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큰 줄기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태어난 고장, 밀양.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장 밀양은 가는 곳마다 역사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고택이 즐비하다.



이 밀양에는 두 손씨 가문이 있는데 밀양 손씨(밀성 손씨)와 일직 손씨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향교가 있는 마을 교동(校洞) 주위에는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 등 30여채의 고택이 밀집해 있다.



마을 고택 중은 특히 눈에 뜨이는 고택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61호인 '밀양 교동 손씨 고가'이다.
일명 만석꾼 집으로 알려져 있는 교동 손씨 고가는 택지가 무려 1,000평이 넘는 규모인데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아래층, 사당채,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사랑채 등으로 구성된 99칸의 큰 주택이다.



동편에 ㄱ자로 자리잡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큰 사랑채가 있고 그 맞은편 중문을 지나면 작은 사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행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과, 우측에 사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이 있으며 우측으로 진입하면 ㄱ자형의 화려한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집은 숙종 때 학자인 손성증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큰 사랑채는 손영돈이 1900년경에 근대공법을 원용하여 특색 있는 건물로 지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하부를 벽돌로 쌓아 여느 누마루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대신 화려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1935년 불이 나 정침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으며 여러 해를 두고 지금과 같이 재건하였다.



창호문 대신 유리문을 끼워 화려함을 더한 사랑채 입구에는 몽맹헌(夢孟軒)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이집은 건물의 수도 많고 배치 형태도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 내외 생활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은 집인데
왼쪽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과 측면에 창고·행랑방·찬간 등이 있는 별채가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왼쪽 뒤 높은 곳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역시 자물쇠로 잠겨 있다.



밀양 교동
손씨 고가는 현재 '열두대문'이라는 한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밀성 손씨 11대손인 손중배씨가 운영하고 있다.
열두대문이란 식당의 이름은 과거 이집의 대문 수가 열두개였다는데서 따온것인데
필자도 이왕이면 열두대문집에서 밀양 고택의 전통 밥상을 마주하고 싶었으나
반드시 예약손님만 받는 이집의 방침 때문에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이 교동에는 열두대문집 말고도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를 비롯해서 비슷한 규모의 고택이 많으니
시간이 허락하면 다른 가옥도 돌아보면 조선 후기 가옥 형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후엔 언덕 위에 자리잡은 향교의 누각 풍화루에 올라 교동 전체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밀양의 '은밀한 햇살'을 느껴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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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운문댐 건설로 인해 새로 조성된 대천읍을 지나 금천면 신지리에 이르면
이차선 도로 양쪽에 예사스럽지 않은 고택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그중에서도 운강 고택은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479~1560) 이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옛 서당터에 지어진 주택인데 영조 2년(1726) 박중응이 이집을 처음 지었다. 
그후 순조 24년(1824)에 박시묵(朴時默)이 집을 중건하고
동창천 벼랑 위에는 별장 만화정을 새로 지었는데
운강 고택이란 이름은 바로 박시묵의 호 운강(雲岡)에서 이름한 것이다.



1912년에는 사랑과 안채를 크게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일반적인 다른 고택과 달리
다양한 보관 장소와 내외 분별에 신경을 쓴 설비와 공간, 주종을 명확히 구별해 놓은 화장실,
서당의 존재 등으로 합리적인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조선 후기의 상류 주택이다.


운강 고택은 길에서 바로 대문이 보이지 않고 대문으로 이르는 길이 ㄱ자로 꺾어져 있다.


골목과 대문이 정면으로 연결될 경우 찬 바람과 사악한 기운이 집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그 외문 끝에는 '운강고택(雲岡故宅)'이라 쓴 김충현(金忠顯)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운강 박시묵 선생의 후손으로 운강 고택과 섬암 고택 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퇴직 교사 출신의 박성규 선생님이 직접 안내해주시고 상세한 고택의 해설을 해 주셨다.
평소에는 관리 상의 이유로 인해 고택의 문을 잠궈 놓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지가 1,770평이나 되는 이 고택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집채의 동수가 모두 9동이나 되며 
 안 마당과 안채 후원·사랑채 후원의 공간을 넓고 여유있게 두는 등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주택이다.  


