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성왕'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9.09 대마도 어촌의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19


한국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의 위치한 작은 포구 미나토  마을.


대마도 곳곳에서 보게 되는 각종 안내 지도의 어디에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는 이 한적한 어촌을
찾아내어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마을 방파제 앞에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 왕에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 순국한 박제상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순국비는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세운 것인데....
 

 

박제상 선생은 신라의 충신으로 파사왕의 5대 손인데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은 바로 박제상의 아들이다. 

 

 

삼국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원년 신라는 왜국과 강화를 하였는데 왜왕은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실성왕은 일찍이 형님인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려고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실성왕은 또 고구려에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냈다. 

 

그런 뒤 눌지왕이 즉위했다.

눌지왕은 박재상을 불러 자기의 동생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제상은 즉시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의 허락을 받아 복호를 데리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자 눌지왕이 또 부탁했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말을 마치자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재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 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 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반역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죽도(竹島)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마도 (對馬島)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미사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은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지만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박제상은 거절하여 이르기를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게 했다.  

                                                                                

경주 망덕사지 앞 문전에 있는 '벌지지(伐知旨)'라는 지명은 박제상 일화에서 유래한 것인데

왜국으로 떠나는 박제상이 집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로가자

남편을 만나지 못한 부인이 따라가다 지쳐 문전의 모래 위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었고

이곳의 긴 모래 사장을 후일에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부인은 울다가 일어나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몸을 일으키려 하니

절망감에 지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는데 후일 이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으니

이는 '다리 빧치다'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벌지지의 들판을 '양지버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두다리 뻗음'이란 뜻이다.

 

 

후일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해도 굽히지 않았던 박제상의 충절...

그런 사실을 아는지...모르는지.....

 

미나토 주민들에게는 별것 아닌 기념비를 찾아

이 한적한 어촌 구석까지 오는 한국인들이 신기하게만 여겨질 따름이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