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읍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앙로. 영화 '라디오스타'의 무대가 되었던 청록다방을 지나

영월중앙시장 앞에 이르니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대문 앞에 서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 곳은 강원도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관풍헌.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지방 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태조 1년인 139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참으로 오래 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풍헌 마루 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넓직한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건물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무게감이 있는데

팔작맞배붙임집인 정사 좌우에 날개처럼 익사가 붙은 형태로 모두 3동의 건물이 붙어있다.

그런데 오른쪽 익사는 전형적인 객사의 건물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정사와 왼쪽 익사는 꽃살문으로 치장하여 어딘지 사찰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자세히 보니 이 곳은 현재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바람을 보는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관풍헌(觀風軒)은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조 2년(1456),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당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는데

큰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침수될 위기에 이르자 거처를 이곳 관풍헌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단종은 관풍헌에 거처하는 동안 관풍헌 동쪽에 위치한 매죽루에 자주 올랐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슬픈 처지를 두견새((子規)에 빗댄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고 전한다.

 

 

 

 

 누각의 한 쪽에 단종이 읊은 자규사가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머리에 기대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비록 짧은 몇 마디의 시구절이지만 피를 토하듯 울어대는 두견새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어린 단종의 괴로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이때부터 매죽루(梅竹樓)는 그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로 바꿔불리우게 되었는데

선조 38년(1605년) 큰 홍수가 나서 누각이 허물어지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그 터를 찾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누각의 남쪽 현판은 자규루,북쪽 현판은 매죽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는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발각되게 된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해 10월, 사약을 내려보내게 되고

 결국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 의해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그 슬픈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린 단종이 한양을 떠나 청령포를 거쳐 잠시나마 머무르며 그 머리를 누이었던 곳, 관풍헌.

춘삼월 밤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울어대던 두견새(자규)의 소리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슬픔을 겪었던 자규루.

한 많은 인생을 산 단종도 가고 그리도 구슬프게 울어대던 두견새의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단종의 슬픈 발자취가 어려있는 이곳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쉽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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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백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강원도 영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는 뜻에서 영월(寧越)로 이름하였다 하는데...... 

영월군에는 최근에 특이한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이 두군데나 있다. 

그중 하나는 영월군 서면. 한반도지형을 닮은 선암마을이 있어서  

마을의 이름을 '한반도면'으로 개명하였다.

 

  또 하나의 마을은 바로 '김삿갓면'이다. 

원래는 영월군 하동면이지만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와 묘역이 있어서 

200910월에 이르러 마을 이름을 '김삿갓면'으로 개명하였다. 

 

마을 이름을 김산갓면으로 바꾸자 발길이 뚝 끊겼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김삿갓문학관을 비롯한 김삿갓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지난번 12일 여배우 특집에서는  

레이스미션의 최종목적지로 소개되기도 했던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영월 시내에 승용차로 40분 거리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위치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문학관은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산 난고 김병연의 일대기를 모아놓은 곳이다.

평생을 삿갓을 쓰고 방랑하던 김삿갓의 문학관 답게 건물의 지붕이 삿갓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배산임수의 최적의 자리에 세워진  김삿갓 문학관 앞 광장에는

김삿갓 시비와 그의 시와 함께 한 조각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하여 반역자로 낙인 찍히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안동김씨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오지 중의 오지인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평가되기도한 김병연은 

이후 영월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였다.

 

  조부의 과거를 모른채 자란 김병연은 시제가 나오자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썼고 그것으로 인해 급제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신랄하게 비판한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고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김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김삿갓이 방랑 중에 지은 시는 약 1,000여편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는 456편의 시가 전해진다.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다.

 

 

 

 

광장에 전시된 조형물과 그가 남긴 시들을 읽어본 후 김삿갓 문학관 내부를 돌아보기로 한다. 

