 강수량이 2300mm나 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고장이기 때문에
수해에 매우 취약한 도시여서 옛날 부터 수해 예방을 위하여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소주 근교에는 양자강도 있고 크기가 서울의 4배나 되는 거대한 태호가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양자강으로 물을 빼고 비가 오지 않으면 태호에서 물을 끌어들여서 치수를 한다.

 

 소주의 상징인 대운하는 수나라 때 개통되었는데 강남미(江南米)의 수송지로 활기를 띠면서
항주(杭州,항저우)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상하이가 개항되기 전까지는 수운을 이용한 외국 무역도 활발하였고
'비단의 고장'으로 알려진 도시답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물론 자수와 공예품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또 소주는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르는데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히는 창랑정,사자림,졸정원,유원 외에 한산사 등 명승고적이 많아서 
당나라때에는 많은 시인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도 했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또는 '동양의 베니스'로 불린다.  

 도시 전체를 외곽에서 사각형으로 운하가 감싸고 있고 도시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운하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물의 도시,동양의 베니스에 와서 꼭 해 볼 일은 배를 타고 운하를 돌아보는 일이다. 

 각가지 모양의 유람선이 운하를 돌아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노란색, 자주색....용 문양....선주의 취향에 따라 유람선의 색깔과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근엄한 선장님이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한 15명 정도 앉으면 꽉 차는 조금만 유람선엔
고물상에서 주워온 듯한 각가지 모양의 의자들이 놓여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니 양안의 집들이 눈에 하나 둘 들어온다. 

 

 이름하여 '동양의 베니스'지만 베니스를 떠올리며 비교하면 실망이 크실 것이다.
날이 흐려서 하늘과 물빛이 매우 탁할 뿐 아니라 배 위에서 찍은 사진이라 사진이 흔들린 점도 감안하시길 바라며.... 

 

 

 소주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 흐르는 운하와 이어져 있다.  

 

 백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마을의 낮은 주택가 밑으로 운하가 흐르고 있고  

 

 많은 배와 화물들, 양쪽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운하는 늘상 북적거린다. 

 마을의 배치는 집앞으로 나서면 차를 타고 집뒤로 나서면 배를 타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집 뒤로 나서서 배 위로 오르기 편하도록 벽에 돌들이 돌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하의 폭은 넓어지기도 하고.... 

 

 무지개 다리 아래를 통하여 교차로처럼 다른 운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큰 배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듯이 보이는 넓은 운하...물이 불어나면 집들이 잠기지나 않늘까...걱정이 들기도 한다. 

 

운하를 따라 내려가며 보이는 소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다.

엄마에게 야단 맞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아이... 

 길 가다 내려와서는 구두에 묻은 흙을 운하물에 씻는 아줌마... 

 운하 옆에서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집 안의 허드렛물로 쓰려는 듯 두레박으로 운하의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간판이 이렇게 운하 쪽으로 걸려 있기도 하고... 

 미용실인 듯한 이 집의 상호는 '한류미학(韓流美學)'이다.
한류가 소주의 미용실 상호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꽃은 다 죽었는지 화분만 조롱조롱 걸려 있는 집... 

 집집마다 화분이 많은데 물 주기도 참 쉬울 거 같다...^^  

 노란 장갑, 빨간 장갑, 대걸레며 속옷 빨래....옹색한 가재 도구들이 다 보여도 신경쓰지 않는 대범함. 

 전통 문양의 창이 있는 벽에 눈길이 가고.. 

 유흥가인 듯 이렇게 홍등이 걸린 번듯한 집들도 있다. 

 우리나라 기와집과는 달리 이렇게 이층집들이 많이 보인다.

 소주의 구시가지의 모든 집들은 이렇게 하얀 회벽에 검은 기와집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새롭게 증축하는 집도 벽은 하얀 회벽으로 지붕은 검은 기와로 통일한다. 

