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하이킥’에 등장할 때만 해도 어리고 귀엽기만 한 캐릭터였던 김범. 

2009년 KBS2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한국 대표 예술 명문가의 차남인 바람둥이 '소이정' 역을 맡아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를 
능청스럽게 구사하기도 했지만
아직 풋내날 정도로 어리다는 느낌이 더 지배적이었는데

이후 드라마 '드림',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영화 '비상'등을 통해 미소년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점점 성숙해진 캐릭터로 변신을 거듭하여 이제는 <남자>의 내음이 물씬 나는 완벽한 성인 연기자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꽃보다 남자의 대박 행진 이후 감미로운 목소리와 여심을 스르르 녹여버리는 그의 환한 미소는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 대만에서도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어느새 한류 스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런 그의 인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는 듯 얼마전에는 한류드림페스티벌의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많은 국내외 스타 중에서 한류 홍보대사로 위촉된 김범은  이번 경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0 한류드림페스티벌 - 한류 스타와의 밤'에도 출연해 600여명의 일본, 중국 팬들과의 뜻 깊은 만남을 가졌다.





김범은 함께 출연한 엄태웅, 윤상현과 함께 일본, 중국, 대만, 동남아를 비롯한 미국,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한류를 찾아온 팬들에게 다양한 공연과 함께 선물을 증정하는 행사를 가졌는데





이날 김범은 한류 홍보대사로 위촉된 것이 무엇보다도 영광이라고 하며
최선을 다해 한국의 미를 알리겠다는 홍보 대사로서의 다짐을 거듭 말하기도 하며
한류 팬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변하며 그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외국팬이 '꽃보다 남자'에서 기억나는 대사는 무엇이었냐고 묻자 
"일상 생활에서 쓰지 않는 대사들이 많았다. 만화에 있는 대화를 실제로 내뱉으려니 민망한 대사가 많았는데
'하얀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수 있어' '너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 5초면 충분해' 같은 것들이었다"고 말해
팬사인회장을 웃음 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또 이상형으로 몇살 정도 차이가 나는 여자가 좋냐는 질문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정신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대화가 통하는 여자면 좋겠다"며
"위로는 10살까지 가능하다. 내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래로 많이 내려가면 미성년자가 되니.....노코멘트 하겠다."고 말할 때는
수많은 외국 여성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기도 했다.
미소년의 이미지로만 굳어있던 김범이 어느새 <남자>가 되었다고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김범은 2010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제작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인터랙티브 드라마 '하루'에도 전격 출연한다고 한다.
'하루'는 유노윤호, 빅뱅, 한채영, 김범, 박시후, 이다해 등 차세대 한류스타들이 출연해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명소에서 펼쳐지는 특별한 '하루'를 테마로 제작되는 드라마이다.
호화출연진이 눈에 뜨이는 이 드라마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 아시아를 비롯한 한류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제작진은 그동안 극비리에 부산, 전남 곡성, 경기도 양평, 해랑열차, 한강 등지에서 촬영을 계속해 왔다고 한다.





드라마 '하루'가 방영되면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 다시 한번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데
김범 또한 한류의 중심이 되어 세계에 이름을 기분좋게 알리게 되는 날이 오기를 살포시 기다려본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선덕여왕에서 김유신 배역을 맡아 열연하던 엄태웅이 가수가 되어 돌아 왔다고 한다.
가수라고....?
수퍼스타K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왕년(?)의 섹시 여가수 엄정화가 친누나이니
그가 가수가 되었다고 해도 뭐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닌데.....

엄태웅은 누나 엄정화의 음악성 못지 않은 가창력을 가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선덕여왕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가슴을 태우던 김유신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고
'시라노;연애조작단((Cyrano agency, 2010)'이라는 로맨스 코미디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시라노 에이전시'는 연애에 서투른 사람들의 사랑을 대신 이루어주는 연애조작단인데
때로는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때로는 비밀 작전 수행처럼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으로 의뢰인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연애 에이전시이다.
그들의 신조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 안 한다'라나.....?
그러던 어느 날 스펙은 최고이나 연애는 꽝인 2% 부족한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이
에이전시 대표인 병훈(엄태웅)과 그의 작전요원 민영(박신혜)을 찾아오게 되는데
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랑스런 외모의 희중(이민정 분).
그러나 그녀의 프로필을 본 순간, 병훈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엄태웅은 최다니엘과 함께 '청계산 가버렸네'라는 뮤직비디오를 공개해 눈길을 끈다.

사거리 좌회전 하면 너의 집인데
용기가 없어 머뭇머뭇 그냥 지나쳤네
오늘도 난 망설이다 좌회전 못하고
직진해 버렸네 그러다 청계산 가버렸네

독특한 제목과 위트 넘치는 가사, 유쾌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노래와 함께
엄태웅의 남다른 노래실력과 엔터테이너적 끼에 다시 한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운좋게도 경주에서 직접 엄태웅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

한류드림페스티벌 첫날에 '한류 스타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외국인 한류팬들을 위한 김범, 엄태웅, 윤상현 멋진 남자의 팬싸인회가 있었기 때문.





