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수호신인 여신 아테나의 이름에서 유래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s).
260만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아테네는 아티카주의 주도이자 그리스의 수도이다.

2500년전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린 도시 아테네. 
메인 스트리트인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는 근대적인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데
한편에는 고대 유적들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시내 곳곳에는 중세의 비잔틴 건물도 남아 있어
고대와 중세,현대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이다.  

아테네를 방문하는 사람, 아니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곳,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크로폴리스 입장 티켓을 손에 쥐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신들의 도시 아크로폴리스에 발을 딛게 되는 것이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제일 먼저 지정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있는 언덕.
이 언덕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올림푸스 신에게 제사 지내던 영역으로
파르테논 신전, 에렉티온 신전, 니케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서있는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외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파괴, 학자들의 절도 행위, 방문객들의 낙서, 지진 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특히 1687년 베네치아와 터키로부터의 공격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그리스 독립 후 복원 작업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려면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음악당) 옆을 거쳐가게 되는데
오데이온은 정치가이며 부호인 아티쿠스가 사랑하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AD 161 년에 건축한 음악당인데
넓이 240m, 높이 28m의 직사각형 구조이고 
원래는 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무대 전면은 화려하게 장식된 3층 구조였으나 지금은 2층만 남아있고
육천명을 수용하는 규모인 32열의 계단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파괴된 것을 1950년에 보수 하였다.
 

 

아직도 여름이면 이천년이나 된 이 오데이온에서는 아테네 축제가 열리며 많은 예술가들의 공연이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공연을 해야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오데이온 계단의 경사는 심히 가파르고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아찔하기까지 했는데
이천년 넘은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문을 닫아 놓고 출입금지시킨 유적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동이 전해져 왔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 내려다 본 아테네 시내의 전경에서 바로 아래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며 오른 쪽에 보이는 신전은 복원된 헤파이토스 신전인데 신전 앞에 옛 아고라터가 펼쳐져 있다.
이 아고라는 아테네인들의 심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단순한 상업적인 중심지만 아니라 모든 공공 건물이 운집해 있던 곳인데
267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아고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은 에렉티온 신전이다.
처녀 여신 아테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아테나 여신은 이곳 시민들에게 풍부한 올리브를 포세이돈은 풍부한 물을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며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치고 샘에서 소금물이 솟도록 했으나 아테네가 올리브를 싹트게 하자 신들이 아테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그 장소가 이 곳이다. 결국 시민들은 아테나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화가 난 포세이돈은 물을 마르게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리스는 물이 무척 귀하다.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앙 숭배를 위해 지어진 이 신전은 6 명의 소녀상이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처녀단이 특히 유명하다.
이 것을 카리아테이드(caryatid)방식이라고 하는데 이렇듯 기둥이 아닌 처녀상들이 받치고 있는 기법은 이 신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각상들은 보면 왼 쪽 세 개는 왼 쪽 무릎을 오른 쪽 세 개는 오른 쪽 무릎을 살짝 내밀고 있어 튜닉을 입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는데 에렉티온 신전 앞에 선 여자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한 발을 살짝 앞으로 내어밀고 신전의 소녀상과 같은 포즈로 기념 사진을 찍어 본다. 


아테네의 여름은 심하게 덥고 아크로폴리스 바닥의 화강암에 반사 된 햇빛은 사람을 쉬 지치게 한다.
해발 고도 156m의 높은 언덕(?)을 헥헥 거리며 올라온데다 강렬한 햇빛에 지쳐서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르테논의 자료 사진을 미쳐 남기지 못하고 남은 사진은 필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간 사진 한장 뿐이었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의 이미지는 웹에서 살짝 빌려온 이미지로 대체하기로 하고.....

파르테논 신전은 약 2400 년 전에 도리아식 기둥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처음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던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성 소피아 교회로,
오스만 터키의 지배 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베네치아와 대치 중에는 폭약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전 안에 있던 많은 조각 작품들은 폭약고로 사용할 때의 폭발 사고로 인하여 에서 떨어져 나와 신전 바닥에 방치되던 중
엘긴이라는 사람이 파르테논 박공부에 붙어 있던 조각품 및 많은 조각품을 떼어서
영국으로 가져 갔는데 엘긴이 가져간 조각품을 '엘긴 마블'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양을 가져가
지금은 대부분의 조각 작품이 대영 박물관 파르테논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러니....
조상이 물려 준 유적들을 지키지 못한 비애는 다만 우리 나라뿐만 아닌가 보다. 