 

 

 집집마다 구멍 뚫린 담의 모양새도 비슷하다.  

 가다보면 오래 되어 무너지지나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이는 집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

 

 낡고 오래된 집들을 재개발의 명목하에 허문 후에 새 건물로 짓지 않고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부수고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을 터인데.... 

 같은 배를 탄 한국인 관광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낡고 더러운 데를 뭐 볼거 있다고 비싼 돈 주고 유람선을 타라고 했나....돈이 아깝다..." 

 낡고 더럽다고 허물어 버리고 다 새집으로 지었더라면 깨끗하고 새롭게 지어진 소주의 새집들을 보러 이곳까지 올 사람은 없겠지...

 그것은 마치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경주에서 불국사,첨성대,대능원을 보고 나면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낡은 기와...낡은 벽.... 

 어수선하고 초라한 가재 도구....꾀죄죄한 빨래....그리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 가는 이들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전통 문화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해 나가는 소주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고 

 소주 사람들의 어제 오늘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운하 주변의 집들이 
 내게는 대부호의 멋진 정원인 졸정원이나 유원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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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소주에 이르니 
 잔뜩 흐려 있던 무거운 하늘이 끝내는 비로 변해서
처음 이 도시를 방문한 여행자를 반겨 준다.
 


 

 

 소주는 인구 약 574만 명(1997)의 도시로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고
옛 관료, 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특히 구시가지는 하얀 회벽과 검은 기와 지붕의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다.  

 



 

신축 중인 연립 주택들도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가운데 도시의 미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건립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했고
시가지 한가운데 유명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가는

우리 경주의 현실과 상당한 비교가 되어 잠시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소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졸정원(拙政园)은

소주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졸정원은 북경의 이화원과 승덕의 피서산장, 소주의 유원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으로 꼽히는 곳인데  

 중국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로 평가받아왔다. 

 이 정원은 원래 당나라의 시인 육귀몽의 집이었던 것을
어사였던 왕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할때 개축한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난 왕헌신은 원나라 때 다홍사라는 절이었던 이곳을 인수하여 개인 정원으로 바꾸었다.  

 이곳을 개조할 때, 문정명이라는 명대의 유명한 예술가가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왕헌신은 몇년 후 다시 이곳을 팔게 되는데,
그는 비단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비단장수 왕서방의 원조가 되었다. 

 

졸정원(拙政园)이란 이름은 진나라의 반악이 쓴 글가운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가꾸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위정이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영어로 졸정원

을 'Humble Administrator's Garden(미천한 행정가의 정원)'이라고 번역 하기도 한단다.  

 명대 후기의 건축물인 졸정원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 방치되었다가
 다시 한번 개축을 거치고  건륭제 때는 서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초기의 흔적보다는 후기의 양식이 훨씬 더 두드러진 오늘날의 졸정원은  

 1997년  '쑤저우 고전 원림' 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졸정원 내부는 동원, 중원, 서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핵심은 중원에 집중되어 있다.

 

 중원에는 원향당, 향주, 독특한 모양의 견산루와 파산랑, 비파, 해당, 파초가 빽빽히 들어선 비파원 등이 건축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축물은 창살 무늬가 모두 다를 정도로 섬세하며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반영하였다.  

 면적 약 5만 평방 미터의 너른 졸정원의 3/5 정도는 연못이 차지하고 있어서 

 연못 주변으로 누각과 정자 등이 여기저기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졸정원의 포인트인데 
비가 간간이 뿌리는 가운데 돌아보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못의 반영이 제대로 안 나타난 점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이 정원은 후손이 하룻밤에 마작으로 날려버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 당시에도 발지압이 성행했던 듯...정원의 앞 마당은 크고 작은 조약돌로 장식되어 있어서
차가운 겨울비가 아니었더라면 맨발로 디디며 여행에 지친 발의 피로를 달래었으리라...  