엄태웅, 김범, 윤상현 세 남자는 경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0 한류드림페스티벌 - 한류 스타와의 밤'에 출연해

600여명의 일본, 중국 및 국내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는데
엄태웅은 "이렇게 많은 해외 팬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다. 경주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행사장을 가득 메운 외국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 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냐고 묻는 팬들의 질문에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던 기억이 난다. 복장 때문에 그랬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엄태웅 관련 포스트 : 선덕여왕 촬영장, 싸인해주는 엄태웅





막걸리 홍보대사이기도 한 엄태웅은 이날 팬들에게 키위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어 보였는데
"칵테일 만드는 방법은 너무 쉽다. 키위와 막걸리를 함께 넣고 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날 엄태웅이 직접 만든 막걸리 칵테일을 맛보기 위해 한류팬들은 엄태웅과 가위 바위 보를 해야했는데








엄태웅과 같은 가위 바위 보를 낸 한류 팬 다섯명이 그가 만든 칵테일을 시음하고

아울러 선물과 함께 기념촬영하는 행운도 쥐게 되었다.





엄태웅은 "한국의 멋진 문화를 함께 즐기고 가셨으면 좋겠다. 다음에도 또 이런 좋은 자리가 있었음 좋겠다"며 소감을 밝힌 후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등 세 곡의 노래를 열창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누나인 엄정화와 함께 멋진 가창력을 선보이며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엄태웅.
새로운 영화에서 전보다 더 멋진 연기로 팬들에게 보답하기를 기대해 본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선덕여왕 49회는 완전 미실과 비담을 위해 쓰여진 극본인 듯 하다.
주연인 덕만과 유신의 존재감은 극히 미약한데 반해 미실과 비담에만 온통 드라마의 촛점이 맞추어졌으니.....


선과 악을 넘나드는 야누스적인 캐릭터로 언제 숨겨진 잔인성을 발휘하여 등을 돌릴지 항상 아슬아슬함을 주던 비담은
염종의 꼬드김에 귀가 한껏 얇아져 있는데다가 덕만의 명을 받고 나무 아래서 파낸 비서(秘書)가
막상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였다는 것을 알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록 자신을 버린 어머니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실에게서 돌아온 비담은 땅을 파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거짓말을 덕만에게 하게 되고
미실은 세종과 하종에게 비담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하는데....
50회에서는 미실이 죽게되는 과정과 함께 절대 충성하던 비담이 덕만에게 배신하게 되는 과정이 서서히 전개될 듯 하다.

드라마에서 진지왕과 미실간의 사생자로 등장하는 비담(毗曇).

사실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누구의 아들인지....그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파기된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비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재위 말기인 645년에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으며
647년(선덕여왕 16년)에 비담의 난을 일으켜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다 반란을 일으킨지 10일만에 진압 당한 뒤
동조하여 난을 도모한 30 여명의 진골 귀족과 함께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비담의 가계는 구족(九族)이 멸하였다는 기록 뿐이다.


비담은 상대등이 된 후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유신, 춘추와 경쟁하게 되는데 점차 세력이 밀리게 되자
"여왕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선덕여왕을 폐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는 심히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는데
왕이 안에서 막아내자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유신, 춘추는 월성에 진을 쳤는데 공방이 10 여일이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그 때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비담은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비담군은 사기가 충천해져 군사들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선덕여왕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유신은 여왕의 근심을 지혜로운 언사로 달래주고
경주 율동의 성부산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리에 말을 퍼뜨리기를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반군들이 의심하게 하고
또 흰말을 잡아 제사를 하며 여러 장졸을 독려하며 싸우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충천하게 되어 10일만에 난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유신은 패주하는 비담 등 주모자를 잡아 목을 베고 그의 구족(九族)을 멸하는데
그 사이에 병환이 심했던 선덕여왕은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게 되고 
진덕여왕이 신라 제28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비담은 분명 진골 귀족들의 수장좌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오를만큼 당대 최고위 귀족이었지만
반역을 꾀한 죄로 역모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파기된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더욱 출신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신라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우리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비담..
선덕여왕 비담의 유명세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 둘 찾기 전에는 세간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던 비담의 근거지, 명활산성을 찾아가 본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진입하다 보면 길이 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보문호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음식점들이 있는 곳 바로 끝부분에 위치한 명활산성의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많은 분들이 찾는 보문단지 입구에 비담이 난을 일으켰던 근거지가 있다고 하면 처음 들었다고 놀라시는 분이 더 많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안내판을 지나면 비포장길을 100m도 채 들어가지 않아 바로 나타나는 산성이 바로 명활산성이다.


명활산성(明活山城)은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신라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으로 인정받아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활산성은
근래에 와서 일부 복원,축조되었는데 복원된 부분은 안팎이 돌로 짜여있으며 길이 50m, 높이 3m 가량의 2단으로 쌓았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또한 '명활산성작성비'가  1988년 석성(石城)의 북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데 