 

 

이 사진은 대영박물관에서 찍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이다.
대영박물관에는 파르테논 특별실이 따로 있어서 파르테논 신전에서 때내어 온 대부분의 조각상과 부조들이
방 전체를 빙 둘러가며 원래 있던 곳과 같은 위치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 모든 관광객들은 파르테논 앞에서 기념 사진만 찍고 다음 유적지로 서둘러 떠나곤 한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조그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언덕은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언덕이다. 아레오바고는 그 언덕에서 소집되었던 아테네 공회의 명칭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재판관들은 재판을 진행하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하였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동안 그 당시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에피쿠로스 및 스토아 학파의 추종자들에게 붙들려 끌려가게 되는데 이 때 바울은 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과 변론하였다. 그 상황을 기록한 사도 행전 17 :18~31의 내용이 아레오바고 언덕 오른 쪽 네모난 동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뒷편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다음으로 중요한 박물관이라고 하며 1865년에 완공되었으니 거의 150년이 다 된 박물관이다. 

 

 

특히 여신들의 조각상들은 섬세한 옷과 머리 장식이 눈에 띄는데... 

 

 

주름이 곱게 들어간 섬세한 옷감과 가늘게 땋은 머리가 그 당시 아테네의 최신 유행이었다고..... 

 

 

파르테논 신전 박공의 모형에는 포세이돈(삼지창을 들고 있다)과 아테나가 대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넘어진 거인과 싸우는 아테나의 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전시된 유물의 사진은 아무리 많이 찍어도 되나 유물을 배경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처음에는 약간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유물을 배경으로 서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경우에는 관람하는 사람들의 동선에 상당히 방해가 되는데
사진을 찍느라 유물을 가리는 것을 방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일 듯....
그리고 유물 자체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유물을 단지 인물 사진의 뒷배경으로 삼는 것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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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고 다섯 시간......
그리스의 영토인 에게해의 작은 섬 밧모(파트모스, Patmos)로 향한다.
남북 17km, 동서 9km 넓이의 바위와 화산암으로 뒤덮힌 조그마한 섬 밧모는 농사라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건조하고 불모지같은 땅인데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에게해를 헤치고 저멀리 밧모가 보이면 항구가 채 보이기도 전에
섬의 정상 부분에 성채와 같이 우뚝 서서
밧모에 오는 사람들을 환하게 반겨주는 건물이 있으니
바로 '성 요한 수도원'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 아름다운 수도원은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동로마 황제로부터 섬 전체를 성지로 하사받아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인데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높은 곳에 요새처럼 건축하였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그리스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산암으로 건축된 성 요한 수도원은 바다에서 바라보면 약간 검붉은 색으로 두드러져 보이며 마치 거대한 요새같이도 보인다. 

 

밧모섬의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성요한 수도원'을 가기 위해선 주차장에 내려서도 하얀 집들이 늘어선 호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다 숨이 차서 멈추어 뒤로 돌아서 본 풍경은 깨끗한 하늘과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거기에 장난감 같은  하얀 집들...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성 요한 수도원'의 철문이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이곳은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성 요한 수도원을 세우면서부터 이 섬에 수도원과 교회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도원 입구 문 위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정문을 지나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서니 에는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의 사제가 서 있는데
민소매의 옷을 입은 필자를 보더니 어깨를 가리라고 태양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검정색 숄을 한 장 주었다.
사진의 모델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고는 앉아서 멋진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검은 수도복과 검은 모자....그리고 길고 하얀 수염이 정말 멋진 사제. 카리스마도 완전 짱이다...!