 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을 감하게 한 흐린 하늘과 잿빛 연못이 못내 아쉬워
1달러 짜리 핑크빛 우산으로 인공적인 화사함을 살포시 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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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이었던가? 포항 오거리에서 두호동 쪽으로 가려고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택시 기사 옆에 앉아 앞만 물끄러미 보며 가고 있는데 택시 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저.....손님,혹시..... 과메기를 드셔 보셨나요?"
느닷없이 웬 과메기.....?
난 좀 황당했지만 "아니요? 아직 못 먹어봤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보통 포항에서 일하는 택시 기사라면 "아지매~  과메기 함 무거 봤능교?" 이렇게 투박스럽게 말하는게 보통인데
30대 초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이 기사는 아주 정중한 말투로 예
의를 깎듯이 지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과메기를 잡수어 보지 못하셨다면 이번 기회에 꼭 한번 들어 보시죠.....아주 새로운 경험이 될겁니다.."

기억에 남았던 그 택시 기사의 정중한 권유 때문이었을까...?
그전에는 과메기가 익힌 것이 아니니 맛이 비릿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 때문에 좀체로 손을 대지 못했는데
그 이후 얼마되지 않아 모임 장소의 테이블에 나온 과메기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집어 들고 쌈을 싸서 먹어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약간 적응하기 힘든 맛이었으나 곧 맛을 느끼게 되고....점점 빠져들게 되어서
요즘은 테이블에 과메기가 나오면 "와...과메기다....!" 하며 제일 먼저 손을 대게 된다.

포항 구룡포의 특산물인 과메기.
과메기란 갓 잡은 신선한 청어나 꽁치를 섭씨 영하 10도의 냉동상태로 두었다가
12월부터 바깥에 내다 걸어 밤에는 냉동을, 낮에는 해동을 거듭하여 수분 함유량이 40% 정도 되도록 말린 것을 말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과메기의 어원은 예전에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관목(貫目)'에서 유래하는데
'목'을 구룡포 방언으로 '메기'라고 발음하여 관목이 '관메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로 굳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주로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많이 잡히지 않고 비싼 데다 건조기간이 오래 걸려 요즘은 주로 꽁치로 만드는데 
청어가 풍년인 해에는 청어 과메기가 대량으로 나오기도 한다. 

코끝을 알싸하게 하는 한겨울 찬바람이 불면 전국 과메기 유통량의 50% 가량이 포항 죽도시장에서 출하되는데
주말이면 대구, 부산, 대전 등 전국에서 과메기를 사려는 인파로 죽도 시장 좌판을 가득 메워 시장은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포항 죽도 시장에 판매되는 과메기는 영덕, 울진에서도 나오긴 하나 대부분은 구룡포에서 말린 것인데
구룡포가 과메기 최대 생산지로 히트를 치는데에는 영일만 호미곶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태백산맥을 넘어온 북서풍과 염분이 제대로 뒤섞이는 영일만의 해풍은 과메기 맛을 배게 하는 데는 최적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꽁치나 청어의 배를 째고 내장을 들어 낸 편과메기(배지기)의 경우 2~3일, 통과메기(엮걸이)는 20일이면 먹기 좋게 꾸덕꾸덕해진다.
한겨울에 영하 5, 6~영상 6, 7℃의 기온과 40%의 습도를 유지하는 데다
살짝 소금기가 밴 영일만 갯바람까지 가세하면 겨울철 최고의 별미 ‘구룡포 과메기’로 다시 태어난다.

과메기는 손가락으로 눌러 보아 탄력이 약간 있는 정도가 건조가 잘된 것이며 
꽁치를 말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처럼 많이 비리지 않다.

과메기를 잘 말리지 못하면 비린맛이 생긴다고 하는데 산지에서부터 다양한 가격차이를 보이는 과메기는
 차가운 바닷바람으로 자연 건조시킨 것이 상품이다.

