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이다.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으로 이 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밧모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이 곳에 있는 동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밧모섬 여행자들 중에서 한국인을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에게해 한가운데 있는 밧모섬을 가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틀은 잡아야 하니
섬을 둘러보는 시간에 비해 오고 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이유로
인해 
밧모를 방문한다는 것은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밧모섬으로 가는 길은 보통 두가지가 있는데 그리
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밧모까지는 약 10시간 정도 걸리고
터키의 쿠샤다시 항구에서 밧모로 가는 항해는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필자는 에베소를 둘러 본 후에 쿠샤다시에서 하룻밤 경유한 후 아침 일찍 소형 선박(거의 유람선?)을 타고 밧모로 가기로 했다.
밧모에서는 사도 요한의 유적지와 섬 전체를 돌아본 후 대형 크루즈선을 타고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리스 고린도의 피레우스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면 터키와 그리스 국경을 넘어가게 되므로 항구 내 출국장에서 여권 검사와 짐 검사를 마친 후 배에 올라야 하는데 터키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나라여서 밧모로 가는 여행객은 거의 없으므로 소형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다. 

 


쿠샤다시항을 출발하니 이내 비둘기섬이 나타난다.
쿠샤다시 여행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이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매우 맑고 파도가 거의 없어서 항해는 순조로왔고 젠틀하게 생긴 선장의 나이 지긋한 모습을 보니 더욱 더 안심이 되었다. 일기가 고르지 못하거나 파도가 높은 날에는 소형 선박은 아예 운행을 안한다고 하니 그리스 여행의 시작은 아주 운이 좋은 출발이다. 

 

 

배는 터키 국적인 유람선인지라 선박 후미에 터키 깃발이 붉게 휘날리고 있다.  

 


쿠샤다시를 떠난지 얼마 안 되어 큰 섬이 나타나길래 벌써 밧모섬? 했더니 사모스섬이다.
터키의 항구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아 계속 여기 저기 크고 작은 섬이 나타나는데 터키 바로 옆에 위치한 섬들은 놀랍게도 거의가 그리스의 영토이다.
제법 큰 섬인 사모스(Samos)섬, 또한 터키의 영토였으나 1912년 그리스에 합병된 상당히 큰 섬이다.
터키 사람들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코 앞의 섬들이 그리스의 영토라는데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강렬한 태양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맑고도 푸른 에게해를 헤치고 5시간을 가니 드디어 저 멀리 목적지 밧모섬이 나타난다. 
오랜 시간 배에 있어 지루해하던 승객들은 모두 갑판에 나와서 멀리 보이는  밧모섬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른다. 

 

 

나무도 거의 없이 바위와 화산석으로 뒤덮인 섬에 가까워지니 별것도 아닌 섬이네.....이런 생각이 일순간 들지만 
섬 주변을 유유자적하는 요트들에서 평화로운 느낌이 피부로 전해져 온다. 

 

 

푸른 나무로 뒤덮인 우리나라의 섬들과 달리 밧모섬은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섬이라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섬의 아랫부분에서부터 높지 않은 정상까지 여기저기 집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집들은 대부분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섬에 가까워질수록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솟아 있는 붉은 성 요한 수도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스칼라 항구가 가까워지고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집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방파제도 제대로 없는 그야말로 작은 항구로 배가 들어가는데....

 

 

이런 작은 항구에 대형 크루즈선도 들어온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부분이다.

 

 

섬은 지극히 조그마한데 여름에는 유럽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이 곳에서 휴가를 보낸다. 

 

 

호화 요트에서 소형 요트까지 즐비한 이곳은 유럽 사람들의 꿈의 휴양지이다. 
주민이 2500명 밖에 안 되는 이 섬에 유람선과 요트는 물론이고 수만톤 급의 크루즈선도 정박하니 이 섬의 명성은 크기로 짐작할 일이 아닐 듯 하다. 

 

  

항구 옆 메인 스트리트에는 좁은 섬의 지형에 알맞게 오트바이가 많이 주차되어 있고 다운타운을 거니는 여자들의 자유분방한 차림과 핫한 몸매에서 섬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다운 타운 골목의 상가에는 아름다운 보석 및 악세사리 가게가 줄을 지어 있고 기념품 상가도 많이 들어서 눈요기거리를 준다. 

 

 

항구에서는 제일 먼저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의 세례터'를 찾아 보았다.

 

 

AD 96년 이 곳에 도착한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장소이다. 

 

 

바로 옆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기념 교회가 있다. 

 

 

사도 요한의 세례터 앞에서 보면 스칼라 항구의 전경이 그대로 보이고 성 요한 수도원도 멀리 다 보일 정도인데
밧모는 면적은 매우
좁지만 섬이나 해안선이 드나듦이 거의 80km나 될 정도로 구불구불한 섬이다.  