명활산에 산성을 쌓고 세운 기념비인 높이 66.8의 이 기념비는 현재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성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혀 있는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꽉 차게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공사 실무자의 이름 및 담당거리,
④ 공사담당 위치, ⑤ 축성참가자의 수, ⑥ 공사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첫머리의 '신미년'(辛未年)이라는 간지는 551년(진흥왕 12)으로 추정되며,
공사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은 성곽 축조 규모 및 인력 동원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비에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상인나두'(上人邏頭)·'장인'(匠人)·'서사인'(書寫人) 등의 여러 직명도 기록되어 있어
남산신성비와 함께 신라시대 사회제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비담의 난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법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는데
이로써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비담의 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갔고 이들이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제가 실시된다.
이후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신라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신라 중대(中代)가 시작되었으며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선덕여왕, 미실의 죽음도 눈앞으로 다가왔다.
덕만의 강적 미실이 죽고 나면 이제 비담이 덕만의 주적(主敵)이 되는 일만 남아 있는데
덕만을 흠모하며 덕만에게 완전한 복종을 하고 있던 비담이 어떻게 덕만에게 발꿈치를 들게 할지는 오로지 작가의 펜끝에 달려 있을 듯....
야누스적인 캐릭터지만 미워하면서도 배척할 수 없는 나쁜 남자 비담의 앞으로의 역할이 기대가 된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기 전까지 신라시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화랑정신을 자라는 청소년에게 강력히 심어주고 싶었던 박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는지
국사책에서도 중점적으로 나오곤 했는데...

경주 지역에 와서도 지금껏 관심받지 못했던 선덕여왕의 자취보다는 김유신의 자취를 찾는 것이 더 쉽다.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경주 톨게이트에 세워진 동상은 물론 

경주 시민의 휴식처 황성공원 언덕에도 김유신 동상이 서 있어 밤에도 환하게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그가 죽은 뒤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조(租)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후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며 사람을 배정해 무덤을 수호하게 했으며



뒤에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여 무덤의 양식은 왕릉이나 다름이 없다.



원형분인 봉분의 둘레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호석,護石)을 돌리고 
12방위의 둘레돌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위엄을 더했다.



경주의 다른 왕릉에도 지신상이 있지만 조각의 우수함이나 모습의 거대함은 이 무덤의 것이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지신상의 크기는 각각 세로 96㎝, 가로 61㎝정도인데 모두 문관복을 입고
발을 양옆으로 벌린 정면상이나 몸과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한 측면상이다.
얼굴은 방향에 따라 해당되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손에는 삼지창이나 검 또는 도끼 등의 무기를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십이지신상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본다면.....
 

 
                                       쥐                                                                                소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또 봉분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김유신이 죽은 후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른 후 묘비를 세웠지만 
그 묘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조선
조선 숙종36년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숭정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 있다.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서편 비석의 묘비와 동편 비석의 묘비를 비교해 보는데 동편 비석 아랫 부분 마지막 글자가 이상하게 보인다.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이란 비명의 제일 마지막 글자가 다른 글자와 겹쳐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가 오면 비석의 글자가 릉(陵)에서 묘(墓)로 바뀐다는 바로 그 비석이다.



경주 문화재 지킴이인 솔뫼님을 만났을 때 비 오는 날 김유신장군묘의 비석을 한번 살펴보라고 하던 것이 생각나서
비가 오는 날 다시 김유신장군묘에 가보았는데 충분한 양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런지 글자가 다소 선명치 않다.
할 수 없이 땅바닥에 고인 물을 손으로 퍼서 글자를 적셔 보았더니 묘(墓)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가 무슨 이유로 비석의 묘비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현상은 김유신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재미을 주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 경주에 와서 김유신장군묘를 찾는 분은 이 재미있는 비석의 글씨를 더 잘 관찰할 수 있겠지만
혹 맑은 날 방문했다 하더라도 문화 해설사 분들께서 비석에 물을 부어가며 재미있게 해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다가오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선덕여왕과 관련된 경주 여행을 한번 계획해 보심은 어떠하신지...?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매회 알쏭달쏭한 문제를 제기해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더해 가는 선덕여왕.
지난 회에서는 국선 문노가 주관한 풍월주 비재의 두번째 문제인
신라의 세가지 의미를 덕만공주가 마방진에서 그 해답을 찾는데서 종결이 되었는데

33회 방송에서는 세번째 무술 비재를 통해서 누가 다음 풍월주가 될 것이냐에 촛점이 맞추어질 것 같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들어보았다면
14세 풍월주 호재를 잇는 15세 풍월주는 유신랑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는 일.

드라마에서는 비재를 통하여 풍월주를 선발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화랑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호재 스스로 유신에게 양위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풍월주의 위는 부제가 이어받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호재의 부제인 보종이 풍월주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마땅하나
보종은 유신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을 뿐 아니라 유신이 '중망(衆望, 여러 사람에게 받는 촉망)'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는데
이는 미실 궁주가 만호태후(진평왕,만명부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종이 유신에게 풍월주의 위를 양보한 것에 대원파가 불평이 많았으므로 이에 유신은 16세 풍월주의 위를 보종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누가 풍월주가 되는지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으니 문노가 주관하는 풍월주 비재의 3가지 문제가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풍월주가 될 때의 유신의 나이는 15세였으니 현재의 엄태웅과는 다소 줄이 그어지지 않는 배역이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꼬투리 잡을 마음은 없고....^^






사실 필자로서는 새롭게 풍월주에 오르는 유신랑보다는 풍월주 호재의 시대가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촬영장에서 만난 호재는 정말 화랑 중의 화랑 '풍월주'로서의 풍채와 카리스마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0화랑이 다 모인 선덕여왕 촬영장에서도 풍월주 호재 '고윤후'는 단연 빛이 난다.