잘 말린 과메기는 꾸덕꾸덕하고 쫀득쫀득하여 씹을수록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과메기는 원재료인 청어나 꽁치보다 영양가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재료보다 과메기로 만들었을 경우 어린이 성장과 피부 노화 방지에 좋은 DHA와 오메가3 지방산의 양이 증가하고
또한 과메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핵산이 점점 많이 생성되어 체력 저하나 정력 저하를 막아주는데 도움이 된다.
과메기는 피부 미용에는 특효라고 알려져 있는데 과메기 기름으로 미용 비누도 생산하고 있을만큼 피부 재생에 도움을 준다.
저녁에 과메기를 먹고 잔 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본 여성분들은 과메기가 얼마나 피부에 좋은지를 체험해 보셨을 듯....

과메기를 먹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맛을 창조해낼 수 있다.
싱싱한 물미역과 초고추장맛이 과메기 맛을 내는데 가장 중요한데 초고추장은 너무 짜거나 달지 않아야 한다.



김이나 배추잎에 물미역을 놓고 초고추장을 찍은 과메기와 마늘·파를 함께 넣어 먹으면 또 다른 맛이 난다.
미역은 과메기의 기름기가 잘 배이도록 해 과다한 영양 섭취를 억제하고, 마늘은 과메기의 비린내를 제거해 주는데
잘 건조된 과메기 한 점을 양념장에 푹 찍어 김과 미역, 마늘, 고추, 미나리 등과 함께 싸서 입에 넣으면 
입 안에서 목구멍까지 완전 난리가 난다.


과메기의 제철은 찬바람이 부는 11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다.
그 중에서도 해풍이 매서운 12월과 1월 사이 과메기가 맛이 절정이라고 하니 바로 지금이 절정인 맛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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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의 참 모습을 보려면 밤거리를 다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대마도의 주도 이즈하라의 밤은 어떠할까....

낮에도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이즈하라...
밤에도 예외는 아니었다...아니 더  조용하였다. 도대체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호텔 일층은 타쿠시(택시) 승차장이었다.
백미러가 본네트 가운데 떡 하니 달린 모습은 에전에 우리 나라에 한 때 다니던 승용차들을 보는 듯 하다.
택시를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택시가 지루하게만 보인다. 

가로등만 붉은 불빛을 내뿜고 있는 이즈하라 메인 스트리트엔 오가는 사람도 차도...별로 없이 적막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우리 일행의 두런거리는 소리만이 건물에 울려서 되돌아 올 뿐.. 

이즈하라 시내를 흐르는 개천 양 옆에 자리잡은 선술집들만 호박빛의 조명으로 행인을 유혹한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인지.....이름조차 아예 '부산정'이다.  

간판이 많이 낡아 있던 식당문에는 '생선회'라고 메뉴가 적혀져 있었다.
생선회는 일본어로  '사시미(刺身)'인데 이 말의 원뜻을 살펴보면 좀 무시무시하다.
'찌르다', '꽂다' 등을 의미하는 '刺'에 몸 또는 물고기나 짐승의 살을 뜻하는 '身'이 합쳐졌으니 “살을 찌르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무서운 말이 음식명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 옛날 일본의 막부시대에 오사카 성의 한 장군이 멀리서 온 귀한 손님을맞이했다.
수많은 음식과 더불어 특별히 준비한 여러 종류의 생선회를 먹던 중
손님이 "이것은 무슨 생선이기에 이처럼 맛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생선의 이름을 몰랐던 장군은 생선회를 만든 요리사를 불러 직접 대답하게 했다.
그 후부터 요리사는 장군에게 생선회를 올릴 때 작은 깃발에 생선 이름을 적은 다음 생선회의 살에 꽂아서 상에 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생선의 살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하여 '사시미'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낮에 보았던 '야끼또리(焼鳥,やきとり)'라는 이름의 술집(이자까야,居酒屋)은 야경이 더 아름답다. 

