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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02 다시 찾아본 추억의 수학여행지 강릉 오죽헌 15


학창 시절 최고의 추억거리인 수학여행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다녀 오셨는지?

학교가 위치한 지역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대구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중학교 시절에는 통영, 거제 등 남해안으로
고등학교 때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대구에서 밤 기차를 타고 아침 나절에 강릉에 내려서는 다시 전세 버스로 갈아타고 강릉 일원을 돌아본 후
낙산사를 거쳐 설악산을 한바퀴 도는 대략 그런 코스였던 것.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학여행에서 유적지를 제대로 돌아보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선생님이 눈여겨 보라는 유적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맛있는거 사먹을 생각, 
밤에 숙소에서 친구에게 어떻게 장난을 칠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으니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어디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는건 당연한 결과인 듯......



수학여행 때에는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스쳐지나갔던 곳인 강릉 오죽헌을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 보았다.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 본 오죽헌은 마치 처음 찾아온 곳인 듯 새삼스럽고 생소하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인 율곡 이이(1536∼1584)와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난 유서깊은 집 오죽헌.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율곡 이이의 동상이 먼저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오죽헌에 들어가는 입구인 입지문까지는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릴적에는 "뭐 이렇게 많이 걸어가야 돼! 다리 아프게!"하고 불평이나 하곤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오...경내가 상당히 넓고 쾌적한게 좋은데?"하는 정반대의 생각이 든다.




입지문을 들어서니 너른 마당 저 편에 구오천원권에서 보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좌우를 둘러보니 방문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발 아래 청동으로 된 발판들이 눈에 뜨인다.




바로 지난번 <1박2일 도시여행 강릉편>에서 이수근이 수행했던
구오천원권 뒷면과 꼭 같이 사진 찍기 미션을 수행했던 바로 그 장소이다.

이 곳에서 발판을 밟고 서서 사진을 찍으면 구오천원권의 그림과 꼭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필자도 청동발판을 밟고 서서 구오천원권과 비슷한 시점으로 사진 한장 찍어보았다. 




지폐의 그림에 그려질 때엔 나무들이 담장에 미치지 못 할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이제는 훌쩍 자라 지붕을 넘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간의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오천원권 지폐의 전경을 담은 후 계단으로 올라가 오죽헌 안으로 들어가 본다.




문을 들어서나 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단청이 된 건물은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정화 사업 때에 어제각을 서쪽으로 옮기고 이 자리에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사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라고 하는데 날렵한 지붕선과 잘 어울리는 휘호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 이이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문성사 앞에 동쪽을 보고 앉은 건물이 바로 별당인 오죽헌.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인 오죽헌은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강릉의 선비인 최치운이 처음 세웠는데 그 아들 응현은 사위인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다시 사위인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이후 후손들이 계속 관리해오고 있다.



오죽헌의 온돌방은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용꿈을 꾸고 율곡을 잉태했다는 몽룡실이다.





집 주변에는 이렇게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줄기는 손가락만 하고 검은 색을 띤 대나무가 바로 오죽(烏竹)이다.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이었던 권처균은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에게서 이 아름다운 집을 물려받았는데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권처균은 자신의 호는 물론이고 집 이름도 검은 대나무에서 착안하여 ‘오죽헌’이라고 지었다고......

오죽헌의 상징인 검은 대나무인 오죽의 그림이 율곡 이이 초상, 오죽헌과 함께 오천원 신권 얖면에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율곡은 소나무를 좋아하여 소나무 예찬도 지었는데 오죽헌 마당에 있는 이 나무는 율곡송이라 명명되었다. 




마당에는 이렇게 수령이 600년이 넘은 배롱나무도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600년이 넘은 나이이니 오죽헌 마당을 뛰어다니는 율곡 선생의 모습도 지켜보았을 배롱나무이다.





안채에서 서쪽으로 난 문으로 나가면 날아갈 듯한 처마를 머리에 인 사랑채가 그 날렵한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별당인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하고 다 철거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사랑채는 별당인 오죽헌과 함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툇마루에는 이렇게 하얀 주련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끄는데 이 주련의 글씨는 놀랍게도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라고......!




사랑채를 지나 오죽헌의 가장 서쪽으로 가면 어제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어제각은 율곡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과 그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여 놓은 집이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벼루를 궁궐로 가져오게 하고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바로 어제각(御製閣)이다.
구 오천원 앞면에 율곡 이이의 초상과 함께 율곡이 쓰던 벼루가
도안 그림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귀중한 벼루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딩 시절 수학여행으로 와서 주마간산격으로 스쳐지나갔던 강릉 오죽헌.
분명히 이곳을 다 돌아보고 돌아갔으련만 오죽헌 뒤의 대나무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본 오죽헌은 처음 만나 본 듯 새롭기만 하다.
아무런 의욕없이 다만 선생님에게 등 떠밀려 돌아보았던 오죽헌이었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본 오죽헌은 새로운 추억의 수학여행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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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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