풍월주 호재를 비롯해서 청룡익도의 석품(홍경인),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비천지도의 알천(이승효),
이화정도의 덕충(서동원)...등 서라벌이 10 화랑이 한곳에 다 모였으니 '이보다 더 보기 좋을 순 없다'.






서라벌 최고의 꽃미남 10화랑들이 다 진을 치고 서 있지만 그중에서도 풍월주 호재의 카리스마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앞모습은 물론이고 옆모습도 조각 미남이니 서라벌 여인네들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았을 풍월주 호재에게 딱 맞는 배역이다.






촬영 도중 가끔 이렇게 샤방한 미소까지 날려주니 현대의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 또한 함께 설레이지 않을까....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알천랑 이승효와 함께 잡힌 샷은 저절로 눈이 즐겁다.






경주 신라 밀레니엄 파크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여러번 촬영 현장을 스케치하는 동안에
이요원, 고현정, 엄태웅, 류상육, 이문식, 정웅인....등 여러 탈렌트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싸인도 받았지만
10 화랑의 촬영이 있던 날, 풍월주 호재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의 바로 앞으로 걸어왔을 때
180 이 넘는 큰 키에 광채나는 얼굴, 거기다 발 아래까지 끌리는 화려한 풍월주 의상으로 인해 완전 압도 당해버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싸인 좀 해주실래요?" 할 뻔 했다.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카메라 가방을 열고 수첩과 볼펜을 찾느라 뒤적거리고 있는데
 "자~~ 10 화랑 얼른 용인 세트장으로 이동하세요~!" 하는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필자의 앞에 서 있던 풍월주 호재, 다시 방향을 돌려 황망하게 자리를 뜨고 마는 것이다.
이런....ㅠㅠ
절실하게 '싸인 받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진 것이 처음이었는데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말다니....
아직까지도 살짝 아쉬운 부분이다.






1981 년생으로 지금까지는 시청자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 '고윤후'. 
그가 연기한 '14세 풍월주 호재'는 기해년(己亥年,579) 생으로 화랑세기에는 ' 호림공(虎林公)'으로 기술되어 있다. 

호림공은 진골정통으로 복승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지소태후의 딸인 송화공주로 알려져 있는데 
혹은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잘 알 수 없다' 고도 하고 비보랑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진평왕의 황후이자 선덕여왕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바로 호림공의 적형(嫡兄,서자가 자기 아버지의 정실에서 난 형을 이르는 말)이다.

호림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검을 쓰는 법을 익힘)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13세 풍월주 용춘공이 호림공을 부제로 발탁하였고 계해년(603년)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검소하게 지냈으며 진골 정통이었지만 골품으로 뽐내지 않았으며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아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호림공은 처음 문노의 딸 현강랑주(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어 하종의 딸 유모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유신 또한 하종의 딸이자 유모의 동생인 영모와 결혼하니 유신과 호재는 동서지간이 되는 셈이다.)
그 때 미실궁주의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유모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으므로
호림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종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고 호림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져 
풍월주의 위를 유신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호림은 보종을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으며 그들의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고
보종은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고 하니 호림과 보종의 관계는 묘한 뉘앙스가 풍겨난다.
화랑세기의 기록은 보종이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에 촛점이 맞추어지는데
미생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보종의 이력에 대해선 다음 기회가 되면 글을 쓰기로 하고...

풍월주를 양위한 후 호림공은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지만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 동일하게 알천, 임종, 술종, 염장, 유신, 보종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유(遊)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삼국유사에는 보종이 빠진 6인이 모였다고 기록)
"통일의 기초가 호림공 등으로부터 많이 시작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 통일에 유신, 알천을 비롯한 호림공의 공 또한 지대했을 것으로 볼수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14세 풍월주의 지위를 유신에게 물려주게 되는 호재(호림공).
개인적으로 바라는 바는 비록 풍월주의 위에서 물러나더라도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호재의 멋진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은 조연들의 활약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드라마이다.
얼마전 백제군과의 아막성 전투씬에서 용맹함과 카리스마있는 지도력을 보여
단연 검색 순위상위에 랭크된 알천랑을 비롯해
샤방샤방한 풍월주 호재,
카리스마 호위 무사 대남보등의
10화랑이나 미실을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는 꽃중년 설원랑,
코믹 연기를 담당한 죽방, 고도 등 드라마에서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무르익은 연기를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그 중에서도 미실의 동생으로 출연해서 매번 얄미운 <썩소>로 
시청자에게 각인된 미생(美生) 정웅인을 미실궁 세트장에서 만나 보았다.





원래 꽃미남으로 서라벌 일대를 주름잡았던 미생이 맡은 배역인지라 정웅인의 의상 또한 화려하고도 품위가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기보다 실제 모습은 훨씬 멋지고 풍채도 당당하다.