대문채는 6간인데 왼쪽부터 외양간,곳간,문간방 2채,대문채,측간이다.
 보통의 솟을대문집은 대문이 집의 중앙에 와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택은 대문간을 두번째 칸에 설치하여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둘러싼 건물 중 왼쪽은 큰 사랑채, 오른쪽은 중사랑채인데
큰 사랑채는 두벌대 기단을 써서 작은 사랑채보다 상위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지기방, 큰사랑방 2간, 대청 2간의 5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두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에는 들문이 달려서 여름에는 문을 다 들어올려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방문을 열지 않고도 바깥의 동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아담한 유리 조각을 문의 부분에 붙여 놓은 것이 눈에 뜨인다.


사랑 대청이 끝나는 뒷기둥에는 '내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각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선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이 일각문을 통해서 후원을 지나 안채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게 세심하게 꾸며져 있다.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사랑채와 중문 사이의 꽃담이다.
깨진 암수 기와를 활용하여 길상을 의미하는 吉자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등처럼 보이는 문양이 어우러져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을 편안하게 유도한다.


근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아름다운 꽃담에도 여기저기 낙서를 해놓은 손길이 보인다.
어찌 가만히 버려두지 않고 무식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인지.....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대문에서 안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은 중사랑채인데 툇마루를 둔 2간의 온돌방과 마루가 있다.
서당으로 쓰이기도 했던 중사랑채의 왼쪽 1간은 누마루로서 서고라고 한다.


문 위에는 '백류원(百榴園)'이라 쓴 김충현의 편액이 걸려 있기에 이집에 석류나무가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중사랑의 후원이 원래의 백류원이었으나 지금은 석류나무가 없다고 한다.


중사랑채의 왼쪽에는 7간의 고방채가 있는데 과거에 수요가 많던 교통기구의 격납(格納)으로 쓰였다.


고방채의 제일 끝은 마굿간이니 요즘 같으면 차고라고 하겠는데 마굿간 뒤의 측간은 하인 전용이다.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마주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다른 분들의 답사 자료에서 본바로는 안채 마당에 둥글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이 잘 다져져 있는 걸 보니 근래 보수하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듯 하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2간 툇마루를 두었고 가운데 대청에도 문을 달아 놓았다.


안채의 대청문 역시 들문으로 되어 여름엔 시원하게 들어올릴 수 있게 된걸 보니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피부로 전해진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는데 
박성규 선생의 허락을 받아 들어가 안채의 구조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근래에 새로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문이며 벽지가 아주 산뜻하였다.


 
안방과 부엌이 접하는 부엌 귀퉁이에는 작은 찬마루를 두어 안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문을 내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내부를 보니 4간이나 되는 아주 넓은 부엌은 집안 대소사 준비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웃방의 안쪽에도 간막이를 하여 반간의 찬광을 꾸며 놓았다.


우리나라의 가옥들이 방안에 수납 공간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집은 이렇듯 군데군데 수납공간이 많다.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대청 마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청은 3간 크기 정도이며 기제시(忌祭時)의 제청(祭廳)으로 쓰인다고 하고


대청의 뒤편에도 역시 간막이를 해서 '여름 찬광'을 마련하였다. 


안방을 중심으로 찬마루, 찬광을 고루 분산시켜 다수화하여 곳곳이 수납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특히 툇마루 아래에는 두꺼운 널을 걸쳐서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높은 툇마루에 오르기에 편리하도록 디딤돌을 대신해 놓았는데
곳곳에 이렇게 여성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뜨이는 주택이다.
 


동편에 가로 놓인 행랑채에는 부엌, 방, 마루, 고방,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에는 오랜 세월동안 디디고 빻아서 많이 닳아 버린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방앗간 뒤편에는 2간 측간을 두어 안쪽은 안방 마님용, 바깥쪽은 행랑 하인용으로 구분 사용케 하였다.


 행랑채 부엌문 판자에 네모꼴을 크고 작게 뚫어 통풍이 잘 되게 한 점도 눈에 뜨인다.