해변의 바닷물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해초도 거의 없어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이 곳은 태양 광선이 너무 강렬하여 플랑크톤이 잘 서식치 못하여 해변엔 고기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고
염도가 낮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도 몸이 전혀 끈끈하지 않고
몸을 말린 후 손으로 비비면 피부가 보송보송하니......정말 신비롭고 환상적인 바다이다. 

 

 

항구 바로 옆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바닷물의 오염이 적은데 이 섬의 구불구불한 어느 해안 한 구석에는 '누드 비치'도 있다고 하니  밧모에 가시는 분들은 그곳도 찾아본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휴가가 될지도.....^^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화려한 요트와 에게해 크루즈선들이 늘어서 있는 해안을 통해 그리스 및 에게해의 다른 섬들로 연결이 되는 도시인 터키 쿠샤다시(Kusadasi).

 

 

반짝이는 아름다운 바다와 드넓은 백사장,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크루즈선들의 정박으로 인해 유럽인들이 즐겨찾는 이곳은 터키의 에게해 연안의 휴양 도시 중에서도 규모와 시설이 손꼽히는 리조트 도시이다. 
 

 

예전에는 거대 유적 도시 에베소(에페스)로 가는 경유지에 불과했던 이곳은 지금 수십개의 관광 호텔과 휴양촌이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레스토랑과 나이트 크럽은 나날이 증가하는 많은 관광객들로 그득하여 유럽의 여느 도시보다 더 북적거리는 곳이다.  

 

 

쿠샤다시 입구에 위치한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작은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우리 같으면 보존한다고 일반인의 통제를 막았을 텐데....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쿠샤다시의 호텔에 짐을 풀고 배터리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으니 빨간 불이 점멸하며 이상 증상을 보인다. 아무래도 고장인 것 같이 생각이 되어 하나 새로 살 겸 쿠샤다시 다운타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SUV차량 처럼 생긴 택시를 불러서 타고 바자르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바자르 입구에 도착하니 이즈닉 타일로 장식된 공동 수도가 먼저 반겨준다. 이슬람 교도들은 정결 의식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은 물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꼭 공동 수도가 있다.
 

 

터키도 여느 유럽과 같이 서머 타임을 실시하므로 여름엔 9시나 되어야 해가 지는데  리조트 도시인 관계로 바자르에는 낮보다는 밤에 손님이 많아 낮시간에는 비교적 한산하다.

 

 

휴양 도시인만큼 유럽이나 터키 전역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아 길에 앉아 노닥거리는 사람이 많다.  

 

미용실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남자들은 머리 하러온 여자 친구나 아내를 기다리는 듯..... 

 

 

이곳에서도 역시나 패스트 푸드점이 대세인 듯 거리에는 버거 킹, 프라이드 치킨집....등이 보이는데

 

 

터키의 청소년들은 주로 패스트푸드점 2층에서 밀회를 가지곤 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각처에서 오는 여행객들이 들끓는 곳이라 옷차림이나 애정 표현이 비교적 자유롭다.

 

커피나 아이스크림, 쥬스 등을 파는 카페도 성업 중인데 아이스크림은 1유로 정도이다.

 

 

바자르의 좁은 골목에 밀집한 상가들은 우리네 재래 시장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데 물건의 진열 상태도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으며 기념품가게들에는 마치 우리나라 관광지에서처럼 조잡한 물건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해적판 게임 CD와 유희왕 카드 같은 것을 파는 좌판을 지키는 꼬마는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주목받는 도시인 쿠샤다시의 부동산 가게에는 매물의 사진과 가격들이 유리에 빼곡이 붙어있다.  

 

 

환상적인 맛의 터키 케밥집의 다양한 메뉴가 눈에 확 들어온다. 

 

 

관광 안내용 모니터인 것 같은데 역시 우리네와 같이 무용지물인 듯.... 아무도 안 쓰는지 앞에 자전거와 모터 사이클이 주차되어있고 낙서만이 노란 페인트 위에 선명하다.

 

터키 사람들은 춤추고 노는 것을 무지무지 좋아하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디스코텍이나 가라오케가 빠지지 않는다. 이 곳에는 우리나라 처럼 관광 버스 춤도 성행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디스코텍도 터키에 있다고 한다. 

 

 

여러가지 색으로 무질서하게 간판이 난립한 것도 우리 나라와 비슷한데 네거리에 위치한 귀금속 가게 근처에서 카메라 전문점을 찾아냈다. 
 

 

카메라 용품점 안에는 디카가 많이 진열되어 있고 관광지라 일회용 카메라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온 손님이 마시고 간 차이 잔이 얌전히 놓여 있는데 터키에서는 손님에게 차이 한잔 대접은 기본이다.