정교회 사제의 프로필을 찍은 후에 욕심이 생긴 필자.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것 또한 웃으며 허락한다.
필자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카메라를 앞에 선 사람에게 부탁하고 사제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더니
깜짝 놀란 이 사제..... 손사래를 거듭 치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덩달아 깜짝 놀란 필자.....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후 그냥 옆에 얌전하게 서서 포즈를 취하니
그 할아버지 사제 .....필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옆으로 고개 돌리고 외면한 채 사진 촬영에 임한다.
나이가 아주 많은데도 여자랑 신체 접촉을 하거나 쳐다 보면 안 된다는 계율을 지키던 할아버지 사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입구에서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에도 있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는 예수님,왼쪽은 사도 요한,오른쪽은 수도원을 지어 헌납하는 크리스토둘로스이다. 

 

 

먼저 수도원의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예배당의 둥근 지붕의 붉은 돌이 눈에 들어온다.
화산암의 군데군데가 붉은색이라서 이 수도원이 먼데서 보면 붉은 성채처럼 보이나보다. 

 

 

수도원의 제일 큰 종루에는 종이 다섯개나 달려 있는데 쳐다보면 노틀담 사원의 에스메랄다가 떠오르는 건 웬일인지.....

 

                                                                                                                     

성 요한 수도원 도서관에는 장서 3,000 여권이 소장되어 있는데 장서 중에는 7~8 세기의 성경 희귀 사본들도 있다.
이 도서관은 아토스 수도원 도서관 다음으로 귀중한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한다.  대리석에 쓰여진 요한계시록 사본도 이채롭다.  

이 건물 내에는 8개의 크고 작은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성요한 교회'는 제일 중심이 되는 예배당이다.
벽과 천정에는 오래 되어 칠들이 벗겨져 가는 성화들로 가득 차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인해 아랫 부분이 다 희미해져 없어져가는 성화들이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준다. 

8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이른바 '성상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서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보내던 세금 납부를 중지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오 3세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분열된 원인이 되었던 성상 금지령으로 인해 이 후 비잔티움 내의 많은 성당의 이콘(icon,성화상)이 무너뜨려지고 지워졌는데 이 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라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해 이콘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1,2차 성상 금지령 이 후 성상 금지령은 점점 시들막해져서 동방 정교회에서 이콘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예배 형식은 계속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특징은 성상(聖像)은 거의 없으나 이콘(icon,聖畵)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이 스쳐 간 흔적이 남아 있어 더 아름다운 성요한 수도원의 이콘들을 감상하시길......

 

 

모자이크로 된 이콘도 많은데 왼쪽은 사도 요한, 오른쪽은 수도원을 건립한 크리스토둘로스이다. 사도 요한의 이마를 보면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그 흔적은 사도 요한이 이마를 동굴 암벽에다 대고 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해서 생긴 굳은 살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였는지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 무릎 같았다고 전해진다. 

예배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입구까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성요한수도원 교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필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개신교인은 성상이나 성화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치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서 그것이 비록 예수님의 그림이나 형상이라도 만들거나 그려서 형상을 보고 경배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같은 곳에서도 거기에 그려지거나 세워진 수많은 성경상의 형상들이 미적으로는 심히 아름다웠으나 신앙적으로 형상을 경배한다는 일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되곤 했다. 

그러나 작은...너무도 작은...조그마한 방 두개 정도를 합친 듯한 성 요한 수도원의 아주 아주 작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에 필자는 감격에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방의 천정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박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천정화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사면 벽에도 역시 성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성당이나 교회처럼 설교를 듣기 위해 성도들이 앉는 의자가 없었고
대신 성화가 그려진 벽 삼면에 앉는 부분이 없는 등이 높은 의자가 대여섯개 붙어 있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어서 수도사들이 이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는 앉지 않고 서서 기도하며
서서 기도하던 중에 졸다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앉는 부분 대신 팔걸이만 있는 의자였다.