불빛과 광고 플래카드가 낮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한자와 히라카나가 합쳐져 문자라는 느낌보다는 또 다른 회화적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다. 

들어 가는 입구가 참 이쁜 선술집(이자까야,居酒屋)앞에 서 보았다. 

분위기가 좋게 보여 들어가 보려고 하니 한국인 출입 금지다.
"죄송합니다...저희 가게에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로 인한 트러블을 막기 위해 한국인 손님을 받지 않겠으니 양해바랍니다."
굉장히 우회해서 안내문을 써놓았지만 결론은 한국인 손님 안 받는다는 소리...--;;
언어 소통이 아닌 그 무언가가 배후에 있는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불빛과 함께 가게 앞에 내걸린 노렌이 참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는데...... 

일본의 식당이나 선술집(이자까야,居酒屋)에서는 어김없이 가게 문 앞에 그 가게의 이름이 쓰인 '노렌(暖簾,のれん)'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노렌(暖簾,のれん)'을 가게 주인들은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데
아침에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내다 걸고 저녁에 문을 닫을 때엔 제일 나중에 걷어서 가게 안에 소중히 간직하며
가게에 불이 나면 다른 귀중한 물건을 꺼내기 앞서 노렌을 제일 먼저 구해 낸다고 한다.
백년이 넘게 된 가게 문 앞의 노렌은 역시 백년이 넘게 된 것이라 보면 된다고.....
일본의 가게의 전통과 역사를 나타내어 주는 가게의 심볼이라 할 수 있다.  

'미자만(味自慢...ㅋㅋ)'이라고 쓰인 노렌을 들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래 된 영화 포스터를 내거는 것이 여기도 유행인 듯 하다. 

여치인지 귀뚜라미인지 모를 장식물이 걸려 있고... 

아주 간단한 종이 공예품도 귀엽게 걸려 있었다. 

술집 안은 지극히 작았고 제일 안에 코딱지 만한 방이 하나 있었다.
많지도 않는 일행들도 다 앉을 수 없어 문턱에 걸터 앉아 술집 문 쪽으로 보고 내부를 찍어보았다. 

역시 방 문에 걸터 앉아 찍은 주방의 모습인데 주인 아저씨.....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방 벽에 걸려 있던 수많은 싸인 종이들을 보니 대미도 관광객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게 실감이 났다.
아! 오늘 밤 죽겠다....우째 자꼬....다녀 감......밤이 무섭다!!
한국 관광객들이 남긴 글귀를 읽으니 피식......웃음이 나왔다. 

선술집 벽장에는 커다란 댓병의 술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술병마다 다 화이트로 이름이 써져 있는 것이다. 술병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먹다가 남은 술이 다 들어 있었다.이런 소주 댓병 한 병에 2,800 엔 정도이므로 우리 돈으론 거의  28,000 원이니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
소주 한 병 따면 다 마시는게 당연할 뿐 아니라 때론 한 명이 서너병은 기본으로 비우는 우리네 음주 문화와는 달리
일본인들은 한 병 사서 얘기하면서 마시다가 남으면 술집에다 맡겨 놓고 다음에 와서 다시 자기 술병을 찾아 마신다.
물론 다음에 자기 술병을 찾기 위해서 술병에다 이름을 써놓는 것은 기본... 

마침내 나온 안주는 족발. 우리네 족발과는 달리 튀겨서그런지 기름기도 많다.
한 접시에 600엔(6000원)인데 양이 너무 적어서 하나씩 맛보니 금방 없어졌다.
나마 비루(생맥주) 한 잔은 580엔(5800원,우리네 생맥주 값은 얼마인지 궁금)이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기념으로 싸인을 남기셨다.한글을 모르지만 받으며 좋아하는 주인 아주머니.
혹 다음에 대마도를 다시 오게되면 여기에 와서 저 싸인을 다시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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