이요원,고현정,엄태웅 같은 주연급 배우들은
일반인이나 기자는 물론 스텝들에게도 사진 찍히는걸 완강히 거부하는 통에 사진 찍기가 정말 어려운데 반해
정웅인은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요청에 기꺼이 허락하고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야간이라 조명이 너무 어두워 플래쉬를 터뜨리며 몇 장 눌렀더니 
"플래쉬 안 터뜨리면 더 잘 나오는데..."하고 코치까지 해 준다...ㅎㅎ





어설픈 사진 애호가인 필자의 셔터 세례에도 정웅인은 즐겁게 여러번 포즈를 바꾸며
카리스마있는 표정, 재미있는 표정, 귀여운 표정을 번갈아 지어 주어 진정한 연기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톱스타들이 간혹 보여주기도 하는 폐쇄성 같은 것은 도무지 찾을 수도 없었고 
마치 자주 만난 옆집 아저씨같은 소탈함과 친근감을 그에게서 느낄 수가 있었다.





정웅인은 드라마 매회에서 코믹한 모습과 절제된 모습을 동시에 갖춘 미생의 캐릭터를 확실히 보여주는데
8년만에 재도전하는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연극 무대에서 다져진 안정된 연기력을 맘껏 발휘하여 
드라마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감초연기자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라며...
여러가지 즐거운 표정과 포즈로
기꺼이 초보 사진사의 모델이 되어주신 멋진 정웅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정웅인의 배역인 '라벌 최고의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던  '미생(美生)' 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화랑세기 10대 풍월주 十世 美生郞 (10세 미생랑) 편>에서 중략하고... 생략하여...  요약해 보았다.

서기 550년에 태어난 10세 풍월주 미생랑(美生郞) 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아시다시피 미생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인데 
진흥대제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은 까닭에 미생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제는 여러번 불러 입궁시켜 동륜태자,금륜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우게 하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고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공주들과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다.
이에 진흥대제가 문초하려 하자 사도황후가 비호하였고
진흥대제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미실의 명을 받아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가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라 말에 오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미진부공이 그를 화랑에서 쫓아내려 했지만 미실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문노는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 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하며 내치려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미생을 싫어했고 미생 또한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에 사다함이 곤란하였다.

미실의 남편 세종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생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서기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미생의 나이는 이미 36살이었고
3년 동안 풍월주의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니 하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미생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래 사람의 마음을 몰랐고
성품 또한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화랑도으로 있었기에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만여명이라 함) 모두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기에 유화((遊花)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고 
미생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미생을 천간성(天奸星)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거할 때도 시첩 수십인이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고 하니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고 하고
진(陳)나라의 사신은 이르기를 자기 나라에도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른바 서라벌 최고의 플레이보이라고 할 수 있다.

미생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는데 미생의 아들인 백생(白生)·월생(月生)·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고
드라마에서 미실의 호위무사로 등장하는 백호비도의 수장인 화랑 '대남보'도 미생의 아들이다.

미생이 백명이나 되는 아들을 사랑하는 정은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는데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품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어머니 묘도부인을 뵈러 갔는데 묘도부인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미생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라고 물으면
미생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주었기 때문에 여러 아들이 미생을 사모하여 따랐다.
미생은 매번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출근하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으므로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지만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미생이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생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생의 노비가 미생의 옥배를 훔친 일이 있는데 미생이 처벌하려하자
노비는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미생의 어머니 묘도부인이 미생을 보고 꾸짖어 
"노비는 수족이요,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부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현사(賢士)를 높이고 무리를 사랑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고 하였더니
미생은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 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하였더니 도둑질은 이내 스스로 그쳤다.

또 미생은 일찍이 동륜태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 다녔는데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를 맺었다.
동륜태자가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죽고 난 후 미생은 당두의 처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 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미실이 곧 미생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고 꾸짖었다.
미실의 말을 들은 미생은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자는 미생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는데 미생은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미생은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였다.
미생은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미생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미생이 조부(調府)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진평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리자 미생은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고 하였다.
당두의 처는 미생의 세 아들을 낳았는데 미생은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일을 서라벌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겼다고 한다.
미생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며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묘도부인은 사도 태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서
미생을 비롯한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미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색공지신(色供之臣: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 하였다.
미생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은 것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
.

그는 서기 60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60이었다.
..
.
.
풍족하고 부귀로운 화류(花柳)의 일생이다.
.

.

필사본 '화랑세기'는 1989년에 발견되어 오랜동안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책.
원자는 김대문인데 그에 의해 화랑세기가 쓰여진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보는 사람은 자기들이 알고있는 신라의 모습과 따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
당시에 사용하지 않던 글자들이 있다는 점등을 들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화랑세기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삼국사기 자체가 신라인 후손에 의해
유교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므로 신라사회를 미화했을 수 있으며
그밖의 다른 유물들을 볼때 화랑세기에 나타난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풍속등은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사회의 자유로운 성풍속은 성행위를 묘사하는 각종 토우들이나 성적인 장난감, 삼국유사의 직접적인 성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 이후 유교의식에 젖어 있던 우리네 상식으로는 여성의 지위가 생각 외로 높았던 신라 사회와 
조선에 비해서 너무나 자유로웠던 신라사회의 성의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든 아니든 화랑세기에 그려져 있는 10대 풍월주 화랑 미생은
드라마에 비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간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여자와 돈을 밝히고 향락에 치우친 불성실한 인간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의리 빼면 시체인 
전형적인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선덕여왕 촬영장 '신라 밀레니엄 파크 화랑 산채' 에서 연예 전문 케이블 ETN 팀들을 만났다.

미실궁 세트장에서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고 있기에 
누구를 취재하느냐고 물어보니 '류상욱'을 기다린댄다.