안채의 남쪽에 가로 놓인 4간의 광채는 의류와 주류의 곡간이며 왼쪽에 세워진 6간의 간막이 없는 곳간은 곡간인데
엄청나게 큰 광채와 곡간은 이집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다.
곡간의 남쪽에는 ㄱ자로 달아낸 뒷사랑이 있는데 이 뒷사랑과 곡간의 끝기둥 중간에 출입문을 내어
사랑채 후원에서 내정(內庭)에 직접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안채에 드나들기 쉽게 해놓은 비밀통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안채는 후원도 정말 넓다..거의 뒷동산이라 할 만큼...


후원에는 바위가 일곱개가 있어서 칠성 바위라고 부르는데 매우 신성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안채와 마주 보고 있는 협문으로 들어서면 중사랑 후원이 있고 왼쪽에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중사랑 후원에서 다시 사당문으로 들어선다.

 
규모가 상당히 큰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는데 해설을 해주신 박선생님은
밀양 박씨 가문이 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니 
배우 박중훈도 박선생님의 사촌이어서 명절에는 고향에 내려온다고 살포시 덧붙이셨다.


사당 안에서 담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퇴계 이황 고택, 경주 최씨 고택.....여기저기서 고택들을 많이 답사해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운강 고택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넓은 저택이란 점에서 방문자를 놀라게 했고
무엇보다도 세심하게 관리, 보존되고 있어서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고택의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이 솟을대문을 드나드는 모든 분들에게 언제나
햇살의 따스한 기운처럼 경사로운 일이 넘쳐 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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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유달리 고택과 누각이 많다. 
운강 고택,  만화정, 섬암고택 등의 오래 된  가옥들이 연이어 있어서 마치 한옥 마을에 온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가옥은 '내시 고택'이라고 불리는 '임당리 김씨 고택'이다.

이 고택은 궁중 내시로 정 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낙향하여 지은 집인데
이 가문은 임진왜란 전부터 16대 400여 년을 내시 가계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 고택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건물 구조도 일반 반가의 주택과는 다른 특성이 있어 내시 주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중앙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눈에 잘 뜨일 듯 말 듯한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천 위에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 들어가면 솟을 대문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 대문 앞에 다다르니 헉......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평소에도 문을 잠궈 놓는지 ......아니면 관리인이 어디 출타를 한건지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키 높이 정도 되는 담장으로 인해 고택은 외부인들에게 그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쓰는 방법처럼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 담장 안쪽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 셔터를 마구 눌렀다.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 담장 안의 풍경이 찍혔긴 한데 건물은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고 앵글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수십번 실패를 거듭하니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기울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가 있었고
사진으로나마 내시 고택의 내부를 일부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조로 보아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채란 집의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안채와 대면을 피하는게 상례라
대부분의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
을 인정해 주는 구조인데 이 가옥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 집은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두 사랑채가 대문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위치해 있으며
작은 사랑채
중문을 통과 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다가 작은사랑채 판벽에는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관찰하기 위하여  ♡♡♡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랑채에 앉아 외간 남자의 출입이 있는지.....안주인이 어디를 가는지....하나 하나 감시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성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바깥 주인으로서는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실제로 내시 가계 부인들은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된 안채에서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연당이 있고 연당 남쪽에는 널찍한 빈터가 있는데 

사랑채 주위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집은 해방 후에도 지금 보다는 훨씬 집터가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후손들이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전답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었던 김일준은 인심도 후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의 기원이 상고 시대 은나라 때까지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이미 궁중에 환관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내시와 환
관의 개념을 같이 사용하지만 본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은 달랐고 고려 때 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구분됐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나 주자학의 태두인 안향 등도 본래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내시로 일했다는데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을 독차지 하게
되면서 내시가 환관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환관의 형태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 혹은 친인척에 의해 거세를 당하거나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빈곤한 가정 경제를 면하고 환관이 되어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또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과 부역을 피하고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을 모셨던 16대 김일준이 왜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환관의 최고 벼슬은 종 2품인걸로 보아
김일준이 얻은 정 3품 통정대부 직첩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자리란걸 알 수 있다.

임당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서는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을 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내시 생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8대 이후
로는 혈통에 의한 가족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내시 고택.
고택 안에 살던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 인내해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고택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도 편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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