 

다운타운 한가운데 있는 복합 상가로 추정되는 건물은 터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 

 

각양각색 간판들이 조그만 점포나 사무실마다 들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다. 
  

 

호텔 셔틀 버스로 추정되는 차에 손님이 오르고 있는 모습은 쿠샤다시에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지중해에 가까운 쪽이라 야자수가 가로수로 자라고 있고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라 고급차가 많고 사람들의 행색이나 집들도 모두 깔끔하다.  

 

 

횡단 보도도 중앙선도 없는 길에는 차는 차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갈길을 간다. 

 

 

거리 뒷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니 주차 수준은 우리 나라와 비슷해 보인다.  

 

 

세 시간 정도 다운타운을 돌아보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식사를 한 후 쿠사다시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나왔다.
낮에는 길도 잘 모르고 열기가 장난이 아니라서 택시를 타고 왕복했는데 9시쯤 되니 한낮의 더운 기온도 식어 한결 시원해진지라 해변 구경도 하면서 걸어서 바자르까지 갔다. 

 

 

다운 타운의 상점은 크루즈선을 타고 부두에 도착한 수많은 승객을 상대로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길거리에는 터키인과 유럽인들이 한데 섞여  마치 인종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쿠샤다시는 남녀의 차림새가 이스탄불 다음으로 세련되었던 곳이었는데 가는 곳 마다 훈남, 훈녀가 득시글거린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넘쳐나고 모두 밖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음식을 즐기고 있다.  

 

 

길거리에 앉아 전통차 '차이'를 마시는 모습은 터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람 다니는 길에 아무 생각없이 놓여있는데도 테이블과 의자들을 다들 잘 피해다닌다.
 

 

음식점의 입간판들이 길에 버젓이 나와 있는 걸로 보아 간판에 대한 규제는 별로  없는 듯 하다. 

 

 

레스토랑에 앉은 사람들은 남녀 모두 축구를 보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는데 축구는 터키에서는 공통 언어여서 남녀 노소 다 축구를 모르고는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이라고. 

터키 전역에는 약 200 여개의 프로 축구팀이 있는데 축구 리그는 3 부로 되어 있어 거의 매일 축구 경기가 있기 때문에 터키 전국민이 축구와 함께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집마다 다 TV가 있지만 모두 카페에 모여 축구를 보는데 이는 우리처럼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질러가며 축구를 보는게 더 신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여행객이 주고객인 쿠샤다시의 바자르에는 갖가지 상품이 넘쳐나는데 우리 나라로 치면 "골라 골라 만원 샵" 정도인 "Everything is  10 Euro"라는 카피도 눈에 뜨인다.

 

유럽 관광객들은 여자나 남자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렇게 동네 장에 나온듯한 편안한 옷차림의 유럽 아줌마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이슬람이 대부분인 터키이지만 검은 머리에 스모키 메이크업을 진하게 한 터키 여자들도 이곳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거나 어깨를 노출한 정도의 옷차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터키 여자들이 미니 스커트나 핫 팬츠로 다리를 노출한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유럽이나 터키에서는 상체 노출보다 하체 노출이 더 심한 노출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 여성 여행객들이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미니 스커트 등을 입으면 좋지않은 추파와 야유의 대상이 되든지 위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대형 크루즈선들이 매일 정박하는 자유로운 도시 쿠샤다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되니 안심해도 된다.  

 

 

선물 가게에 들어가 보니 특히 터키 도자기의 화려함과 퀄리티는 상상 이상이다.

 

 

길 양쪽에 빽빽하게 들어찬 관광상품점들은 가게의 규모도 대단하고  상품도 질도 상당히 높다.  가게마다 화려하고도 특이한 장식품들이 즐비하여 사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면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터키의 대표적 기념품은  파란 눈알이 그려진 장식품  '나자르 본주(Nazar Boncugu)'이다.

 

이것은 파란색 바탕으로 된 유리에 까만 눈이 그려진 일종의 부적인데
열쇠 고리, 키 홀더, 목걸이, 팔찌....각가지 형태로 다 있다.