김삿갓의 친필 시, 책자, 영상물, 조형물 등 520여점의 김삿갓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난고김삿갓문학관의 입장료는 일반 1,000, 어린이는 500원이며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등이 있는데 전시실에는

김삿갓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 정암 박영국 선생의 연구 자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김삿갓의 생애를 상영하는 영상실에서는 영상을 통해 김삿갓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난고문학실, 일대기실, 자료실 등이 있는데  

난고 문학실에는 1938년 이응수 작의 김립시집 외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각 서적, 간행물, 논문,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대기실은 김삿갓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과정과 주거지를 복원한 모형들이 있으며 김삿갓 가계도도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자료실에는 김삿갓이 입고 신었을 법한 신발, , 삿갓 두루마기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김삿갓의 친필도 확인할 수 있다.

 

 

 

 

김삿갓문학관의 맞은편에는 김삿갓 시비동산과 김삿갓의 묘소가 있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생전에 김삿갓이 살던 이곳은 푸르른 산과 시비, 조형물과 야생화들이 잘 어우러져 고즈녁한 느낌을 준다.

 

 

 

 

묘소 앞에 있는 시비 동산에는 발랑 시선 김삿갓의 유적비와 함께

 

 

 

 

서예대가 김응현 선생과 서경보 스님이 세운 석비들이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를 더해 준다.

 

 

 

 

시비 동산에는 여러 형태의 조형물들이 있는데 그중 '환갑'이라는 조형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지나가던 아이들은 이 조형물을 힐뜻 보더니 '아니......이건! 임재범이잖아!" 하고 낄낄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임재범이 삿갓을 쓰고 저 먼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방랑기 다분한 임재범, 방랑 시인 김삿갓......어딘가 통해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바닥에 놓인 연자매 한짝도 어딘가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2일 여배우 특집 레이스 미션 때 12일 깃발을 꽂았던 곳이다. 

여기 왔던 누구도 그 장면을 기억했음일까? 나무 지팡이 하나를 기념으로 꽂아둔 것에 피식 웃음이 지어진다.

 

 

 

 

계곡에 걸쳐진 무지개 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니 김삿갓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철종 14년에 전남 화순에서 세상을 떠난 김삿갓의 유해는 3년 뒤 그의 아들에 의해 영월로 옮겨졌는데 

묘소는 1982년 정암 박영국 선생에 의해 발견 되었고, 1984년에 안동 김씨 대종회에 의해서 잔디를 입힌 것이라고 한다. 

 

묘소를 본 사람들은 "아니, 묘소가 왜 이리 초라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초라한 묘소가 김삿갓의 외로웠던 인생 여정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고 

다듬지 않은 돌에 새겨진 묘비와 상석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의자유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좋다.

 

 

 

 

김삿갓 묘소와 시비 동산 앞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흘러 청량감을 더해준다. 

망경대산, 마대산, 선달산, 형제봉 등 천m가 훌쩍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라 산세도 너무 빼어나다. 

영월 여행에서 빠뜨리지 않고 들려보아야 할 곳, 바로 한평생을 유랑하며 살았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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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을 생각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비운의 왕 단종을 떠올릴 것 같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의 기억이 서린

청령포, 영월 객사, 장릉 등 단종과 관련있는 유적지가 이곳 영월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7세 어린 나이에 한양을 떠나 외로운 육신을 뉘었던 청령포를 떠나

영월읍내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릉으로 향하였다.

  

다른 조선 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장릉.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충신들의 계획이 밝혀져

영월 청령포로 쫒겨나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사당하고 이곳 장릉에 묻히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 입구로 들어서니 단종과 장릉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단종역사관이 먼저 나타난다.

단종역사관에서는 단종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단종의 시대, 승하, 복권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어

 세자 즉위부터 단종대왕으로 복권되기까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하에는 단종과 정비였던 정순왕후에 대한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 옆으로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9명의 수호군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 등 사용기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재실을 지나자 비각이 하나 나타난다.

무슨 비각인가 해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충신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여 차디찬 동강에 그 시신이 버려졌지만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두려워 아무도 선뜻 나서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홍도가 충절을 지켜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으로 가다보니 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 자리에 관을 갖추고 단종을 장사지낸 후 그 사실을 숨겼다. 

충신 엄홍도에게는 고종 16년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엄홍도 정려각.

영월의 '충절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장릉의 서쪽에는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과 우물인 영천, 배식단 등이 자리잡고 있는데

홍살문 아래부터는 신도라고 해서 일반인들의 보행을 삼가해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장릉은 ㄱ자로 꺾여 있는게 특이한 점이다.

