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살며 1시간 거리인 부산으로 당일치기 여행하기에 재미를 들인 필자.
이번에는 
오래전부터 연인들과 가족들에게 식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태종대로 향해본다.

부산 영도 최남단의 해안인 태종대는 높이 250m의 삼면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식애로서
한국의 해안지형 가운데 관광지로 개발이 가장 잘 된 명승으로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태종대라는 이름에서 조선 3대왕이며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을 떠올렸는데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국의 명승지를 다니던 중
이곳 영도의 절경에 도취되어 쉬며 활을 쏘던 곳이라고 하여

이곳을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태종대는 54만평이 넘는 광범위한 지역이므로 걸어서 돌아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예전에는 승용차나 관광 버스 등으로 태종대 일주가 가능했다고 하나 요즘은 태종대 안으로 개인 차량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태종대 입구에 주차를 한 후 '다누비'라는 순환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태종대 유원지의 자연 경관을 보호하고 이용객의 편의를 위하여 운행하는 이 열차는 
태종대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는 의미로 '다누비'로 지었다고 한다.

코스는 광장 → 태원자갈마당 → 구명사 → 전망대 → 영도등대 → 태종사 → 광장입구로써 
순환도로 4.3km를 운행하는 다누비 열차가 태종대 입구를 출발하여 정류장 5개소를 거쳐 돌아오는데 약 20 여분이 소요된다.
각 정류장에서 자유롭게 다누비 열차에서 내려 경치를 감상한 후 다음 열차에 탑승하면 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데
이용 요금은 1,500원으로 약간 비싼 편이나 광범위한 태종대를 걸어서 돌아보기란 다소 무리이므로
다누비 열차를 이용해서 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누비 열차 위에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태종산의 싱그러운 수풀 내음과
오른쪽 아름드리 해송 사이로 펼쳐지는 푸르른 바다를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보는 것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자갈마당, 구명사, 태종사......등을 다 돌아보는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지라
다누비 코스 중에서도 제일 인기있는 전망대와 등대 코스를 선택하고 입구에서 
2㎞쯤 되는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내려본다.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와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숲이 푸른 바닷물과 잘 조화되어 마치 해금강을 연상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저 바위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까?
전망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위는 이름이 자살바위이다.

저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시신도 찾을 길 없이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온다.



전망대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니 정말 속이 시원하게 탁 트여있다.
전망대 바로 앞에 보이는 조그만 섬의 이름은 생도. 주전자같이 생겨서 주전자섬이라고도 불리운단다.
이곳에서 청명한 날에는 대마도(쓰시마섬)이 보인다기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았다.
이날 약한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도 자세히 보니 저멀리 기다랗게 누워 있는 대마도가 보인다.
56km 떨어진 대마도인데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저기도 우리 땅이면 얼마나 좋을까!




바다 끝에 서서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게 실감이 난다.
작은 카메라의 앵글 속에서도 이렇게 바다가 둥그렇게 나타나다니.....

고개를 돌려 전망대 오른쪽으로 보니 저멀리 거제도도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청명한 날이면 더욱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을텐데......




앞바다에는 쉴새없이 유람선들이 오고간다.
유람선을 타고 아래에서 위로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보고 느낄 수가 있겠지.

다음번에 오면 유람선을 타고 바다에서 태종대를 바라보고 싶다.





전망대 기념품점 앞 바구니에 담긴 조개들이 참 이채롭다.
각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하얀 조가비들을 보니 이쁜 조개를 찾아서 하염없이 해변을 걷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다누비열차를 타고  등대가 있는 곳에서 내려본다.
나무로 된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가야 등대에 이를 수 있다.
울창한 해송과 상록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도시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태종대에는 
60여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좁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가 서식하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바다 헌장이 새겨져 있는 조형물 뒤로 하얀 등대가 눈 앞에 나타난다.
여느 등대와 비교해서 상당히 규모가 큰 등대이다.




 

태종대를 대표하는 신선바위, 망부석, 태운암 등을 보려면
바다를 향해 뽀죡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취와 등대를 지나 또 한참이나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등대 아래에는 이와 같이 연인들의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낙서벽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이채롭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연인들은 이곳에 갈 때 꼬옥 화이트를 챙겨가시도록......






등대 바로 아래에 횟집들이 몇군데 성업중인 것이 보인다.
무허가인 것이 분명한 횟집들인데 얼른 내려가서 회 한접시 맛보고 싶은 유혹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하지만 회를 먹고 느긋하게 있다 보면 다누비열차 운행 시간에 늦어
3km 정도 떨어진 입구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아 유혹을 뿌리치고 선선바위로 향한다.