너무나 소박하고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예배당...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 붙어서 천정만 쳐다 보고 있는데
함께 천정 벽화를 보고 있던 S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S,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을 잇는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너무 아름다워요....
언제 다시 이 곳에 와 보겠어요.....너무 아름다워요....
이 모든 것을 내 눈 속에....마음 속에..... 담아갈 거에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 성화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작고 소박한 예배당..... 너무나 경건한 아름다움.....
필자 또한 벅차 오르는 감격에 가만히 서서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피부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예배당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필설로나 사진으로써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지금 글을 쓰며 그 곳을 기억해 보아도 동일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성지 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밧모섬에 가서 성 요한 수도원의 예배당을 꼬옥 가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예배당 바닥에는 넓적한 나뭇잎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웬 나뭇잎일까...궁금하게 여기며 오른쪽 문으로 나가려던 중 아주 젊고 잘 생긴 수도사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필자가 이 나뭇잎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내일이 성모승천일인데 이 수도원을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경배의 뜻으로 나뭇잎(나뭇잎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적어둘걸...ㅠㅠ)을 제단 앞에 뿌려서 봉헌한 것이란다.
제물이 나뭇잎이라니...참으로 소박하기도 하다..
열심히 설명해 주던 수도사는 필자가 작별 인사를 하니 기념으로 나뭇잎을 주겠다며 필자의 손에 나뭇잎을 꼬옥 쥐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예배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같은 화려한 성당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그 곳에서는 경험할 수가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자그마한 예배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청아한 노래 소리도 함께 들려 온다.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 pura et vera
Dulcis Jesu est in te

Inter poenas et tormenta,
vivit anima contenta,
Casti amoris, sola spe

이 세상에 고통없는 참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여,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
내 영혼은 비로소 위안을 얻게 된다네.

 

"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에 평화 없어라)..."
천국에 BGM이 흐른다면 아마 이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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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이다.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으로 이 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밧모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이 곳에 있는 동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밧모섬 여행자들 중에서 한국인을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에게해 한가운데 있는 밧모섬을 가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틀은 잡아야 하니
섬을 둘러보는 시간에 비해 오고 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이유로
인해 
밧모를 방문한다는 것은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밧모섬으로 가는 길은 보통 두가지가 있는데 그리
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밧모까지는 약 10시간 정도 걸리고
터키의 쿠샤다시 항구에서 밧모로 가는 항해는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필자는 에베소를 둘러 본 후에 쿠샤다시에서 하룻밤 경유한 후 아침 일찍 소형 선박(거의 유람선?)을 타고 밧모로 가기로 했다.
밧모에서는 사도 요한의 유적지와 섬 전체를 돌아본 후 대형 크루즈선을 타고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리스 고린도의 피레우스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면 터키와 그리스 국경을 넘어가게 되므로 항구 내 출국장에서 여권 검사와 짐 검사를 마친 후 배에 올라야 하는데 터키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나라여서 밧모로 가는 여행객은 거의 없으므로 소형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다. 

 


쿠샤다시항을 출발하니 이내 비둘기섬이 나타난다.
쿠샤다시 여행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이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매우 맑고 파도가 거의 없어서 항해는 순조로왔고 젠틀하게 생긴 선장의 나이 지긋한 모습을 보니 더욱 더 안심이 되었다. 일기가 고르지 못하거나 파도가 높은 날에는 소형 선박은 아예 운행을 안한다고 하니 그리스 여행의 시작은 아주 운이 좋은 출발이다. 

 

 

배는 터키 국적인 유람선인지라 선박 후미에 터키 깃발이 붉게 휘날리고 있다.  

 


쿠샤다시를 떠난지 얼마 안 되어 큰 섬이 나타나길래 벌써 밧모섬? 했더니 사모스섬이다.
터키의 항구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아 계속 여기 저기 크고 작은 섬이 나타나는데 터키 바로 옆에 위치한 섬들은 놀랍게도 거의가 그리스의 영토이다.
제법 큰 섬인 사모스(Samos)섬, 또한 터키의 영토였으나 1912년 그리스에 합병된 상당히 큰 섬이다.
터키 사람들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코 앞의 섬들이 그리스의 영토라는데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강렬한 태양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맑고도 푸른 에게해를 헤치고 5시간을 가니 드디어 저 멀리 목적지 밧모섬이 나타난다. 
오랜 시간 배에 있어 지루해하던 승객들은 모두 갑판에 나와서 멀리 보이는  밧모섬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른다. 

 

 

나무도 거의 없이 바위와 화산석으로 뒤덮인 섬에 가까워지니 별것도 아닌 섬이네.....이런 생각이 일순간 들지만 
섬 주변을 유유자적하는 요트들에서 평화로운 느낌이 피부로 전해져 온다. 

