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 마을에서 오목대, 경기전, 전동 성당을 둘러보고 길을 건너면
네거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큰 문루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번 화재로 불타버린 숭례문과 거의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 문루는
전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풍남문(豊南門)이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의례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은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도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풍남문은 전주 4대문 가운데 남쪽 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1388년)에 전라 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거의 이백여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남문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 파괴되었는데
이후 영조 10년인 1734년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명견루라 불렀다.


영조 43년인 1767년에는 전주성내를 모조리 휩쓰는 화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정해년 대화(丁亥年 大火)로 인해 명견루도 다시 불타 버리는 불운을 겪게 된다.
화재가 휩쓴 그 이듬해 전라관찰사 홍락인은 불타버린 명견루를 다시 중건했는데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재와 같은 2층루로 수축했고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조선통감부는 폐성령을 내리게 되는데 
전주부성 4대문 중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는 와중에도 풍남문은 철거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풍남문은 조선 후기의 문루(門樓) 형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는 2층의 팔작(八作)지붕인데 하층은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상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 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한데
옛 문루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인 전주 풍남문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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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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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드라마를 잘 안 보지 않던 필자, 
요즘 [닥.본.사]하고 있는 드라마는 바로 선덕여왕.

선덕여왕의 주 무대인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인지라 
드라마에 나오는 대부분의 내용은 모두 너무나 친근하기만 하다.

선덕여왕 6회에는 진평왕이 연회에서 여흥을 즐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진평왕이 "자~! 이제는 내 차례구나..주령구를 던져라!" 고 명하니 시녀는 희한한 모양새의 주사위를 왕 앞에서 굴린다.
시녀가 주사위를 굴리자 나온 글씨는 '음진대소 (飮盡大笑)'.


"음진대소라... 하하하....자, 모두 잔에 술을 따라라 !"
진평왕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다 마시곤 껄껄 소리내어 크게 웃자 좌중의 신하들도 따라서 크게 웃는다.


드라마에서 나온 희한한 모양새의 주사위는 바로 '주령구(酒令具)'이다.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시에 출토된 참나무 주령구에는 
14면 각각에 술 마실 때의 다양한 벌칙이 쓰여져 있어서 우리의 시선을 끈다.

주령구를 보는 박물관 관람객들은 특이한 모양새와 면마다 적힌 벌칙을 보고 신기해 하는데
왜 하필 주사위를 14면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기존 주사위가 6면 밖에 없으니 좀 더 많은 면이 나오도록 궁리하다
정육면체의 모서리 8개도 각각 면이 되게 깎아서 14개의 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고
정육면체 주사위를 가지고 수많이 던져 놀다가 닳아버린 모서리들에 각각 면을 만들어 글자를 써넣다보니
6+8=14 이렇게 14면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한다고....





주령구의 각면에는 쓰인 다양한 벌칙들을 보면 그 당시 신라인들의 풍류적인 음주 문화를 엿볼 수 있는데 
4각형인 여섯면에 쓰인 벌칙을 보면.....

1.금성작무 (禁聲作舞) : 소리없이 춤추기
2.중인타비 (衆人打鼻) : 여러사람 코 두드리기
3.음진대소 (飮盡大笑) : 술 한잔 다 마시고 크게 웃기
4.삼잔일거 (三盞一去) : 한번에 술 석 잔 마시기
5.유범공과 (有犯空過) : 덤벼드는 사람이나 별난 짓으로 골려도 가만히 있기
6.자창자음 (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6각형인 여덟 면의 벌칙 또한 재미있기 그지 없다. 


7.곡비즉진 (曲臂則盡) : 팔뚝을 구부려 다 마시기
8.농면공과 (弄面孔過) : 얼굴 간질러도 꼼짝 않기
9.임의청가 (任意請歌) :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시키기 
10.월경일곡 (月鏡一曲) : 월경 한 곡조 부르기 (달이란 여자에 관한 내용일 듯..)
11.공영시과 (空詠詩過) : 시 한 수 읊기 
12.양잔즉방 (兩盞則放) : 술 두 잔이면 즉각 마시기
13.추물막방 (醜物莫放) :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14.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 스스로 괴래만(밤 늦게 곤드레 되어 들어오는 모양새)으로 부르기


이 주령구를 던지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신라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날에도 이런 14면체 주사위를 만들어 던지며 술자리를 한다면 얼마나 풍류가 깃든 모임이 될까...
14개의 벌칙을 오늘날에 맞게 현대적으로 살짝 바꿔서 친구들과 한잔 하실 때 써보시길 바란다.

[현대판 주령구 벌칙]
1.금성작무 (禁聲作舞) : 음악없이 춤추기
2.중인타비 (衆人打鼻) : 옆 사람한테 코맞기
3.음진대소 (飮盡大笑) : '원샷'하고 크게 웃기
4.삼잔일거 (三盞一去) : 석잔 '원샷'
5.유범공과 (有犯空過) : 통과
6.자창자음 (自唱自飮) : 노래 부르고 '원샷'
7.곡비즉진 (曲臂則盡) : 옆사람과 '러브샷'하기
8.농면공과 (弄面孔過) : 간지럼 참기
9.임의청가 (任意請歌) : 다른 사람 노래 시키기
10.월경일곡 (月鏡一曲) : 달 들어가는 노래 한곡 부르기
11.공영시과 (空詠詩過) : 시 한 수 읊기
12.양잔즉방 (兩盞則放) : 받은 술잔 남겨놓지 말고 빨리 돌리라.
13.추물막방 (醜物莫放) : 못난이 흉내내기
14.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 최신 유행가 부르기