등대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자 나타나는 엄청나게 큰 너럭바위. 왼쪽은 태종바위, 오른쪽은 신선바위이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진 해안이 
푸르른 바다, 굽이치는 파도와 더불어 가히 절경을 이루니 신선이 놀고 가기엔 정말 딱인 곳이다.






벼랑 끝에 앉아 탁 트인 바다와 하나가 되어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이야말로 신선놀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태종바위 건너편 신선바위 위에 마치 사람 형상 같이 우뚝 선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신라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난 남편 박제상을 그리워하여 바다 건너편을 보고 통곡하던
박제상의 부인이 죽어 그만 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전설이 깃든 망부석이다.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두번에 걸쳐 기술한 적이 있으므로 아래 링크를 꾸욱 눌러서 확인하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대마도 어촌에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박제상 부인이 다리뻗고 통곡했다는 벌지지 
                  




태종대 바위들의 단애를 자세히 보니 정말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이다.
아이들이 지층에 대해 궁금해할 때 여기 와서 보여주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어떤 화가가 이렇듯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으랴......마주치는 단층마다 색감의 조화가 오묘하기 그지없다.





벼랑 끝에 서서 아래 바다를 내려다 보니 아찔해지며 살짝 현깃증이 나기도 한다.
수백만이 사는 대도시 안에 이렇듯 환상적인 절경이 자리잡고 있다니...... 부산사람들은 축복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점심 때에 태종대에 도착했는데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바다 위에도 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노을지는 모습이야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태종대 바다 끝 절벽에 서서 등대와 바다를 배경으로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다는 건 쉽게 만날 수 없는 행운이다.





 
신선도 놀고 갈만한 절경에 심취하여 태종 무열왕도 쉬어 갔다는 부산 태종대.
하룻동안 신선이 되어 여유자적하다 어스름이 밀려오는 태종대를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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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만제키바시(만관교,萬關橋)는 1897년에 굴삭을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시킨 일본 군사용 운하에 놓인 다리이다.

 길이 210m의 철교인 만제키바시 아래에는 만제키 운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다리는 3차로 건설된 다리인데 1차로 건설된 다리는 1897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되었다. 리 길이는 100m. 폭은 5.5m. 높이는 약 36m로 일본 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이다.  2차로 만든 다리는 1956년에 완성한 다리로 길이는 약 81m. 폭은 5.5m. 높이는 약 30m이다. 아치형 철교로 다리가 완성됨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게 되었다. 

 3차로 건설된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완성된 것이다. 길이 210m. 폭 10m. 높이 약36m의 이 다리로 인해 섬 전체의 도로망 정비와 함께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는데 두번째 다리는 이후에 철거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러일 전쟁의 와중에서 이 다리 아래 만제키 운하를 일본 해군의 전략적 거점으로 십분 활용하여 당시 해군 전력상 세계 최고로 꼽히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로 유도시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해전이 일어났던 시대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 강병 정책으로 해군력 증가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대륙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부산까지에 이르는 항로의 단축이 필수적이었다.  그 일환으로 1900년에 일본 해군의 주도하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운하를 개통하게 된다. 대마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 해협  만제키 운하 건설을 하게 되니 이 운하가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 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영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있었는데 1904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에게 10일에 개전하자는 선전포고를 하고 이틀 앞선 8일에 기습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하게 되니 바로 러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지라 일본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는데 1905년 3월 만주의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이 패퇴되는 일이 벌어지자 러시아는 이런 전력의 약세를 보충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시키게 된다. 

 


이때 일본 해군은 함정을 준비하여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발틱 함대가 이 함정에 빠지기를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돌아 대한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했는데 일본이 이것을 알고 영국의 협조를 얻어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는 하는 수 없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러시아 함대가 도중 기착지로 예상되었던 상해에 들르지 않고 항진을 계속하자 연료와 시간의 절약을 위한 항로의 최단 거리를 예상한 일본 함대는 대마도에서 대기하게 되는데 발틱 함대는 일본의 예상대로 쓰시마 해협으로 항진해 왔다.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제독은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다!" 고 외치면서 일본 함대에게 정신무장을 시켰고 결국 발틱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의 정면과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협공에 의해 괴멸되고 만다.


이 해전은 발틱 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여명 사망과 일본 해군 3척 침몰, 전사 117명이 말해주듯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던것이다.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로 일본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러시아는 짜르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그 이후 일본의 야욕은 더욱 더 팽창 일로의 길을 걷게 되어 그 해(1905년) 가쓰라-테프트협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 제국 지배의 승인을 받아낸후 한국의 주권을 박탈당하는 음모가 무르익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5년 뒤 1910년 대한 제국은 강제 합병(한일합병)을 당하게 되니 우리나라는 일본에 35년간을 지배당하게 되는 치욕적인 병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니 이 다리는 일본에서는 <전승의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통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하의 물은 오늘도 여전히 푸르기만 하고....  