 

 

푸른 나무로 뒤덮인 우리나라의 섬들과 달리 밧모섬은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섬이라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섬의 아랫부분에서부터 높지 않은 정상까지 여기저기 집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집들은 대부분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섬에 가까워질수록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솟아 있는 붉은 성 요한 수도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스칼라 항구가 가까워지고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집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방파제도 제대로 없는 그야말로 작은 항구로 배가 들어가는데....

 

 

이런 작은 항구에 대형 크루즈선도 들어온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부분이다.

 

 

섬은 지극히 조그마한데 여름에는 유럽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이 곳에서 휴가를 보낸다. 

 

 

호화 요트에서 소형 요트까지 즐비한 이곳은 유럽 사람들의 꿈의 휴양지이다. 
주민이 2500명 밖에 안 되는 이 섬에 유람선과 요트는 물론이고 수만톤 급의 크루즈선도 정박하니 이 섬의 명성은 크기로 짐작할 일이 아닐 듯 하다. 

 

  

항구 옆 메인 스트리트에는 좁은 섬의 지형에 알맞게 오트바이가 많이 주차되어 있고 다운타운을 거니는 여자들의 자유분방한 차림과 핫한 몸매에서 섬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다운 타운 골목의 상가에는 아름다운 보석 및 악세사리 가게가 줄을 지어 있고 기념품 상가도 많이 들어서 눈요기거리를 준다. 

 

 

항구에서는 제일 먼저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의 세례터'를 찾아 보았다.

 

 

AD 96년 이 곳에 도착한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장소이다. 

 

 

바로 옆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기념 교회가 있다. 

 

 

사도 요한의 세례터 앞에서 보면 스칼라 항구의 전경이 그대로 보이고 성 요한 수도원도 멀리 다 보일 정도인데
밧모는 면적은 매우
좁지만 섬이나 해안선이 드나듦이 거의 80km나 될 정도로 구불구불한 섬이다.  



해변의 바닷물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해초도 거의 없어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이 곳은 태양 광선이 너무 강렬하여 플랑크톤이 잘 서식치 못하여 해변엔 고기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고
염도가 낮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도 몸이 전혀 끈끈하지 않고
몸을 말린 후 손으로 비비면 피부가 보송보송하니......정말 신비롭고 환상적인 바다이다. 

 

 

항구 바로 옆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바닷물의 오염이 적은데 이 섬의 구불구불한 어느 해안 한 구석에는 '누드 비치'도 있다고 하니  밧모에 가시는 분들은 그곳도 찾아본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휴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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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분열 이후, 아타루스 왕조인 필레타이로스가 기원전 281년에 건국했다는 페르가몬(Pergamon) 왕국. 페르가몬 왕국의 유적이 남아있는 터키 베르가마(Bergama,버가모)를 찾아가 본다. 

페르가몬 왕국은 문화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중에서도 도서관 수준은 세계 최대급이었다. 페르가몬에 질투심을 느낀 이집트는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는데  곤란해진 페르가몬은 양피지를 발명해내었다.
'페르가몬의 종이'란 뜻의 양피지(parchmen)는 책 한권에 드는 양의 가죽이 양 15 마리분이어서 제작 비용이 상당했으나 파피루스보다 튼튼하고 양면에 문자를 적을 수 있었던 덕분에 책은 '두루마리'에서 '책자'로 변했고 도서관의 책 보존은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양피지 발명으로 인해 페르가몬 도서관은 장서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서 당시 약 20 만권의 장서를 보유하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세계 제 2의 도서관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페르가몬 왕국은 문화와 상업,의학의 중심지였고,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처럼 계속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이 후 비잔틴, 아랍, 터키를 거쳐 오면서 왕국의 특색은 엷어지고 점점 몰락해가서 현재 남아 있는 페르가몬의 유적은 산상 도시 아크로폴리스(Akropolis)와 고대 의료시설인 아스클레피온(Asklepion)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버가모(베르가마)에서는 아크로폴리스와 아스클레피온 유적을 뒤로 한채 강을 걸쳐 세워져 있는 아주 당당한 건축물을 둘러 보았는데 바로 '크즐 아블루(Kizil Avlu)'이다.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인 2,3 세기에 건립된 이 건축물은 원래 고대 이집트 여신 사라피스를 모시는 거대한 신전이었지만 후일 비잔틴 시대부터는 로마 국교인 기독교 교회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었다.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버가모는 소아시아에 있는 7대 교회중 한 곳이었다.