 

 이블 아이(악마의 눈)라고도 하는 나자르 본주는 가장 강력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들을 도망가게 하며 타인의 질투나 질시를 빨아들여 주위의 재난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녀서 터키의 대부분 집의 들어가는 입구나 상점의 문 옆에는 어김없이 이것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념품 중에는 <의외로> 인물의 초상도 보인다. 이슬람 국가에선 예로부터 인물의 초상이 절대 금지되어 있어서 왕들 조차도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림이란 것은 오직 책의 삽화일 때만 존재할 수 있는데 이는 신성화, 우상 숭배의 염려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왕들이 자신의 권세와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책 삽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얼굴로 넣는 것이었는데
그런 책을 몇 권을 제작했느냐가 왕의 권세를 증명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후대 왕들이 취임하면 전의 왕들의 책들에서 얼굴만 자신의 얼굴로 갈아치우기도 했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얘기임)  

 

 

이렇게 다양한 냉장고 자석이 많은데 왜 안 사왔지....여행지의 냉장고 자석 콜렉션이 취미인데 고르다가 못 사온 것이 내내 아깝기만 하다.    

 

 

 식료품 가게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터키 젤리가 눈에 뜨인다. 터키 젤리는 달콤하고 완전 죽이는 맛이다.  

 

 

 피파 스폰지밥 스파이더맨 등....익숙한 게임들이 눈에 띈다. 4개에 30유로.....20파운드....50 예니터키리라이고 테스트 해보고 사 가란다. 음반가게에서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의 음반을 달라고 하니 'Tarkan' 베스트 앨범을 추천해 주어서 처음으로 Tarkan을 처음 알게 되고 팬이 되었는데 CD의 값이 유달리 싼 것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나중에 들어보니 불법 다운로드 복제 CD였다...ㅎ

 

 

터키의 대부분의 아파트는 주상복합이 많았다. 이슬람사원마저도 1층에는 바자르로 세를 주는 경우가 허다한데 바자르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사원을 운영한다는데 심지어 가장 큰 사원인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에도 수백년 전부터 모스크 아래에 '아라스타 바자르'라는 바자르가 있어서 사원의 수입을 충당하기도 했다고. 

 

 

 

 늦은 시간이지만 가게는 낮보다 오히려 손님이 많다.
 

 

 터키는 가는 곳마다 보석 가게가 널려 있는데 특히 금은 세공품이 주를 이룬다. 터키에서 남편들은 늘 아내에게 보석을 선물하는데 아내가 걸친 고가의 보석은 남자의 부를 상징한다고.....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에 갔을 때에 보석 가게 앞에서 거울을 보며 뺐던 귀걸이를 다시 끼우고 있었는데 보석 가게 남자가 필자가 하고 있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무슨 보석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이건 이미테이션"이라고 말했더니 그 남자는 "왜 당신의 남자는 당신에게 이미테이션을 사주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도 보석 가게 남자는 앞에 선 여자가 돈이 너무나 없는 불쌍한 여행객으로 보였으리라.... 

 

우리 나라 사람이 유럽이나 다른 곳에 가면 일본에서 왔냐고 먼저 물어보지만 터키에서는 보면 한국인이냐고 먼저 묻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카펫가게 아저씨는  필자가 코레에서 왔다고 하니 어느 도시에서 왔냐? 서울? 대구? 부산? 하며 말을 걸었다. 20년 전에 부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던 이 아저씨는 한국말도 '쬐끔' 한다.   

 

 

바자르 뒷골목으로 가면 유난히 타투나 피어싱을 하는 가게가 많다.

 

 

이슬람과 타투라...영 줄이 안 그어지는 조합이지만 이곳은 여행객들이 주를 이루는 도시라 그런지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나는 곳이다.  

 

 

뒷골목에서는 조명이 밝지도 않은 곳에서 길거리 문신질을 하고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다. 

 

 

헉....도인을 방불케하는 옷차림과 등과 팔에 문신을 새긴 사람 발견. 터키 전역에서 이런 사람 처음 보았는데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가보다. 

 

유럽 관광지는 밤이 되면 길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이 무지 썰렁하던데 여긴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줄어들지 않고 점점 흥청거리고 청소년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닌다.

 

이슬람 신자가 대부분인 터키지만 이곳 쿠샤다시에서는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밤이 너무나 아름다운 젊음과 정열의 도시, 이곳은 터키의 '쿠샤다시'이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터키의 작은 도시 셀추크(Selcuk)는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유적지 에베소(에페스,Efes)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에베소 도시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127개의 기둥이 있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졌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고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 등 기독교 유적들도 남아 있는 곳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너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를 찾아가 본다. 

 

그리스 밧모섬 사도요한기념수도원의 요한&nbsp;모자이크화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 주셨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옆에 있던 요한에게 자기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으므로 그 때부터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고 마리아의 말년까지 보살폈다.(요한복음19:26-27)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 당시부터 네르바 황제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는데 교회 사학자 유세비우스(Eusibios)에 의하면 AD 37년~42년 사이에 있었던 헤롯 아그리파의 박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에 요한도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에베소로 왔다고 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황제의 독약과 뜨거운 기름통에 던져지는 심한 박해 속에서 살아났으며 밧모섬의 극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내며 요한 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의 향년 95세였다.