이곳을 찾는 여러 여행객들은 다리 위에서 운하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감탄을 그치지 않는다. 

 

발틱 함대와 일본의 함대가 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던 만제키 운하의 오늘은
요트와 함께 여유로운 휴가를 누리는 평화의 운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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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를 여행하는 동안 필자의 관심을 가장 끈 부분은 일반인들의 주택의 모양이었다.
이즈하라나 히타카츠의 시내 일부분 상가를 제외하고는
대마도의 대부분의 일반 주택은 거의 일본의 전통 가옥 형태이다.
(이런 형태로 우리나라 안에 있는 일본식 가옥은 적산 가옥이라 한다.)

오래 된 주택은 물론이고 새로 짓는 주택도
외관은 거의 일본 전통 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이 것은 시내이든 어촌이나 농촌으로 가든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일본의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에 대해서 감탄이 가는 부분 중에 하나이다.

시내 중심지 대부분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어서 전통 가옥을 가장 잘 보존해야 할 경주에서조차 
시내 곳곳에 브랜드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요즈음..
일본의 이런 전통 가옥 보존이 내내 부럽기만 하다.

대마도 여행 중 수많은 일본식 가옥들을 보고 스치면서 담은 사진 몇 장을 올려 드린다.
대부분 달리는 차 안에서 담은 사진이라 상태가 고르지 않음을 이해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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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쓰시마)에는 엄청난 무게의 돌판으로 지붕을 이은 전통 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마을이 있다.
대부분의 대마도 도로가 그렇듯이 차 두대의 교행도 힘든 좁은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산골 개울가 마을에 내리니
안내판에 쓰인 '이시야네(돌지붕)'라는 한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국 관광객이 전체 관광객의 90%를 차지하는 대마도에는 이와 같이 가는 곳마다 안내판이 한글로 되어 있는 곳이 많다.

 

대마도의 돌문화를 대표하는 건물인 이시야네(石屋根小屋,돌지붕 창고).
일본에서 집안의 곡물, 의류, 도구등을 넣어 보관하는 창고를 '고야'라고 부르는데 

이 지방의 창고는 돌로 지붕을 이었다고 해서 '이시야네(石屋根)'라고 부르고 있다.

 

섬의 89%가 산림지역이어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대마도는 식량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또 예로부터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 해협에 면해 있는 서해안 지역은 겨울이 되면 초속 수십미터의 강한 계절풍이 불어왔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초가지붕과 너와지붕으로는 강풍과 화재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지켜낼 수 없었고
또 당시에는 농민이 기와로 지붕을 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강풍으로 인한 피해, 화재로 인한 피해를 막기위해 지붕 자체를 사암이나 이판암의 넓은 판석을 채취하여 덮게 된 것이다.  

 

이시야네를 자세히 보면 이곳은 습기가 많은 곳이므로 기둥을 높여서 지면과 밑바닥에 30-50cm의 공간을 두었다.

이것을 고상식(高床式: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설치하는 가구 구조)구조라고 하는데 지면과 창고의 밑바닥에 바람이 잘 통하게 함으로 곡식의 원활한 건조를 돕기 위함이다.

그런데 지붕위의 돌 하나의 무게는 약 3톤, 지붕 전체의 돌의 무게가 100톤이라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진다.


지붕이 얹어진 기반은 목조건물이므로 무거운 돌지붕의 붕괴를 막는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데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강도가 강한 모밀잣나무를 주로 기둥으로는 사용하였다고 한다.
 

창고 내부는 쌀, 보리 등의 잡곡, 의류 및 각종 생활 도구 등을 구별하여 수납할 수 있도록 구획하였고 창고를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진에서와 같이 본채로부터 떨어진 곳에 마련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건축 형태는 일본에서도 시이네(椎根)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데 현재는 몇채밖에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기중기도 없던 시절에 하나에 3톤 씩이나 되는 이런 돌판들을 어떻게 이 나무 기둥집 위에다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한 건축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만약에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이 기둥들이 썩어서 갑자기 돌지붕이 와르르...내려앉는다면..?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부르르......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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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를 보고 대마 역사 자료관 뒤 편을 돌아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내리니
눈 앞에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와 일본 전통 건물이 나타났다.
킨세키죠(金石城)이라는 성터인데 거기에 성문,정원터가 있고 정원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도 있었다. 