버가모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도시였기에 초대 교회 당시 신전에서 올리는 제사로 인해  도시 전역이 항상 연기로 자욱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의 신앙 생활은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삶이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터키어로 '크블 아블루(붉은 관)또는 '레드 바실리카(붉은 성당)'라고도 한다. 현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붉은 외벽만 남아있을 뿐인 이 거대한 건물은 60*26 m 의 면적과 19 m 의 높이를 자랑한다.

 

 

본래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대리석을 덧붙여 감추어지게 되었는데 이 곳의 대리석은 오랜 시일을 거쳐 떨어져 나가고 최근에는 마루를 덮고 있던 대리석 마감재만이 온전하게 붙어있다.  

 

 

 떨어져 나간 부분들은 일부 새 벽돌로 복원이 되고 있었는데

 

 

무너지지 않은 일부 문들은 정말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어 크즐 아블루의 전성기를 짐작케 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마을과 성채가 정말 액자 속의 그림 같다. 

 

 

이 건물 분수대 아래로는 셀리누스 강에서 물을 운반하는 지하 터널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거대한 크즐 아블루의 주변에는 당시 건물의 부서진 조각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터키는 지진이 많은 곳이라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유적이 크즐 아블루 주변에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다. 

 

 

이곳에는 유대인 회당도 있었던지라 대리석 기둥에 쓰인 히브리어도 발견할 수 있다.

 

 

깨어진 돌판들과 부서진 채로 맞춰진 조각들이 그 시대의 자취들을 무언으로 알려주었다. 

 

 

크즐 아블루의 문을 나서니 담 옆에는 무화과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크즐 아블루 입구에는 술탄의 우아한 세탁소처럼 상점마다 굉장히 공교하게 짠 카펫들이 걸려있어 보기만해도 눈이 즐겁다. 버가모(베르가마) 에서는 염소 가죽과 신선한 백색 치즈, 과일과 튤립, 꿀, 요쿠르트, 피스타치오등의 특산품이 많이 생산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산품은 역시 버가모(베르가마) 카펫이다. 버가모(베르가마) 카펫은 아직도 손으로 짠 구식 방식으로 만들어지므로 최상급의 카페트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카펫을 구입하려고 돌아볼 때에는 너무나 말끔한 색상의 카펫은 주의하는 것이 좋다고. 



카펫 상점마다 다양한 사이즈와 길이의 카펫과 킬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킬림은 비단으로 짜거나 수를 놓거나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평평하게 짠 여러가지 유형의 융단이나 자루를 말하며 카펫은 이러한 직물에 매듭으로 단단함과 부피감을 더한 직조 공예품을 말한다. 카펫과 킬림은 때로는 아주 길게 짜서 소비자가 원하는 길이로 잘라서 팔기도 한다.  

 

길 가에 카펫을 깔아 놓은 모습은 마치 우리 나라 추수기에 벼를 말리는 풍경을 연상케 하고 담장에 늘어놓은 다양한 색상의 카펫도 이채롭다.

 

 

 노상에서 카펫을 팔고 있던 부자의 포트레이트를 찍어보았다. 부자의 얼굴과 포즈가 똑 같은게 너무 재미있다. 

 



"원달라~~원달라~~~"를 외치며 엽서를 팔고 있던 아저씨는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You're so good~" "You're so beautiful~"을 남발하며 칭찬해 주더니 엽서를 안 사고 그냥 돌아서서 오니 따라와서 엽서를  공짜로 선물해 주었다. 차를 타고 출발하는데도 차창을 보고 계속 손을 흔들어줘 가슴이 찡했다. 

 

페르가몬의 산상 도시 유적 아크로폴리스(Akropolis)의 대극장은 해발 333 m 언덕의 급경사면을 이용해 만들어진 부채 모양의 야외 극장으로써 엄청난 높이와 규모를 자랑한다. 80 m나 되는 까마득한 관객석은 층계가 3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려 일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아래쪽의 귀빈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을 만큼 화려한 극장이다. 여기에서는 배우가 맨 아래의 무대 중앙에 서서 보통의 목소리로 말하여도 가장 맨꼭대기의 관객의 귀에 편안하게 들리는데 이러한 구조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건축에 대한 견해에도 좋은 교훈을 준다. 이 언덕의 맨 위에서 보면 너무 높아서 발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급경사면이지만 전망이 뛰어나서 버가모(베르가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고.... 