얼떨결에 "아...네...그러세요..^^"하긴 했지만 도대체 감이 오지 않는다.
류상욱...??  누구지...?





한참 있으니 미실 고현정의 뒤를 따라 한 화랑이 나타났다.

아름답게 꾸민 미실 고현정의 자태야말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화랑을 보니 눈이 확 뜨인다.
아니....이 훈훈한 꽃남은 도대체 누구냐...?





아하.....이 화랑이 류상욱인가 보다...하고 감을 잡은 필자.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하니 여느 주연급 연기자들처럼 카메라를 피하지 않고 멋쩍은 듯 포즈를 취해준다.

맡은 역할이 뭐냐고 살짝 물어보니 '미실 호위 무사'랜다. 오호.....





미실의 호위 무사답게 촬영장에서 미실이 이 화랑에게 베푸는 관심은 따스하게만 보이는데.....
이들을
쳐다보는 백상승 경주시장과 이요원의 표정이 대박이다.





덕만 이요원까지도 친절하게 손들어 인사하는 훈남의 파워는 역시.....ㄷㄷㄷ...





이 화랑의 정체는 선덕여왕 13회(7/6 월요일 방송분)에서 공개되었는데

미실이 사다함 나무 아래에서 사다함을 추억하고 있을 때 미실의 동생 미생이 한 화랑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는 곧 미생의 100명의 아들 중 가장 무예가 뛰어난 인물로 백호비도의 수장인 화랑 '대남보'
대남보에게 미실은 "넘어서거라...보종을 넘어서거라..."고 말하며
자기 아들 보종에 대한 신뢰를 대남보에게 옮겨 버리는데 그 장면을 숨어서 보고 있던 보종은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 이후부터 그림자처럼 미실을 따르는 대남보를 드라마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회가 거듭해 갈수록 긴박감이 더해지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신라 밀레니엄 파크'의 '김유신 화랑 산채 촬영장'에서 '드라마의 <재미>를 담당한' 빅 콤비 이문식,류담을 만났다.


사기 치다가 얼떨결에 김유신이 이끄는 용화향도에 들어가게 된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은
살벌하기까지한 선덕여왕의 정치판에서도 간간히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맛소금과도 같은 존재랄까?
 

정극 도전이 이번이 처음인 류담은 2003년 KBS 18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개그 콘서트 '달인'코너에서의 활약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류담은
 
늘 어리버리한 행동 끝에 죽방에게 머리통을 얻어맞느라 머리가 성할 날이 없는 캐릭터.

원래 100kg이 넘는 거구이지만 두사람 정도는 거뜬히 들어올리는
고도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기 위해 더욱 뚱뚱하게 보이는 분장을 했다.

흙탕 투성이인 옷을 입었는데 깨끗한 옷보다 사진발이 훨씬 더 잘 받는것은 대체 무슨 조화..??


촬영이 잠시 멈추면 메이컵 아티스트의 손길은 분주하기 그지 없다.
좀 더 촉촉하고 좋은 그림을 위해 분장을 고치고 스프레이를 뿌려주어 수분을 공급한다.
김유신 아역 이현우도 제법 키가 큰데 워낙 한 덩치 하는 유담 곁에 있으니 더 아이 같아 보인다.


"어...시원하다~~! 역시 배우 하길 잘 했다니까...."
계속되는 촬영으로 힘든 중에서도 밝은 표정을 지어 주변의 사람들을 기분좋게 한다.


죽방고도의 주축은 단연 연기파 배우 죽방 이문식.
마파도, 오브라더스, 공공의 적, 달마야 서울 가자, 다모, 황산벌.....등 여러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어
2008년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 시트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연기파 배우 이문식은 류담과의 콤비 플레이를 위해서 현재 자진해서 감량 중이다.


100kg 넘게 나가는 류담과 '훌쭉이와 뚱뚱이'컨셉을 맞추기 위한 감량이어서
식사를  할 때에도 일부러 젓가락만 사용해서 밥을 반만 먹는다고 하는데...


시청자에게 '죽방 고도 투 샷'에 어울리는 좋은 구도를 선사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한다.


특히 SBS 드라마 '일지매'에서는 극 중 감초같은 일지매 이준기의 양아버지 쇠돌역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치과를 찾아 생니를 뽑았다고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작진은 깜짝 놀랐고, 나중에 앞이를 뽑게 되는 사연을 대본에 추가로 반영해 이문식 씨의 연기투혼에 보답했다.
이 때문에 이문식은 촬영 초반에는 오히려 의치를 끼고 연기를 해야했고, 드라마 촬영 후 임플란트를 했다.

연기를 위하여 머리를 미는 장면을 연기 투혼이라며 칭찬을 자자하게 하는 것은 간혹 보았지만
연기를 위하여 다시 나지도 않는 생니를 뽑다니.....그의 연기 투혼에는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촬영장에서 본 이문식은 조연이라고 하지만 도리어 주연의 포스를 가지고 연기에 임한다.


실제로 감독조차도 이문식을 '형님'이라고 호칭하며 예우도 깍듯하게 하는 등 촬영장의 큰 형님으로써 드라마의 분위기를 주도해 가고 있었다.