 



킨세키죠(金石城)
은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가 건설한 성인데
성터에는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 잘 남아 있다.

 

 

 

 

한구석에는 훌륭한 정원터가 남아 있는데 따로 입장료를 받아서 담장 밖에서 한 컷 찍었다.

 

 

 

 

 

 

성 입구인 야쿠라문(櫓門,노문)은 1990년에 복원된 건물인데

대마도에서 본 건물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문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모습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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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시. 대마도의 정식 명칭이다.
인구는 약 38000명인데 그것도 해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대마도.
면적은 약 708 제곱킬로미터이니 제주도의 약 40%의 넓이이다.
그렇게 면적이 좁은데다 삼림지대가 섬 전체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마도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농사 지을 땅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

그래서 그런지 시내를 제외한 대마도의 외곽지 도로는 거의 다 차선도 없는 좁은 일차선 도로인데
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두 차 다 서서 간신히 비켜 나간다.
그 차들조차 거의 다 경자동차인데도 불구하고..... 

 

 

대마도 제일의 도시 이즈하라의 메인 스트리트는 가운데 하천이 흐르고 도로는 양 편에 갈라져 있는데
보도같이 생긴 이 길은 인도와 차도 겸용이라서 사람과 차가 구분없이 같이 다닌다. 

 

 

보행자,자전거,자동차가 같은 길로 다니고 있는데 일본의 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반대 방향으로 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를 타면 내릴 때 왼쪽으로 내려야 하는데 좌측 핸들의 차에 항상 길들여져 있던지라 
버스를 탔다가 내릴 때에는 오른쪽으로 내리려고 하다가 아차...! 하고 방향을 틀기가 일쑤였다. 

 

 

버스의 번호판은 녹색과 흰색이 있는데 녹색 번호판은 그린 버스라고 해서 합법적인 영업을 할 수 있는 버스이며
흰색 번호판은 시로 버스라고 하는데 불법 영업 버스라서 사고시에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

 

 

대마도 자동차의 번호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26-98, 25-46, 18-91, 79-78, 66-77,  5 29..... 
작은 섬이라 자동차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런가? 번호판의 숫자가 매우 단촐하다.    

 

 

위에 있는 長岐라는 표시는 대마도가 속해있는 현의 번호이다.



<長崎 (나가사키)227    •  • 41>이라고 쓰인 관광 버스의 번호판이 눈길을 끈다.
번호판이 0041도 아니고  •  • 41이라니....정말 대마도에서나 볼 수 있는 번화판이 아닐까...?(본토를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너무나 작은 섬 대마도에는 버스라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아서 천단위를 쓸 만큼의 수효가 없기 때문에 •  • 41로 표기해두었다.

 

마치 레고 장난감 같은 히타카츠 항구의 지게차의 번호   2  16 이다. 

 

 

일본 사람은 교통 질서를 무지 잘 지킨다는데 그래도 사고는 나는지 터널에서 나오다 사고를 낸 운전자를 조사하는 경찰 발견...!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 주차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에는 노란색 번호판들이 많이 보인다. 

 

 

노란색 번호판은 660 cc의 자동차로 케이지도오샤(경자동차)로 불리워진다. 

 

 

우리 나라 소형차보다(우리는 대부분 800cc) 더 규모가 작은데 
대마도 내의 대부분의 차들이 경자동차이라서 주차선 안에 차를 넣고도 넉넉하게 여유가 있다.  
그런데 위의 차들이나 아래 사진의 차들을 보면 하나같이 주차선의 중앙에 귀신같이 정확하게 주차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 사람들의 세심함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대마도주의 무덤 반쇼인으로 가는 길에도 차도가 일차선이라 길 가에 주차된 차들은 차도 옆에 엄청난 기술을 발휘하여 바싹 붙여 놓는다.
여기 저기 가는 곳마다 주차 질서 하나 만큼은 정말 칭찬할 만 한 일본 사람들이다.  

 

주택가에는 작은 택배차를 주차장 안 그물 속에 얌전히 앉혀 놓았다.
근처의 다른 집도 이렇게 그물을 쳐 둔 집이 많았는데 도대체 그물은 왜 쳐 놓았을까...? 자동차가 모기 물릴까봐....?
누구 아시는 분....!

 

 

이렇게 앙징맞고 이쁜 맞은 소형 트럭이라니....너무나 귀여운 차를 발견했다.

앞 모습은 더욱 귀여운데 칼로 중간을 뭉툭 잘라낸 듯 한 앙징맞은 이 차는 마치 프라 모델을 보는 것 같다.
꼬마 자동차 붕붕을 닮은 이 자동차는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살며시 느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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