푸른 하늘에 순백색의 기둥이 아름다운 이 건물은 페르가몬의 상징인 트리야누스 신전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전인데 기둥이 늘어선 회랑이 신전의 세 방면을 에워싸고 있다. 트리야누스 황제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완성되었다.
현재 아름다운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 열주가 복원되어있다. 

육체보다 정신을 중요시했던 고대 종합의료센터 아스클레피온(Asklepi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에서 유래한 아스클레피온에서는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건설된 기원전 4세기에 이 곳에서 의료가 실시되었다. 외부 공기로부터 영향을 차단하는 회랑,성스러운 물,극장,도서관,진료소,신전 등을 겸비한 당시 최대의 의료 진료소이자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강 온천이었다.
유명한 카라카라 황제도 이 곳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스클레피온에서도 '성스러운 길'은 당시에는 기둥이 아치 형태로 서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150 m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극장으로 이어지는 이오니아식 열주가 계속되는 북쪽의 콜로네이드(회랑)은 당시에는 지붕이 덮여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멋드러진 열주만 서 있다. 쭉쭉 뻗은 열주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버가모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했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의 아크로폴리스나 아스클레피온같은 유적을 두고 그냥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머나로 가야할 시간이 임박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아쉬운 맘을 뒤로 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엽서 파는 아저씨와 카펫 장수 아저씨의 차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뒤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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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이와 같은 카피를 내세우며 혜성같이 나타나 
80년대 우리나라 스포츠 브랜드를 일찌감치 제패한 '나이키(NIKE)'

나이키는 1972년 빌 보어먼이라는 육상 코치와 필 나이트라는 육상선수가 만나 탄생된 이후로
수없이 난립하는 많은 스포츠 브랜드 중에서도 여전한 인기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데....



나이키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의 비결은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에 그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날렵한 부메랑이 날아가는 듯한 특이한 로고 '스워시(Swoosh)'야말로 나이키 인기의 일등 공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사모트라케의 니케

          
나이키(NIKE)의 브랜드 네임은 '승리(Victory)'라는 뜻인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전하기 위해 42.195Km를 달렸던 그리스 병사가 기도를 올린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유래되었다.
로마 신화에서 니케는 역시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아(Victoria)여신에 해당되는데 니케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 바로 '나이키'이다.

나이키 창립 당시 회사를 상징할 만한 로고를 찾던 보어먼, 나이트 두 동업자는
포틀랜드 주립대학에 다니던 여대생 캐롤린 데이비슨(Caroline Davison)에게 로고 디자인을 의뢰하는데
캐롤린은 여신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에 흐르는 선에서 영감을 받아
승리를 표현하는 V를 부드럽게 뉘어 놓는 현재의 로고를 만들어 내어 나이키의 열정적인 스포츠 정신과 승리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이때 캐롤린은 나이키 로고 "스워시(Swoosh)" 를 넘기고 단돈 35달러를 받았는데
현재의 나이키 로고 이미지의 가치는 약 100조원에 이른다고 하니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로고를 넘긴 캐롤린은 많은 돈을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이후 나이키 탄생과 번창은 시대와 딱 맞아 떨어졌는데 야심에 찬 미국 베이비 붐 세대의 개인주의와
자기 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은 조깅 붐으로 이루어졌고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운동화는 세계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으니
나이키는 스포츠 품목으로는 유일하게 코카콜라에 이어 유명 브랜드 2위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캐롤린이 영감을 얻었다는 니케의 온전한 모습을 터키의 에베소(에페스, Efes) 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다.

