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 고도 경주에는 신비한 우물들이 많다.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 첨성대의 모양이 우물을 닮아 있을 뿐 아니라
신라 시조 박혁거세도 '나정'이라는 우물 옆에서 발견되었으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도 또한 '알영정'이라는 우물 옆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재매정(財買井)' 또한 김유신과 관계있는 신비한 우물이다.

644년(선덕여왕 13년)에 소판(蘇判)이 된 김유신은 연달아 여러 차례 백제와의 싸움에 출정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만날 틈도 없이 곧장 다른 싸움터로 보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645년에도 백제 7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데 백제군이 또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서쪽 국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마침 장군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있었으나 장군은 집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참 가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병사를 시켜
집의 재매정(財買井)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했다.
병사가 급히 재매정의 물을 떠 오자 장군은 그 물을 마시고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말한 뒤 그대로 말을 몰아 계속하여 가던 길을 다.

이렇게 가족과의 이별을 한탄하지 않고 의연하게 싸움터로 나가는 김유신의 태도를 보고
부하들은 “장군이 저럴진대 어찌 우리들이 이별을 슬퍼하겠는가?” 하며 사기충천하여 전쟁에서 대승했다고 전한다.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는 월성 서쪽 너른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금으로 장식한 39채의 금입택(金入宅) 중 하나였다.





현재는 재매정이라는 우물과 드넓은 집터만 남아있을 뿐 생가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세월의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고 이곳을 사적 제246호로 지정하였다.





생가터의 우물은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깊이는 약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을 덮은 두개의 화강석 사이로 아래를 보니 바로 아래 우물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이 보인다.
비록 지금은 덮개를 덮지 않아 바람에 날린 티끌들이 물 위에 떠 있지만
천사백년전 당시에는 출정하는 김유신 장군의 타는 목을 적셔줄 만큼 충분히 시원한 생수였으리라.
강산이 변하고 변하여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장군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던 우물은 아직도 물이 그득하게 고여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기에 들여다 보니 '신라태대각간개국공김선생유허비'라고 쓰인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은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라고 한다.




세월은 흘러 김유신 장군의 목을 축이던 우물 재매정은 제 구실을 하지 못 하고 있지만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김유신 장군의 충절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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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유채가 노란 얼굴을 내어밀 때 쯤 의례히 반월성을 찾는다.





유채밭을 지나 반월성 넓은 궁궐터에 서니 저 멀리서 초딩 수학여행단이 한떼로 걸어온다.
'오.....경주에 수학여행 와서 반월성에까지 올라오는구나. 아이들에게 또 다른 추억이 되겠는걸?" 생각하며
옆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생각 외로 얼굴이 불만들이 가득하다.
선생님 뒤를 따르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아.......씨.....! 아무 것도 없구만.....! 여기 뭐 있다고 여기까지 올라와! 더워 죽겠는데 이런데 오고......"
선생님은 듣는 둥 마는 둥 갈길을 가고 아이들은 끌려가듯 발을 질질 끌며 간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이동산 가는 것 밖에 관심이 없으니 유적지 따위야 관심이야 있으랴......
아이들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반월성에 오시는 분들 중 이런 실망을 안고 돌아보시는 분이 많다.
신라 궁궐터라고 하기에 뭔가라도 있을까...해서 올라오지만
보이는 것은 휑......하니 넓은 잔디밭 뿐, 가운데 궁궐 초석 몇개만이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가운데 위험한 지형지물이 없기 때문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는 제격이지만......





드넓은 반월성엔 고작해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빙고 하나 달랑 있을 뿐 볼만한 것은 사실 별로 없다.





하지만 사실 반월성은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니.......





보통 반월성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의 정식 명칭은 월성(月城)이다.
반월성(半月城)을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면 반달 모양의 성이라는 뜻인데, 스카이뷰에서 보시는 것처럼

반달 모양의 언덕 위에 성곽을 둘러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그런 애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재성()이라고도 불리웠던 월성은 삼국사기에 보면 성의 주위가 1,023보()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월성터는 원래 충신인 호공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BC 19년 박혁거세, 석탈해가 금성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사적 제16호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제쳐두더라도
봄날의 반월성은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멋진 추억을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반월성 앞 너른 초지에는 각가지 야생화를 비롯하여 노란 유채꽃이 화사하게 피어 가족과 연인들을 향해 손짓하고

반월성 언덕을 돌아가며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은 꽃에 취한다는게 어떤 것인지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반월성 언덕 뿐 아니라 반월성터 안쪽에도 이렇게 수령이 오래 된 벚나무들이 우거져있어 벚나무 그늘에서 쉬어갈 수 있고





일반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반월성 남쪽으로는 이렇게 남천이 고요하게 흘러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기도 한다.





신라 역사의 산 증인인 반월성은 사극 영화 촬영지로도 많은 러브콜을 받는 곳이다. 




서라벌을 무대로 한 MBC드라마 '선덕여왕'을 비롯하여 '동이''김수로' 등....많은 사극들이 반월성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는데

영화 촬영이 있는 날엔 어둡고 조용하던 반월성의 밤도 생기가 넘치게 되고 주변 나무들도 환한 색깔로 다시 살아난다.




천년의 영화를 누린 신라의 궁성인 반월성,
옛 노래처럼 지금은 비록 빈 터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반월성 곳곳에는 그곳을 거닐던 신라인의 숨결이 살아 있다.

비록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천년고도 신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반월성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이야기 속의 왕자와 공주가 되어 이 고즈녁한 황성옛터를 거닐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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