 

 

 

 

능침은 이렇게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잘 정돈된 왕릉이 있고 언덕 아래로는 정자각, 배식단, 영천, 신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는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이후 숙종 7년인 1681년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숙종 24년인 1698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은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승하한지 241년만에야 다시 왕의 칭호를 되찾게 된 것이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며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는데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봉분 아래에는 정령송이라 불리우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데 

정령송은 단종비인 정순왕후의 릉인 사릉에서 이식해 온 것으로

정순왕후가 소나무가 되어 단종의 곁을 언제나 묵묵히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영월 군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장릉.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지만

청령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누워있는 한많은 어린 왕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경관과 세계문화유산의 자랑스러움도 도리어 애처로움이 되어 여행자의 가슴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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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청령포 주차장에 걸린 영월의 대표 명승 사진에서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갈 듯 자리잡은 요선정의 사진을 보는 순간

네비게이션에 '요선정'을 입력한 후 친절한 목소리로 앞길을 인도하는

네비아가씨의 인도를 따라 요선정을 찾아나섰다.

 

영월군 주천면을 지나 좌측으로 무릉리다리를 지나니

 남한강의 한 갈래인 주천강이 나타난다.

풍경이 아름다운 주천강가 벼랑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 바로 요선정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무덤 사이로 난 돌계단을 통하여 잠시 걸어 오르니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갈 듯 요선정이 자리잡고 있다.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 터는 그다지 넓지 않은데 정자의 규모도 아담하기 그지없다.

건물은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요선정이라는 이름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의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정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정자의 앞면 오른쪽에는 이응호가 쓴 ‘요선정’, 왼쪽에는 ‘모성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원씨, 이씨, 곽씨 삼성의 요선계 계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세운 정자라고 하니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지만

조선 19대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숙종이 직접 하사한 어제시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에 봉안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은 일본인 주천경찰서장의 소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인이 숙종의 어제시를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낀 요선계 회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여 어제시를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서 요선정을 건립하였다.

 

 

 

 

요선정의 앞에는 높이가 3.5m에 이르는 고려시대 마애불좌상이 있는데 암벽위에 부조로 새겨져있다.

불상은 살이 찌고 둥근 얼굴에 눈, 코, 입과 귀가 큼직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상체에 비해 앉아 있는 하체의 무릎 폭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체의 길이도 너무 길어 신체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도 두꺼워 신체의 굴곡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가 앉은 대좌 역시 무릎 폭에 맞추어 큼직하게 조각되어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 주름과 신체 각 부분의 표현이 형식화되어 있어 고려시대 지방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강원도에는 이처럼 암벽면을 깎아서 만든 마애상의 유래가 매우 드문 실정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비록 역사가 짧고 규모도 작지만 숙종대왕이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해 수주면의 원씨, 이씨, 곽씨

삼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의 역사의식과 정성이 담겨 있어 역사가 매우 큰 정자, 요선정.

주천강가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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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자랑거리 한반도지형을 돌아본 후 

그곳에서 약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선돌이 있는 영월군 방절리로 향했다.

해발 320m의 소나기재 정상 휴게소에 잠시 주차를 하고

나무 데크가 잘 갖추어진 오솔길을 따라 5분여를 걸어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기묘한 모습의 바위 두갈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전망대 아래 두갈래로 갈라져 우뚝 솟아있는 높이 70여m의 바위는 선돌(立石).

서강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한국화가 펼쳐져 있는 것 같다.

혹자들은 이 선돌을 신선암(神仙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풍경이 보는 이들에겐 마치 신선경같았던가 보다.

