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국어시간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읊어보았을 명시 조지훈의 '승무(僧舞)'.

우리의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아름다운 시로 노래했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 주실마을을 영양 여행길에 잠시 들려보았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한 주실마을 주차장에 내리니 '풀잎단장'이라는 싯귀가 먼저 여행자를 반긴다. 

일찍부터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개화를 앞당긴 주실마을은 조지훈을 비롯한 한국문학의 대가들을 다수 배출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주실마을을 바라보니 매봉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장군천이 흐르는 마을의 모습이 너무 고즈녁하게 보인다.

배산임수! 굳이 명당을 운운하지 않더라고 따스한 햇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마을은 편안함을 안겨준다.

조선 중기 환란을 피해서 이곳으로 정착했던 한양조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흡사 배 모양 같아서 주실이라 불리우며 

산골등짝이가 서로 맞닿아 이루어져서 주곡(注谷)이라 불리기도 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마을로 가기 위해서 마을 앞 장군천 옆으로 난 갈대길을 걸어본다.

마을에서 뚜욱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만 정사 하나가 여행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오지로 낙인찍혔던 영양, 하지만 그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였기 때문에 이토록 맑은 물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않았을까?

이런 곳에 살면 근심도 발 아래 내려 놓고 안빈낙도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장군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주실교를 건너 산책하듯 천천히 마을길을 걸어본다.

마을 어귀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자리에 자리잡은 솟을대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호은종택은 조지훈이 태어난 곳이다.

한양에 터전을 잡고 살던 한양조씨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호은 조전(壺隱 趙佺)은 주실마을로 피신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집은 둘째 아들 조정형이 지은 집이다.

집터를 잡을 때 매방산에서 매를 날려서 매가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당시에 소실된 것을 1963년에 이르러 복구하였다.

 

 

 

 

 

집은 자 형태로 되었는데 안채인 정침과 관리사로 나뉘어 있고 

안채는 정면 7, 측면 7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인데 보온을 위해서 유리창문을 덧댄 것이 특이한 점이다.

 서쪽에는 조지훈의 태실이 있고 대문에는 한말부터 태극기를 조각·채색하여 끼워두고 있다.

이집의 가훈은 삼불차(三不借)인데 재물과 사람(양자) 그리고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호은종택을 나와 마을 안쪽에 있는 옥천종택으로 향했다.

영조 때의 문신 옥천 조덕린1694(숙종 20)에 지은 집이다.  

 

 

 

 

살림채인 정침과초당사당으로 구성된 17세기 말 대표적인 양반주택인 옥천종택은

두꺼운 널을 자 모양으로 붙여 박공으로 처리한 지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살림채 바로 옆에는 초당으로 된 별당이 있는데 서당의 구실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초가 이엉은 삭아도 너~무 삭아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올겨울엔 새로 이엉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옥천종택을 나와 바로 맞은편에 자리잡은 창주정사로 올라가본다.

 

 

 

 

창주정사는 옥천 조덕린선생이 문하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정면 4칸의 건물에 가운데 2칸을 마루로 하고 창주정사라는 현판을 달았다.

 

 

 

 

창주정사에 서면 주실마을이 한눈에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오가는 이도 별로 없이 참으로 평화로운 마을이다.

 

 

 

 

참나무, 느릅나무들이 우거진 매봉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나니 어느덧 돌아갈 길이 급하게 되었다.

조지훈 문학관과 조지훈 시공원을 비롯하여 그가 수학했던 월록서당도 보고 가야 하는데!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된 주실마울숲도 돌아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니 아쉬움이 앞선다.

다음번에 오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문학관을 돌아보고 조지훈과 그의 시의 향기를 마음껏 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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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에 '무진장'이 있다면 경북에는 'BYC'가 있다."는 말이 있다.

전북의 산간벽지 오지 삼총사가 무주, 진안, 장수라고 한다면

경북에는 봉화, 영양, 청송이 거기에 버금가는 오지라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통이 불편하기로 유명하여 '육지 속의 섬'으로 불려왔던 영양.

하지만 전국의 도로망이 사통팔달로 잘 뚫려진 요즘의 영양은

오지라는 오명을 벗고 자연이 살아 숨쉬는 웰빙 청정지역으로 조명받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곳 영양으로 가기 위하여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던 차는 영덕에서 갈라져 안동행 34번 국도로 접어든다.