촬영장에서는 드라마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서 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번에 걸쳐서 찍게 된다.
그 때마다 이문식은 NG도 거의 내지 않고 감탄할 만큼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다.

선덕여왕 촬영장 '신라 밀레니엄 파크' 바로 가기

주연보다 더 빛이 나는 이문식..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연기자'라고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소 긴장되고 삭막한 드라마에서의 긴장감을 해소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죽방 고도' 이문식과 류담.
훗날 덕만이 공주가 되어서는 죽방 고도는 덕만의 호위무사를 맡는 영광을 거머쥐게 된다는데.....
앞으로 드라마 전개 속에서 신선한 웃음을 끊이지 않게 공급할 그들의 연기를 기대해 본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루비™

,


날이 갈수록 점점 흥미가 더해지는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은
용인에도 촬영 세트장이 있지만 많은 분량의 야외 촬영이 경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역사적 무대가 서라벌인지라 경주의 여러 지역에서 야외 촬영을 하게 되는데

특히 보문 단지에 위치한 '신라 밀레니엄 파크'에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 '미실궁',  '김유신 화랑 산채' 등이 새로 지어져
기존에 있던 신라 민속촌인 '천년 고도'와 '화랑 연무장'과 함께 드라마 촬영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았다.


선덕여왕 촬영장 '신라 밀레니엄 파크' 바로 가기




그 중 '김유신 화랑 산채'는 천명 공주가 김유신을 위해 특별히 제공한 용화향도의 수련 장소이다.






이제 성인이 된 덕만이 본격적인 화랑 수련을 통해 강인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만큼
선덕여왕에서 김유신 화랑 산채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선덕여왕 9회분 촬영을 위해 엄태웅이 드디어 화랑 산채 촬영장에 나타났다.

맡은 역할이 주연급이지만 자신의 씬을 찍을 때만 등장하기 때문에 주연급 연기자라도 연기하는 시간 보다는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많은데
대부분의 조연이나 보조 연기자들이 쉴 때 땅에 그냥 앉아서 쉬는 반면 이요원이나 엄태웅 등 주연급 연기자들에게는 편안한 전용 의자가 주어진다.





대기하면서 다른 연기자들의 촬영분을 보는 엄태웅의 얼굴에도 간간이 미소가 띄어진다.  훈남의 미소는 보는 이의 기분까지 밝아지게 하는구나...!






대기하고 있는 엄태웅에게 싸인 한장 부탁해 보았다.
 




이미 많은 싸인에 숙달된 듯....슥슥슥....아주 빠른 속도로 싸인을 하더니 건네준다.






"루비의 정원!! 행복하세요. 엄태웅"

위에 쓰인 글씨가 무어냐고 물으니 그것 또한 엄태웅이란다.
아무리 봐도 어디가 엄태웅..? ㅎㅎ 뭐....글씨를 못 알아 먹으면 어떠냐~!
서라벌 최고의 훈남 '김유신' 엄태웅의 싸인인 것을...! 거기다 행복하라는 멘트까지.....^^





촬영장에서 기다리거나 연기하는 엄태웅의 사진은 찍기가 쉽지 않았다.

비싼 몸이기도 하지만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찍는 씬이 많다보니....
이요원씨처럼 카메라를 보고 편안하게 한번 웃어주는 서비스를 해주면 여성 팬들의 환호를 한 몸에 끌어 모을텐데....
카메라를 쳐다 보지 않는 바람에 제대로 된 샷이 없어서 김유신 역 엄태웅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미리 느껴보기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필자를 비롯해서 엄태웅의 멋진 미소를 기대하시는 팬들은
엄태웅의 오늘 저녁 9시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정면 '크로즈업 샷'을 확인하시길 바란다.

선덕여왕 홈페이지 바로 가기

카리스마 작렬하는 미실의 계략에 맞서 덕만 공주 이요원의 숨은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하는 지혜와 용맹의 상징 김유신.
아역 김유신의 만번 검을 내리치는 훈련 장면에서 보여 주었던 것 처럼
우직하지만 끝까지  덕만 공주를 지키는 서라벌 최고의 훈남 김유신으로 다시 태어날 엄태웅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은 방영 7회에 이르러 
30%에 육박하는 고시청율을 달성하며 나날이 승장구하고 있는데.....

드라마 제목이 '미실'이 더 적당하지 않냐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여기저기서 나올 만큼
미실 역 고현정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초반세를 몰아가더니
이후 등장한 아역들의 열정적인 연기는 동시간대 경쟁 프로그램을 단숨에 기선 제압하는 큰 역할을 해내었다.

주인공 덕만 역 남지현의 당차고 열정적인 연기는 물론이고 신세경, 이현우 등 아역들은
성인 연기자 못지 않은 탄탄한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드라마의 인기를 높였는데
이제 8회를 마침으로 아역 연기자 시대는 지나가고 이요원, 박예진, 엄태웅 등 성인 연기자들이 드디어 배턴을 이어받게 되었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 김유신 화랑 산채 촬영장'에 드디어 이요원이 나타났다.

처음 만난 이요원은 산채 앞 의자에 다소곳이 두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김유신의 이끄는 '용화향도'의 화랑의 차림새로......





비싼 몸값의 이요원인지라 사진 찍기가 그리 쉽지 않았지만 양해를 구한 끝에 몇 컷 찍을 수가 있었다.