 

 

 

 

전망대 바로 옆 소나무숲 옆에 2m 정도 높이의 철제 계단이 준비되어 있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망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한사람 정도 올라가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이런 계단은 

아마도 더 좋은 앵글을 원하는 사진가들을 위한 누군가의 배려인가 보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는데 

선돌 아랫동네 남애 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 패하자

이곳 선돌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이루어진다는 믿지못할 설화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현재의 38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선돌 밑으로 옛길인 신작로가 있었다는데

이 옛길에는 고종 42년 1905년에 목탄차가 다닐 수 있도록 석축을 쌓아 확장했던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光武九年李春和排路修勅乙巳二月一日>(광무9년이춘화배로수칙을사2월1일)라고 자연석에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또 1820년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 생활을 즐기던 오희상, 홍직필 등

세사람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붉은주색(朱色)을 칠한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선돌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서강(평창강)은 정말 푸르고 깨끗하게 보인다.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감아 흐르는 영월군 남면 북쌍리와 마을 뒤로 펼쳐지는 산들의 곡선이 너무나 평화롭다.

홍이간과 그 벗들이 보았던 것처럼 구름이 걸린 선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한참을 머무르며 시 한수 남기고 떠났으련만......

 

1박2일 영월편에 나와 더욱 알려졌던 선돌은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이 주연했던 영화 '가을로'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 해. 저 아래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쳐지거든" 라는 김지수의 대사처럼 

선돌과 그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잠시 세상의 힘든 것들을 잊고 멍하게 빠져들게 하는 신기한 마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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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을 찾는 사람이면누구나 한번은 들리게 되는 곳,

그것은 한반도의 지형과 그 모양새가 꼭 같은 영월 선암마을이다.

차를 길가에 주차하고 내리니 관광객들을 위한 포차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 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리라.

포차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로 허기를 채운 후 전망대로 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는 산길을 오를 의욕조차 없어지게 했지만

그래도 목적지가 멀지 않다는데 용기를 얻어 오솔길을 조금 걸으니 금방 전망대가 나타났다.

 

 

 

 

 

아! 한눈에 보기에도 이건 한반도지형임이 분명하다.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 지형은 한눈에 보기에도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형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땅의 모양새만 한반도를 닮은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깊은 수심을 만들어

우리나라 강원도 땅과 깊고 푸른 동해 바다를 연상케 하고

남쪽으로는 평평하고 완만하게 펼쳐진 백사장이 남해안을,

서쪽으로는 들쭉날쭉한 사구가 우리나라 서해안의 들쭉날쭉한 해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신비하지 않은가!

사람의 손으로 빚은 것이 아닌데 이렇게 완벽한 축소 모형을 만들어내다니!

전망대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이곳에서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전망대 바로 앞에는 무궁화도 피어 있어 한반도 지형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는데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동해 울릉도쪽에서 커다란 뗏목 하나가 나타났다.

 

 

 

 

하얀 깃발을 올린 뗏목에서는 한복을 입은 사공이 세명이나 서서 노를 젓고 있는게 하닌가?

아니, 이런 횡재가 다 있나!

한반도의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멋진 뗏목의 모습을 놓칠새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거......앞에 있는 아줌마! 옆으로 비키소! 쫌!"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뒤로 돌아보니 십여명의 남녀 진사 군단들이 포진해서 나를 째려보고 있다.

분명히 먼저 와서 전망대에 서 있던 사람은 나인데 뒤에 온 사람들이 비켜 서라고 소리를 지르다니?

 

"저 뗏목은 우리가 돈 주고 연출한거란 말이요! 같이 찍으려면 돈을 내던가....."

그제서야 난데없이 나타난 멋진 뗏목이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순진한 필자.

"뗏목을 돈 주고 불렀으면 한반도지형 전망대까지 돈 주고 샀던가요? 별 소리를 다 듣겠네요!"

라고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올랐지만 항의의 말 한마디 시원하게 못 해주고

옆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가 슬며시 돌아 내려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는 돈주고 연출한 그림에 방해가 된다는 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나왔지만

한반도 지형을 조망하러 온 많은 관광객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자기네들끼리만 좋은 포인트를 선점하고  서서

시끌벅적 웃고 떠들며 서터를 눌러대던 무개념 남녀진사들에 대한 기분나쁜 기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필자 자신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 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연출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은 사진을 남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이날 찍은 사진이 SLR클럽이나 사진 카페에 올려져 많은 사람의 칭찬과 추천을 받았을지는 모르나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사진만 생각하는 사진가들에게는 '무개념 초보찍사'라고 불러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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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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