니케는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아테나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단독으로 그려질 때는 날개가 달려 있고 종려나무 잎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 있는 니케 신전의 니케(파이오니오스의 니케)는 승리의 상징인 날개가 없다.
그것은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날아가지 말고 영원히 아테네를 지켜주길 원하는 시민들에 의해 그 날개가 잘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개 잘린 니케는 아테네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터키의 침공을 받아 아테네의 상징 아크로폴리스가 터키 총독 관저로 쓰이기도 하고

1687년 베네치아가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에는 베네치아군이 쏜 포탄이 파르테논에 쌓아둔 화약을 폭발시켜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이 날아가 파괴되고 신전 안의 박공부에 붙어 있던 많은 조각상은 산산조각이 나서 오랫동안 쌓여 있었다.
이후 엘긴이라는 사람이 대부분의 조각품을 자기나라 영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이후 조각품 대부분은 대영박물관 파르테논 특별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고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편이니....
아테네 시민은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자른 댓가를 톡톡이 치른 셈이다.

 


하지만 엄청난 스포츠 마케팅 효과를 창출해낸 일등공신 '에베소 니케'의 아름다운 날개와 부드러운 곡선의 옷자락은

강인한 스포츠 정신에 영향을 미친 덕분인지......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이천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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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사데 (사르디스,Sardis)의 현재 지명은 Sahlili이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방 서머나 (현재 이즈미르) 동쪽으로 85 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옥한 도시인데 BC 1200년에는 옛 리디아 (루디아)왕국의 수도로써 군사상 상업상의 중심지였다.

고대 리디아 제국은 소녀들이 결혼할 때 지참금을 벌기 위해 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고대 국왕 칸다올레스는 경호원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부인의 나신을 훔쳐보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여왕은 그 경호원 기네스에게 목숨과 왕을 살해하는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는데 결국 기네스는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의 조상이 되었다. 

 

 

또 리디아인들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많이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고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생산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크로이소스의 아버지 알리아테스 왕이 고안해낸 발명품이 바로 우리가 요즘 쉽게 쓰고 있는 '동전'인데
맨 처음 동전은 황금과 은의 합금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고 아무런 글자도 쓰이지 않고 사르디스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머리만을 새겼다.

 

크로이소스는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 에페수스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이 많이 나오는 까닭은 '황금의 손 미다스'가 이 곳의 팍톨루스 강가에서 목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신화에 따르면 미다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이자 숲의 신인 실레노스를 사로잡았으나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므로 디오니소스는 그 보답으로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미다스는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음식마저도 손을 대면 금으로 변하여 먹을 수가 없었고 그의 공주조차도 금으로 변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된 미다스에게 디오니소스는 사르디스 근처에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목욕을 하게 하여서 황금의 소원에서 벗어나도록 했는데 그후 팍톨루스 강에는 사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아크로폴리스는 난공 불락의 도시로 알려졌는데도 BC 549년에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BC 218년엔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점령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비밀의 종교가 성해 요한 계시록  3장 4절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폐허나 다름없는 사데 유적지에서 가장 장관을 연출하는 건축물은 단연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성경에서는 아데미 신전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위의 사진은 에페스(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옆 후미진 창고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찍은 것이다.

 

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페수스와 사모스,그리고 디디마에 있는 다른 대규모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중에 가장 큰 신전이다. 신전은 BC 550년 경 건설을 시작했지만 이오니아인의 반란에 파괴되었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복구를 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위용이 짐작되는 엄청난 높이의 신전 기둥  2개가 남아 나란히 서 있어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잘라 빈틈 없이 쌓아 올린 기술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이 신전은 거리가 짧은 막다른 곳에 여덟개의 기둥을 두고 양쪽 가장자리에 20개의 기둥을 배치시키는 이오니아식 배열로 이루어졌는데 남아있는 기둥만 보아도 신전의 원래의 크기가 짐작이 되고 엄청난 높이의 기둥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제단은 신전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건물 정면이 언덕 경사면을 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된다.

 



미쳐 복구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치되어있는 신전의 기둥을 보면 마치 무른 석고를 조각하듯 정교하게 조각되어있고....

 

기둥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진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코린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장식 기법 중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는 장식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폐허 기둥 뒷편에는  벽돌로 된 사데 교회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현재의 남은 건물의 잔해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부요하였기 때문에 물질 문화에 빠져서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신전 바로 뒤에 있는 트몰루스(Tmolus, 해발 2,137m) 산은 마치 사람이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것 같은 형상의 산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리디아 왕국와 아르테미스 신전, 사데 교회의 흥망성쇠를 수천년 동안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을 트몰루스산을 뒤로 하며 사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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