사도 요한의 유해는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는데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축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황제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로 증측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퇴락하였고 일부 유적만 복구된 상태에 있는데 이곳에서 개종하고 회개한 유대인과 이방인에세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소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리석 바닥의 십자형 구멍에 물을 끌어들여 세례를 주던 이곳은 초대 기독교 이래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져왔다. 

 

 

사도 요한 교회는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에는 자미(이슬람 사원)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무너져 쌓여 있는 돌덩어리에는 그 당시 새겨진 묘한 낙서들도 간혹 눈에 뜨인다.
우리 나라의 고누와 같은 놀이판이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확실한 것은 그 당시 사람만이 알 일이다.

 

 

사도 요한 교회의 유적 뒤로는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자리잡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방문할 수가 없다.

 

 

사도 요한 교회는 너무나 퇴락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고 축소 모형에서 원래의 웅장했던 규모와 아름다움이 짐작될 뿐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도 요한 교회 언덕 위에 서니 아래로는 마을의 한적한 전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마을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기둥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이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인 크로이소스가 BC 550년경에 지은 이 거대한 신전은 어마어마한 크기(약 55×110m)로 인해 고대 7대 불가사의에 올랐는데 높이 19m에 지름이 1.2m나 되는 무게 24톤의 기둥이 127개나 있었다고 하고 신전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이 즐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거대한 신전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원했던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미치광이가 BC 356년 불을 질러 소실되었는데 그후 재건되고 다시 지진등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구되기를 7번, 결국은 더 이상 복구되지 않고 무너져 내린 기둥들은 교회나 궁궐 등을 짓는데 실려나가서 오늘날은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형편이다. 
한 때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랭크되었던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든 현장을 그 당시 사람들은 예측이나 했을까....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걸어서도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 터키 셀추크(Selcuk).
이 작은 도시에는 에베소 고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에베소 박물관,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성 요한 교회,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
제 2의 샤프란 블루라고 불리우는 오래 된 쉬린제 마을.....등등
돌아보기도 벅찰 만큼 엄청난 유적이 산재해 있으니 현재의 규모만 보고 결코 작은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듯...... 

그 중 우리의 주목을 받는 에베소(에페스,Efes) 도시 유적은 버가모(베르가마,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에베소(에페스)는 소아시아의 수도일 뿐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기원전 11세기, 그리스에서 온 이오니아인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도시는 비옥한 토지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에게해 연안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항구가 토사로 묻혀져 가고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서 현재의 장소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였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 가면서부터인데
수많은 국제 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도시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으므로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2,3차 선교 여행 때 이 곳을 방문했고 세번째 선교 여행 때에는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2통의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다. 

 

에베소 유적지 입장권

                                                                                                                                               

터키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가장 큰 에베소 도시유적지는 하루의 일정을 잡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인데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편하다.
유적은 드넓고 볼거리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바캉스 시즌에는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특히 여름에 돌아보려면 시원한 물과 모자, 선글라스는 필수품인데 안 그러면 금방 지쳐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누가 복음을 쓴 '누가의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비록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의 일부만 보이나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고
이 후 비잔틴 시대에는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길에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하였다고 한다.  
누가의 묘에는 한국어 안내판도 있었는데 에베소에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터키어 안내판은 없었다...^^)  

 

 

 약 1400명 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오데이온(음악당)'은 보통의 야외 극장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상부에 지붕이 덮여 있었는데 연극 공연 뿐 아니라 회의장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오데이온' 앞에 있는 이 붉은 토기관들은 서로 이어져 로마 시대의 상수도관으로 쓰인 것들이다. 

 

 

'오데이온'과 '국영 아고라' 사이에는 '바실리카(성당)'의 흔적이 있다.
이 곳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의 석상이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에 국영 아고라의 북쪽 광장문이던 것이 바실리카가 되었다. 

 

 

오데이온 옆에는 바리우스의 목욕탕 유적이 있다. 

 

 

목욕탕 유적을 돌아보는 수많은 각국의 관광객들로 이 곳은 가히 인종의 전시장이다. 

 

 

목욕탕은 폼페이와 같이 온돌형 구조로 되어있는데 우리 나라 사우나와 비슷하다고 한다.
로마 시대 목욕탕은 냉탕,온탕,증기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니 발달된 당시 로마의 목욕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공중 화장실 쪽에서 본 목욕탕. 중앙의 풀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다.   

