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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9 스웨덴 쿠스타프 황태자가 발굴한 경주 서봉총 46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방문하면 곳곳에서 신라의 흔적과 만날 수 있는데특히 시내 중심가 가운데 여기저기 솟아 있는 커다란 고분들은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경주를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면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에는 꼭 들리게 되지만
주택지 한 가운데 위치한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은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노서동 고분군 중에서도 서봉총이다.
서봉총은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 가운데 하나로 금관총의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며 고분의 일련번호는 129호 고분이다. 
서봉총이란 이름은 스웨덴의 한문표기인 서전(瑞典)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모양이 장식된 데서 각 한 자씩 따서 서봉총이라 한 것이다.

왜 고분 이름에 스웨덴이라는 표기가 들어갔는지 의아하실 분이 있으실 것인데.....
사실 경주 시내에 있는 많은 신라 고분들은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조사한 것이 드물어서 
대부분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 조사하였고
경주시의 개별 고분에 붙여진 번호 125호 고분,130호 고분.....등의 이름도 그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금관총, 일제가 발굴 조사를 한 후 봉토도 덮지 않고 버려두어 아직도 이렇게 흉물스런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금관총이 우연히 조사된 이후 (금관총은 서봉총 바로 옆에 있다)
경주 고분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러한 출토 유물에 대한 욕심이 서봉총의 발굴조사를 추동했다.


이때가 1926년인데 마침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 6세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은 쿠스타프가 고고학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고분발굴이 한창인 경주에 그를 안내하였던 것이다.
위 사진은 경주에 도착하여 발굴중인 고분의 내부조사를 할 수 있게 배려받은
아돌프 황태자가 고분을 직접 발굴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그 뒤에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그의 부인인데 이들은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 



발굴된 출토품 중에는 쇠솥 2개와 각종 토기,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 형태의 금관이 주목할 만 한데
금관 안에 3마리의 봉황 모양 장식을 붙인 십자형의 내관(內冠)이 있어 서봉총이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서봉총은 금관총처럼 발굴 후 봉토를 덮지 않아 봉분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경주 시내 고분 중에서는 이렇게 일제가 발굴한 후 봉토를 덮지 않아 평토화된 고분이 부지기수이다.
무덤 속에 누워 있던 신라왕들과 왕족들이 무덤 속에서 일어나 통한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뒷부분의 큰 고분은 130호 고분이고 앞에 야트막하게 평평한 부분이 서봉총인데
발굴 전 고분은 남북길이 52m, 동서길이 35m, 높이 7m 정도였고
주위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어 봉토의 상당부분은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다는데
발굴 후 다시 봉토를 원래대로 쌓은 천마총(박대통령 시절에 발굴했다) 같은 고분과는 달리 봉토를 쌓아놓지 않아 그저 평지처럼 보인다.

서봉총을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쌍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전체적으로 땅콩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봉토와 상석도 없는 서봉총 앞에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서봉총 발굴 참가 기념비가 떡하니 서 있다.
당시 쿠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국왕이 된 후에 아돌프는 한국을 방문하는 간호사들에게 최부자집의 안채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올 것을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최부자는 이방인에게 여인들만이 기거하는 안채 출입과 구경을 철저히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1994년에 쿠스타프가 다시 서봉총을 방문하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가 서봉총 맞은 편에 자라고 있다.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할 당시에 일인들은 발굴 현장에서 황태자가 좀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이미 출토되어 이미 수습되었던 고급 유물을 현장에 다시 놓아두는 등의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최고급 문화재가 일본의  외교전략의 수단이 되어 파헤쳐졌던 가슴 아픈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은 자기네들의 규모가 큰 고분은 천황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조사를 금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자기네 나라의 고분은 철저히 보존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조선의 고분을 파헤친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실로 불쾌하기 그지 없고 지금도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다.


세월이 흘러 무덤의 주인인 이름 모를 신라 왕자의 유택은 평토화되고
외국의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사실만이 부각되어져 있는 서봉총을 마주하니

씁쓸한 기운만이 한바탕 무덤을 휘....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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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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