청송 월전 삼거리에 이르러 영양행 31번 국도로 꺾어 얼마 가지 않으니 바로 입암면이다.

입암면사무소를 지나 잠시 가니  눈앞에 거대한 규모의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바로 입암(立巖)이라는 지명이 있게 만든 영양 최고의 경승 선바위이다.

 

 

 

 

선바위 관광지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선바위가 서 있는 반변천 강변으로 향한다.

선바위가 위치한 남이포 일대는 일찌감치 풍경을 앞세운 관광지로 개발됐지만

영양 땅이 워낙 깊다 보니 평소에 찾는 이 거의 없어 관광지라 이름 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영양고추전시관, 야생화 수석전시관을 비롯해 관광지구에 위치한 몇몇 조형물들이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의 위용에 이끌려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반변천을 사이에 두고 선바위 앞에 서니 정말 바위가 엄청나게 크다.

크롭바디의 렌즈로서는 화각이 모자라 당최 한 화면에 담기지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넥스-5를 이용하여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옆으로 길게 찍히는 파노라마 사진의 기능상 약간의 왜곡과 함께 윗부분이 약간 잘린 사진이 억지로 만들어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 남이포는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합수지점이다.

양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면서 Y자 모양의 지형이 만들어졌는데

두 물길이 합수부의 지형을 예각으로 뾰족하게 깎아내 독특한 지형이 바로 선바위이다.

 

 

 

 

선바위를 뜯어가며 자세히 보니 그 형상이 참으로 독특하다.

마치 커다란 한덩어리의 케이크 같기도 하고 어느 한쪽은 부풀어 오른 컵케이크를 보는 것 같다.

육즁한 바위임에도 불구하고 손톱으로 깔짝거리면 귀퉁이 한덩어리가 뜯어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선바위를 사이에 끼고 Y자 형태로 흐르는 반변천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다.

 선바위의 깊게 패인 주름과 함께 바위 위 나무들과 하늘의 구름까지 환하게 비쳐보이니 마치 거울같다.

 

 

 

 


이런 특별한 지형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없을리 없다.

남이포와 선바위에 전해내려오는 전설 한도막을 옮겨보자면.......

 

남이포 인근 연못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이 역모를 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용을 토벌하기 위해 급히 남이장군을 파견했다.

남이장군은 치열한 교전 끝에 용 두 마리의 목을 베고는 석벽에다 자신의 초상을 검 끝으로 새겼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려다 지형을 보니 언젠가 다시 도적의 무리가 일어날 기세라 큰 칼로 산맥을 잘라서 물길을 돌렸다.

이때 남이장군이 마지막으로 칼질을 한 흔적이 바로 선바위라고 한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전설이지만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5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된 희대의 풍운아 남이장군과

어디서도 보기 힘드는 장업하고 기이한 바위 선바위에게는 걸맞는 전설이 아닐까?

 

 남이장군은 간신 유자광의 모함에 의해 스물여섯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칼질을 해서 만들었다는 선바위는 아직도 그자리에 남아 굳건하게 남이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는 남이포의 뾰족한 끝자락에 세운 정자 남이정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석문교도 있어 눈길을 끈다.

석문교를 건너 남이포의 물가를 따라 남이정까지의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살며시 손짓하며 필자를 불렀지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차가운 강바람으로 인해 거닐어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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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이 불편하고 낙후되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우던 경북 영양.

내륙 깊숙이 자리 잡아 고추와 반딧불이 밖에는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영양에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불리우는 정원인 서석지가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연못 속에 수많은 돌들이 있어 ‘상서러운 돌들의 연못’이라 불리우는

서석지(瑞石池)를 찾아서 경북 영양으로 출발한 차는

네비 아가씨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인도를 받아 911번 지방도로 들어선다.

한참을 가도 마주 오는 차도 별로 안 보이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니

오른쪽에 서석지라 쓰인 조그만 팻말이 눈 앞에 나타난다.

네비 아가씨의 말로는 아직 백여m 더 가야 한다는데!

스쳐 지나려던 차를 급하게 한쪽에 세우고 서석지 입구로 내려서본다.

 

 

 

 

서석지로 들어가는 널찍한 길 초입에 비가 하나 세워져 있어 보니

바로 석문 정영방 선생을 기리는 석문정선생사적비(石門鄭先生事蹟碑)이다.

