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경치 좋은 곳'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09.26 단종의 슬픈 사연 어린 객사 영월 관풍헌과 자규루 10
  2. 2012.08.22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자 영월 요선정 27


 영월 읍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앙로. 영화 '라디오스타'의 무대가 되었던 청록다방을 지나

영월중앙시장 앞에 이르니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대문 앞에 서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 곳은 강원도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관풍헌.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지방 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태조 1년인 139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참으로 오래 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풍헌 마루 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넓직한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건물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무게감이 있는데

팔작맞배붙임집인 정사 좌우에 날개처럼 익사가 붙은 형태로 모두 3동의 건물이 붙어있다.

그런데 오른쪽 익사는 전형적인 객사의 건물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정사와 왼쪽 익사는 꽃살문으로 치장하여 어딘지 사찰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자세히 보니 이 곳은 현재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바람을 보는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관풍헌(觀風軒)은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조 2년(1456),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당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는데

큰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침수될 위기에 이르자 거처를 이곳 관풍헌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단종은 관풍헌에 거처하는 동안 관풍헌 동쪽에 위치한 매죽루에 자주 올랐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슬픈 처지를 두견새((子規)에 빗댄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고 전한다.

 

 

 

 

 누각의 한 쪽에 단종이 읊은 자규사가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머리에 기대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비록 짧은 몇 마디의 시구절이지만 피를 토하듯 울어대는 두견새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어린 단종의 괴로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이때부터 매죽루(梅竹樓)는 그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로 바꿔불리우게 되었는데

선조 38년(1605년) 큰 홍수가 나서 누각이 허물어지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그 터를 찾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누각의 남쪽 현판은 자규루,북쪽 현판은 매죽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는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발각되게 된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해 10월, 사약을 내려보내게 되고

 결국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 의해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그 슬픈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린 단종이 한양을 떠나 청령포를 거쳐 잠시나마 머무르며 그 머리를 누이었던 곳, 관풍헌.

춘삼월 밤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울어대던 두견새(자규)의 소리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슬픔을 겪었던 자규루.

한 많은 인생을 산 단종도 가고 그리도 구슬프게 울어대던 두견새의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단종의 슬픈 발자취가 어려있는 이곳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쉽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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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청령포 주차장에 걸린 영월의 대표 명승 사진에서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갈 듯 자리잡은 요선정의 사진을 보는 순간

네비게이션에 '요선정'을 입력한 후 친절한 목소리로 앞길을 인도하는

네비아가씨의 인도를 따라 요선정을 찾아나섰다.

 

영월군 주천면을 지나 좌측으로 무릉리다리를 지나니

 남한강의 한 갈래인 주천강이 나타난다.

풍경이 아름다운 주천강가 벼랑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 바로 요선정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무덤 사이로 난 돌계단을 통하여 잠시 걸어 오르니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갈 듯 요선정이 자리잡고 있다.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 터는 그다지 넓지 않은데 정자의 규모도 아담하기 그지없다.

건물은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요선정이라는 이름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의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정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정자의 앞면 오른쪽에는 이응호가 쓴 ‘요선정’, 왼쪽에는 ‘모성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원씨, 이씨, 곽씨 삼성의 요선계 계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세운 정자라고 하니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지만

조선 19대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숙종이 직접 하사한 어제시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에 봉안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은 일본인 주천경찰서장의 소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인이 숙종의 어제시를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낀 요선계 회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여 어제시를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서 요선정을 건립하였다.

 

 

 

 

요선정의 앞에는 높이가 3.5m에 이르는 고려시대 마애불좌상이 있는데 암벽위에 부조로 새겨져있다.

불상은 살이 찌고 둥근 얼굴에 눈, 코, 입과 귀가 큼직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상체에 비해 앉아 있는 하체의 무릎 폭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체의 길이도 너무 길어 신체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도 두꺼워 신체의 굴곡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가 앉은 대좌 역시 무릎 폭에 맞추어 큼직하게 조각되어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 주름과 신체 각 부분의 표현이 형식화되어 있어 고려시대 지방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강원도에는 이처럼 암벽면을 깎아서 만든 마애상의 유래가 매우 드문 실정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비록 역사가 짧고 규모도 작지만 숙종대왕이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해 수주면의 원씨, 이씨, 곽씨

삼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의 역사의식과 정성이 담겨 있어 역사가 매우 큰 정자, 요선정.

주천강가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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