 

 

목욕탕 옆에는 벽을 따라 아무런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이 늘어서 있는데
벽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화장실은 중요한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고 서로의 의사 소통을 위해 변기간의 거리도 상당히 좁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쓰고 버리는 하수가 이 화장실을 깨끗이 쓸어 내리게 되니
에베소 사람들은 이천년 전부터 최첨단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요금도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과 흘러 나가는 곳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는데
돈을 많이 내면 볼 일도 냄새 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도 물이 흘러서 볼 일을 보고 난 후 손도 씻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악사들이 화장실 앞에서 음악도 연주했다고 하니
에베소의 화장실은 정말 모든 근심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을 듯 하다.

화장실 유적지에 오면 모두 다 변기에 걸터 앉아 기념 사진을 남기는데
필자는 변기가 잘 보이라고 한국식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승리의 V를 날리며 한 컷 찍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아주 아쉬운 부분이다....^^

 

 

'플레타네이온'은 시의회당이라고도 하는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였는데 사방은 각각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던 아궁이가 있었다. 

 

 

너르디 너른 에베소 일대는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발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 현장 뒷편 코린트 식의 열주 위에 선 석상에는 하늘거리는 옷자락조차도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도미티안 신전'터 옆에 있는 동상 받침대에는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 뱀들이 서로 꼬여있는 지팡이를 말함)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에베소 안의 모든 도로는 색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빛을 받으면 더 눈부시게 빛난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에베소로 옮겨 오면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은 에베소인지라
아름다운 코린트식의 열주들에서도 이 도시를 거쳐 온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 하나 예사롭지 않은 유적들인데 방대한 지역에 유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보니 거의 방치된 느낌마져도 들 정도이다.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는 '헤라클레스의 문'에 장식되었던 것인데
왼손에는 면류관을, 오른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래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로고는 바로 니케 여신의 옷 자락 선(좌측 하단을 보라..)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메미우스의 비'인데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와 아들 가이우스를 조각해 두었다.

 

 

메미우스는 술라의 손자인데 3 대에 걸쳐 에베소를 지배한 인물이다. 

 

 

언덕길 아래로 내려서면 메인 스트리트인 '크레티아 거리'가 나타나고 저 멀리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 '세루시우스 도서관'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세르시우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 '크레티아 거리'는
당시 길 양쪽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많이 소실되었지만 현재도 몇개는 구경 할 수 있다.

 

 

이렇게 머리가 유실되고 몸체만 남은 석상이 너무나 많은데 예전에는 석상의 몸체만 만들어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서 석상 몸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장난기 많은 관광객들은 대리석상 뒤로 올라가 석상의 몸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크레티아 거리의 바닥은 모두 평평한 색색의 대리석으로 포장되어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금새 얼굴이 따끔거린다.
"에베소에는 태양이 둘 있는데 하나는 하늘의 태양이고 하나는 거리의 대리석에 반사된 땅의 태양이다"
터키인 후세인 베이가 이렇게 말할 만큼 에베소의 태양의 위력은 대단하다.

 

'크레티아 거리' 중앙의 북쪽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샘'은 본래는 12m의 크기였으나 현재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
샘 중앙에는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다.



부유한 상인들의 아케이드 거리의 모자이크화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
길바닥 조차도 이렇게 색색의 모자이크로 장식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에베소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점 안에는 로마의 여러 속국에서 수입해 온 갖가지 화려한 명품들이 즐비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2층 개인 빌라들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의 색과 문양의 조화 또한 예사롭지 않은 예술품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팔짱을 끼고 걸었을 이 거리를 필자도 허리를 펴고 보란 듯이 걸어 본다.  

 

 

입구 중앙에 코린트식의 돌기둥이 서있고 한가운데 있는 2개의 상부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있는 아치로 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하드리아누스 신전'인데 AD138년에 완성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치 앞에는 운명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있고 뒤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있는데 사진은 메두사의 조각이다. 

 

 

크레티아 거리를 계속 걸어가면 너무나 아름다운 '세르시우스 도서관'이 나타난다. 

 

 

'에베소의 상징'이라고 할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세르시우스 도서관'은
로마 시대 집정관 세르시우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 위에 세운 기념물인데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제 3 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기둥과 벽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으며
정면의 벽에는 지혜,운명,학문,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여신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오스트리아의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파사드 뒤에는 목조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또 지진 피해도 입어서
현재는 건물의 앞 부분만 남아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도서관은 유적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으며 복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오른 쪽의 아취형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은 상업 아고라로 내려가는 문이다. 

 

 

도서관 옆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상업 아고라'의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상을 찍었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도서관 바로 앞의 '대리석 거리' 벽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부조 장식물도 눈에 뜨인다.   

 

 

 '대리석 거리'는 '세루시우스 도서관'과 '대극장'을 이어주는 거리를 이른다. 