서석지를 조성한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1577∼1650)은 퇴계 이황 - 서애 유성룡 - 우복 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삼전(三傳)의 제자로 알려진 분으로 성리학과 시에 능하였으며,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다한다.

 

 

 

 

사적비를 살펴보고 고개를 돌리니 서석지의 전경과 함께 엄청나게 큰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서석지의 상징과도 같은 400년 묵은 은행나무 고목이다.

그런데......! 은행잎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목만 남아 있다.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힌 서석지를 마음에 두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을 때 왔더라면 너무 멋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을텐데.....

같은 경북지방에서도 남쪽과 북쪽의 기후는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는게 새삼 실감이 났다.

 

 

 

 

대문 앞으로 올라서니 바닥은 떨어져 겹겹이 쌓인 은행잎으로 흙이 안 보일 정도이다.

붉은 흙담과 잘 어우러진 노란 은행잎 카페트를 사뿐히 즈려밟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담장과 90도로 꺾어진 문 안으로 들어서니

아! 눈 앞에 펼쳐지는 서석지의 단아한 모습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서석지의 전체적인 공간 구성은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강학처인 경정과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등 선비의 네가지 벗을 심어놓은 사우단,

한가지뜻을 받드는 서재인 주일재, 경정 뒤편 담너머에 자리잡은 자양재와 서고인 장판각,

연못 앞에 400년 된 은행나무, 그리고 약 90여개의 상서러운 돌로 채워진 연당이 있다. 

 

 

 

 

 정자인 경정 앞에 자리잡은 요(凹)자형 연못의 규모는 가로 13,4m, 세로 11.2m 정도인데

경정과 맞은편 주일재를 오가는 통로 외에는 연못이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석지는 연못이 마당이고 마당이 곧 연못인 셈이다. 

 

 

 

 

서석지라(瑞石池)라는 이름은 연못 안에 약 90여개의 상서러운 돌이 있어 붙여졌는데

연못 속의 돌들에게 붙여진 철학적이고 심오한 이름은 무려 19개나 된다.

‘경정잡영’에서 석문선생은 서석지의 돌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읊었는데

서석지를 읊은 '경정잡영' 中' 상경석'이란 시를 보면 그의 깊고도 심오한 학문이 느껴진다.

 

돌은 안으로 아름다운 글을 머금고도

오히려 그 있음을 나타내기 꺼리는데

사람은 어찌 실속에 힘쓰지 않고

명예만 얻으려고 급급하는가

 

 

 

 

요(凹)자형  연못의 튀어나온 부분에는 선비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국화를 심어 ‘사우단’이라고 불렀는데  

연못의 동북쪽에 있는 주인의 거처인 주일재는 연못을 바라보게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사우단을 바라보게 배치했다.

 

 

 

 

연못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강학당인 경정은 사방에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는데

여름날 연꽃이 필 때 경당 계자난간에 기대어 연꽃의 향기를 맡는 것은 가히 신선놀음이라고 한다.

 

 

 

 

 

‘경정(敬亭)’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자의 마루는 앞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너무 운치가 있다.

 

 

 

 

 경정 뒤켠으로 돌아 정자의 뒷문을 열고 보니 문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가히 한폭의 그림이다.

누마루에 앉아 서석지와 은행나무의 풍광을 즐기며 시를 짓던 석문선생과 그 벗들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 하다.

 

 

 

 

 

 경정을 거쳐 주일재 옆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두채의 수직사(守直舍)가 나오는데 

 

 

 

 

큰채에는 자양재(紫陽齋)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자양재의 서편에는 장판각이 있는데 장판각이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니 오늘날의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장판각을 거치면 이렇게 다시 흙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구조인데

한바퀴 도는데 몇십 걸음이면 될만큼 규모는 아담하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연당 안의 연꽃이 활짝 피어 보는 이들을 설레이게 하는 여름철을 비롯하여

대문 옆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모두 물들어 그 노란 손을 흔들 때는 물론이고

겨울철 함박눈이 내린 모습 또한 절경이라는 영양 서석지.

연꽃도 다 시들어 대궁이만 남고 은행나무도 다 떨어져버린 늦은 가을날에 찾아오다니......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텐데......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내년 가을을 기약해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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