의자에 똑 바로 앉아 단아하게 미소를 띈 모습으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선덕여왕 타이틀에 나오는 금관 쓴 선덕여왕에서 본 이요원과는 또 다른 이미지이다.






타이틀에서는 금관을 써서 그런지...타이틀 롤이라 크게 표현해서 그런지... 얼굴이 약간 크게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얼굴이 작고 이쁘다.

생각보다 분장을 아주 가볍게 했다. 거의 화장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거의 생얼이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웃어달라는 주문에 살포시 미소도 띄어준다.

지금은 아직 남장 중인지라 화랑의 옷을 입고 있는데 앞으로 여왕으로 등극한 후의 차림이 궁금하다.
지금은 미실 역 고현정이 최고로 아름답고 호화로운 차림을 하고 있지만
이요원이 선덕여왕의 분장을 시작한다면 최고의 미인 미실의 아름다움도 빛이 바래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촬영 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다 아차....! 싸인 한장 부탁했더니 이쁜 글씨로 싸인도 해 주었다.






곧이어 시작된 촬영.

말구유의 물에 얼굴을 담그었다가 허리를 펴면 아역 덕만이 성인 덕만으로 세월이 건너 뛰는 장면의 촬영이 여러번 계속되었다.
아역 덕만 남지현은 마지막 연기라서 그런지 더욱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게 눈에 보였다.





아역 연기자가 연기를 너무 잘하면 성인 연기자의 부담은 클 수 밖에 없는데....






남지현이 연기한 똘똘하고도 당찬 덕만의 캐릭터를 이요원이 어떻게 이어받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요원은 어린 덕만의 캐릭터를 잘 이어받아 향후 드라마를 주도할 수 있을른지......

카리스마 넘치는 선덕여왕의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무거운 짐이 양 어깨에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요원의 표정은 환하다.

선덕여왕 역할의 긴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만큼 시청자들을 사로잡을만한 연기를 보여 주고
미실에게 대적할 만한 아름다움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선덕여왕'으로 거듭나는 이요원이 되길 기대해 본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Posted by 루비™

,


역사적 주인공의 일생을 그리는 사극 드라마는
극의 특성상 아역들이 출연하는 부분이 드라마의 전반부를 장식하게 되는데

극의 초반에 등장하는 아역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 또한 사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번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경우도 선덕여왕 덕만의 아역을 맡은 남지현의 똑 부러지는 당찬 연기와
천명공주 아역 신세경의 외유내강의 연기가 어울려 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이는데 일조를 하였는데
덕만 역의 남지현과 천명 역의 신세경 못지 않게 주목을 끄는 아역이 또 있으니 
바로 김유신 아역으로 출연한 이현우이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의 '천년고도'를 걸어오는 한떼의 화랑들을 만났다.

화랑 김유신이 이끄는 용화향도.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뜨이는 앳된 용모의 화랑 김유신, 이현우다.



걸어오는  길목에 세우고 셔터를 눌렀다.
물기 머금은 눈, 귀티 나는 이목구비,  흠잡을데 없는 외모가 화랑 김유신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진다.
 



수줍은 듯 잠시 포즈를 취하고는 촬영장으로 들어가는 이현우.
미소를 흘리며 고개 돌리는 옆모습은 흡사 유승호가 아닌가..
셔터를 누르는데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흔들린 사진이 되었지만 삭제해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사진이라 올려보았다.



이현우...

처음 등장했을 때 앳되고 풋풋한 인상이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했더니
이미 여러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아역으로 출연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돌아온 일지매에서는 차돌이 역, 태왕사신기에서는 이필립이 열연한 처로의 아역,

드라마 로비스트에선 송일국 아역, 대왕 세종에서는 충녕대군 아역 등 대부분 주인공의 아역을 독차지 했는데
이번 선덕여왕 덕만 역의 남지현과는 로비스트, 대왕 세종에 이어 세번째로 상대 아역을 맡게 되는 뗄래야 뗄수 없는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선덕여왕에서도 김유신의 아역을 꿰어참으로 인해 누나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이현우.

너무 앳되어 보이는 용모 때문에 처음엔 중학생인 줄 알았더니 1993년생으로 현재 평촌고등학교에 재학중이란다.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본 이현우는 고집스러울 만큼 성실한 이미지의 김유신 아역 답게 호
소력 있는 눈빛 연기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비록 아역인지라 몇 회 나오지 않고 성인 김유신역인 엄태웅에게 대본을 넘겨주고 8회에서 하차했지만
앞으로 다른 드라마에서 또 다른 배역으로 이현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역으로 인기를 한몸에 모으다가 커서는 어릴적의 외모을 상실해서 팬들의 실망을 안겨주는 아역들이 종종 있지만

아역 출신 중에서도 '잘 자란 아역'을 꼽으라면 단연 유승호가 아닐까?
이제 아역이 아닌 성인 배역 김춘추의 역할을 맡아 곧 이어 등장할 유승호가 매우 기다려 지는 가운데
이현우 또한 유승호의 뒤를 이을 '내일의 꽃남'으로 '잘' 자라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수많은 누나 팬들의 선망의 대상인 유승호를 따라잡을 만한 재목 이현우,
앞으로 그의 행보가 궁금하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