 

 

문자 그대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어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터키의 유적지는 어딜 가든 고양이의 천국이라 이렇듯 '대리석 거리'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이쁜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그런 도시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대리석 거리의 끝부분에는 이만 사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던 터키 최대 규모의 '대극장'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AD 3세기에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건립된 이 대극장의 관객석은 높이 38 m, 길이 158 m의 반원형 모양인데
청동과 도자기제의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음향 효과도 뛰어났다고 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화각이 좁은 똑딱이 카메라로 찍으니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극장 안 무대 위에 서니 마치 글레디에이터의 전투 장면이 벌어질 것 같은 위엄이 무대 전체를 감돈다. 

 

 

높이가 38m 나 되다 보니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이다. 

 



대극장 위에서 왼쪽으로 보면 '세루시우스 도서관'의 옆 모습이 보인다.
마주 보이는 아취 형태의 문은 기원전 3 세기경의 건물인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다.
이 문은 '세루시우스 도서관' 앞에서 '상업 아고라'로 이어진 문인데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디우스가 해방되고 나서 황제 일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증한 문이다.

아취 문 앞에 늘어선 열주를 따라 '상업 아고라(시장터)'가 이어지는데
가로 세로 110 m의 넓은 터로 되어 는 아고라는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3 세기에 세워진 아고하는 카라카라 황제 시대에 벌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아고라에서는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산 약용 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으며
'항구 거리'를 통하여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고라와 연결된 '항구 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길이 500 m 정도의 거리이다.
항구 거리 양쪽에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아르카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 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베소의 현관이다. 

 

 

항구 거리 아고라의 끝에는 에게해가 있어 상선들이 줄지어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하구의 토사가 점점 쌓이게 되어 바다가 점점 메워지다보니 지금은 유적지에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항구 거리를 마지막으로 에베소 유적지를 나서니 에베소 북쪽 출입구 밖에는 많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우리 나라 국립 공원 같은데에 늘어선 상점과 그 느낌이 너무 흡사해서 너무나 친근감이 든다.



상점 앞에는 터키의 국기가 새겨진 티 셔츠를 특히 많이 걸려 있었는데 터키 인들의 국기 사랑도 우리네 못지 않게 각별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관광상품점에는 특이한 전통 악기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고 그외에는 수공예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고학 유적지의 규모로는 세계에 다른 적수가 없는 에베소는 모든 세계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곳이다.
진지한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
격식을 따지지 않는 여행객들에게는 나이키 신상이나 매음굴을 연상시키는 음란한 암시에 다시 한번 즐거워지는 곳.
'최초이자 가장 거대한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황금기의 에베소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바울이 에베소로 들어올 때 이용한 아르카디아 길을 따라 에베소를 떠난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이와 같은 카피를 내세우며 혜성같이 나타나 
80년대 우리나라 스포츠 브랜드를 일찌감치 제패한 '나이키(NIKE)'

나이키는 1972년 빌 보어먼이라는 육상 코치와 필 나이트라는 육상선수가 만나 탄생된 이후로
수없이 난립하는 많은 스포츠 브랜드 중에서도 여전한 인기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데....



나이키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의 비결은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에 그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날렵한 부메랑이 날아가는 듯한 특이한 로고 '스워시(Swoosh)'야말로 나이키 인기의 일등 공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사모트라케의 니케

          
나이키(NIKE)의 브랜드 네임은 '승리(Victory)'라는 뜻인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전하기 위해 42.195Km를 달렸던 그리스 병사가 기도를 올린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유래되었다.
로마 신화에서 니케는 역시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아(Victoria)여신에 해당되는데 니케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 바로 '나이키'이다.

나이키 창립 당시 회사를 상징할 만한 로고를 찾던 보어먼, 나이트 두 동업자는
포틀랜드 주립대학에 다니던 여대생 캐롤린 데이비슨(Caroline Davison)에게 로고 디자인을 의뢰하는데
캐롤린은 여신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에 흐르는 선에서 영감을 받아
승리를 표현하는 V를 부드럽게 뉘어 놓는 현재의 로고를 만들어 내어 나이키의 열정적인 스포츠 정신과 승리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이때 캐롤린은 나이키 로고 "스워시(Swoosh)" 를 넘기고 단돈 35달러를 받았는데
현재의 나이키 로고 이미지의 가치는 약 100조원에 이른다고 하니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로고를 넘긴 캐롤린은 많은 돈을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이후 나이키 탄생과 번창은 시대와 딱 맞아 떨어졌는데 야심에 찬 미국 베이비 붐 세대의 개인주의와
자기 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은 조깅 붐으로 이루어졌고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운동화는 세계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으니
나이키는 스포츠 품목으로는 유일하게 코카콜라에 이어 유명 브랜드 2위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캐롤린이 영감을 얻었다는 니케의 온전한 모습을 터키의 에베소(에페스, Efes) 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다.