신라인의 풍류와 놀이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귀한 유물 '주령구'
현재 경주 국립 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는 주령구는 사실 '복제품'이다.
1975년 출토된 진품은 '안타깝게도' 유물 보존 처리도중 전기 과열로 일순간에 불타 버렸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출토된 적 없는 단 하나의 주령구.....
단 한순간의 실수로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유물을 잃어 버리다니....
천년 이상 안압지의 뻘 속에서 그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가 출토되자 마자 소실되어 버린 이일은
우리나라의 문화재 보존 수준을 다시 한번 짐작케 하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천만 다행으로 발굴 직후 남겨둔 전개도와 컴퓨터 단층 촬영,정밀 사진을 통해 재현을 해내어 다시 박물관에 전시하긴 했지만
숭례문의 예처럼 한번 소실되어 복원된 문화재는 더 이상 조상의 손때가 묻은 귀한 유물이 아니라는 점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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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사이 숭례문이 속절없이 다 타 버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다 타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연.실.색.......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을 다 견디고
꿋꿋이 살아서 육백년을 건재해 온 국보 1호

 .

 .

지난 달 숭례문에 사진 찍으러 갔을 때에 그 수려함과 장엄함에 반하여
아무런 제재도 없이 누구나 그 근처를 다 오갈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또 저녁이 되어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는 점에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 것이 비단 숭례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화재에는 취약한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화재 진압 장비 하나 번듯하게 없이
달랑 소화기 몇 대 비치되어 있는 것이 정말 불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루 밤 사이에 속절없이 타서 무너져 버리다니..... 

                                                                                              

조선 시대에 화재가 났다 하더라도 대처하는 것이 이보다는 나을 듯 하다.
자기 집,자기의 재산이면 이렇게 안일한 대처를 했을까.....
정말 어이없는 화재로 인해 우리의 국보 1호를 몇 시간 만에 홀랑 태워먹었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이 있을까....
눈물이 나고 목이 메인다....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우리 나라의 자존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건지...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담은 숭례문의 모습을 쓰라린 심정으로 공개할까 한다.
지난 달 남대문 카메라점에 부속품을 사러 갈 때에 숭례문 바로 옆에 차를 주차했기 때문에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숭례문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

원형대로 복원하는데에는 거의 5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이제 당분간 보기 힘든 아름다운 숭례문의 모습을 몇 장 여러분 앞에 올려 드린다. 

 

 

평소에 그 옆을 지나쳐도 힐끗 올려다 보기만 했지...자세히 살필 생각을 별로 안 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숭례문은 그 위엄과 수려한 자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비둘기들이 휘...날아서 숭례문 지붕으로 모여 앉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숭례문은 서울 성곽의 정문이다.  또한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7년(1398년)에 처음 건립한 후 세종30년(1448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숭례문 중앙 현판의 글씨는 지봉유설에 의하면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어 일반 백성들이 드나 들 수 있게 하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석축과 새로 보수하여 끼워넣은 석축이 혼합되어 있다. 

 

 

홍예문 위에 정면 5 칸,측면 2 칸인 2 층 문루를 세우고 문루 위에 다시 처마를 4 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처마 끝은 여러 개의 나무로 짜 맞추어 댄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이다. 

 

 

숭례문의 잡상(雜像)은 모두 아홉인데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잡상 뒤에 비둘기가 잡상의 일부분인 것 처럼 앉아 있다. 

건물 내부의 2층 바닥은 널빤지로 깐 나무이고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 만이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깐 우물 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성곽 흔적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숭례문의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문갈고리들도 장중한 대문의 위세에 한 몫을 한다. 

 

 

 

 홍예문 안 쪽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이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석축들의 흔적.... 전란이 스쳐 간 상처들이 곳곳에 있었고.... 

 

 

 

 

천정화는 세밀하고 화려하여 목이 아프도록 오래 쳐다 보게 만든다. 발이 넷 달린 청룡의 모습. 마주 보고 있는 황룡의 모습. 구름의 모습이 단순화, 회화화되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숭례문 안 쪽의 사진을 찍고 나오니 웬 청년들이 나와서 주변에 꽂혀 있던 깃발을 거둔다. 

 자세히 보니 아까 퇴근하던(?) 수문장과 수문군이다.
숭례문 근처 어디인가에서 복장을 갈아입고 나와 깃발을 수거해서 다시 일반인의 모습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웬 여자가 촌스럽게 남대문 사진을 찍고 난린가...하는 표정으로 흘깃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숭례문 앞을 지나가는데 대부분 한번 올려다 보지도 않고 지난다.
그들에게 숭례문은 매일 생각없이 스쳐 지나는 길가의 전봇대나 다른 바 없이 느껴진다.

 언제나 바로 옆에서 늘 있어온 그림자 같은 숭례문.....
너무나 가까운 곳에 편안하게 있어서 우리에게 그 귀중함을 전해 주지 못하였나 보다.
우리의 유산,우리의 귀한 문화재는 다른 이가 와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때에 우리 것은 보존되어지는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이 여느 문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을 본다.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위 아래로 있을 경우 불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로써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데
현판의 그 불꽃이 숭례문을 한순간에 태워버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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