니케는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아테나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단독으로 그려질 때는 날개가 달려 있고 종려나무 잎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 있는 니케 신전의 니케(파이오니오스의 니케)는 승리의 상징인 날개가 없다.
그것은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날아가지 말고 영원히 아테네를 지켜주길 원하는 시민들에 의해 그 날개가 잘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개 잘린 니케는 아테네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터키의 침공을 받아 아테네의 상징 아크로폴리스가 터키 총독 관저로 쓰이기도 하고

1687년 베네치아가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에는 베네치아군이 쏜 포탄이 파르테논에 쌓아둔 화약을 폭발시켜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이 날아가 파괴되고 신전 안의 박공부에 붙어 있던 많은 조각상은 산산조각이 나서 오랫동안 쌓여 있었다.
이후 엘긴이라는 사람이 대부분의 조각품을 자기나라 영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이후 조각품 대부분은 대영박물관 파르테논 특별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고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편이니....
아테네 시민은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자른 댓가를 톡톡이 치른 셈이다.

 


하지만 엄청난 스포츠 마케팅 효과를 창출해낸 일등공신 '에베소 니케'의 아름다운 날개와 부드러운 곡선의 옷자락은

강인한 스포츠 정신에 영향을 미친 덕분인지......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이천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 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터키 사데 (사르디스,Sardis)의 현재 지명은 Sahlili이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방 서머나 (현재 이즈미르) 동쪽으로 85 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옥한 도시인데 BC 1200년에는 옛 리디아 (루디아)왕국의 수도로써 군사상 상업상의 중심지였다.

고대 리디아 제국은 소녀들이 결혼할 때 지참금을 벌기 위해 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고대 국왕 칸다올레스는 경호원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부인의 나신을 훔쳐보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여왕은 그 경호원 기네스에게 목숨과 왕을 살해하는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는데 결국 기네스는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의 조상이 되었다. 

 

 

또 리디아인들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많이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고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생산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크로이소스의 아버지 알리아테스 왕이 고안해낸 발명품이 바로 우리가 요즘 쉽게 쓰고 있는 '동전'인데
맨 처음 동전은 황금과 은의 합금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고 아무런 글자도 쓰이지 않고 사르디스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머리만을 새겼다.

 

크로이소스는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 에페수스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이 많이 나오는 까닭은 '황금의 손 미다스'가 이 곳의 팍톨루스 강가에서 목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신화에 따르면 미다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이자 숲의 신인 실레노스를 사로잡았으나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므로 디오니소스는 그 보답으로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미다스는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음식마저도 손을 대면 금으로 변하여 먹을 수가 없었고 그의 공주조차도 금으로 변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된 미다스에게 디오니소스는 사르디스 근처에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목욕을 하게 하여서 황금의 소원에서 벗어나도록 했는데 그후 팍톨루스 강에는 사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아크로폴리스는 난공 불락의 도시로 알려졌는데도 BC 549년에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BC 218년엔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점령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비밀의 종교가 성해 요한 계시록  3장 4절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폐허나 다름없는 사데 유적지에서 가장 장관을 연출하는 건축물은 단연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성경에서는 아데미 신전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위의 사진은 에페스(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옆 후미진 창고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찍은 것이다.

 

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페수스와 사모스,그리고 디디마에 있는 다른 대규모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중에 가장 큰 신전이다. 신전은 BC 550년 경 건설을 시작했지만 이오니아인의 반란에 파괴되었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복구를 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위용이 짐작되는 엄청난 높이의 신전 기둥  2개가 남아 나란히 서 있어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잘라 빈틈 없이 쌓아 올린 기술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이 신전은 거리가 짧은 막다른 곳에 여덟개의 기둥을 두고 양쪽 가장자리에 20개의 기둥을 배치시키는 이오니아식 배열로 이루어졌는데 남아있는 기둥만 보아도 신전의 원래의 크기가 짐작이 되고 엄청난 높이의 기둥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제단은 신전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건물 정면이 언덕 경사면을 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된다.

 



미쳐 복구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치되어있는 신전의 기둥을 보면 마치 무른 석고를 조각하듯 정교하게 조각되어있고....

 

기둥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진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코린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장식 기법 중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는 장식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폐허 기둥 뒷편에는  벽돌로 된 사데 교회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현재의 남은 건물의 잔해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부요하였기 때문에 물질 문화에 빠져서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신전 바로 뒤에 있는 트몰루스(Tmolus, 해발 2,137m) 산은 마치 사람이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것 같은 형상의 산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리디아 왕국와 아르테미스 신전, 사데 교회의 흥망성쇠를 수천년 동안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을 트몰루스산을 뒤로 하며 사데를 떠난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