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의 최종'병기 김춘추.
도대체 누가 주연이고 조연인지 모를 만큼 드라마에서 덕만보다 춘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한데
활짝 웃는 유승호가 클로즈업되며 드라마가 끝나면 보는 사람 또한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를 짓게 된다.
너무나 훈훈하게 자라준 유승호를 보면서 흐뭇하지 않은 여성 시청자는 별로 없을 듯 한데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고 하니
춘추 역으로 유승호를 기용한 것은 정말 완벽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신라 제 29대 임금으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춘추....
아버지는 금륜태자의 아들 용수공이며 어머니는 어머니는 진평대제와 마야부인의 딸인 천명공주이다.
어린 시절에는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며 사색이 깊은 아이였으나 권력 관계와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으므로 
춘추의 커다란 뜻을 간파한 유신은 그를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받들고 군(君)으로 받들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연대는 춘추가 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함으로 더욱 돈독해지게 되고 이어 두사람은 세력을 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게 되는데...
 


그럼...춘추가 문희와 결혼하게 된다면 선덕여왕 37회에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는 보종의 딸 보량은 어떻게 된건가?
춘추와 보량 사이의 러브 라인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고 두사람의 애정 전선에는 이상이 없어 보이던데 ....
그렇다. 쉽게 말하면 신라의 미소년 공자 김춘추는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였으니 절묘한 '양다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겠다.



아끼던 명마의 목을 단 칼에 자를 정도로 결단력이 있던 김유신에게는 보희, 문희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유신의 동생 보희는 '서악(경주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온 서라벌이 오줌으로 가득 차는 꿈을 꾸게 된다.
보희는 참으로 망칙하고 불길스러운 꿈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문희는 즉석에서 보희가 꾼 꿈을 사겠다고 제안한다.
불길한 꿈을 팔게 되어 기뻐한 보희는 무엇을 주고 꿈을 사겠느냐고 물으니 보희는 '비단치마'를 주겠다고 답한다.
흡족한 거래가 성립되어 문희가 옷깃을 벌리자 보희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고 말했고 문희는 보희의 꿈을 정식으로 사게 된다.

당시 비단치마는 국제 무역을 통해 수입되는 고가품이었는데 
'삼국유사'는 태종 무열대제 때의 포목 한 필 값이 벼로 30섬 혹은 50섬이라고 적고 있으니
지금 시가로 따져서 수백만원쯤 되는 포목보다 훨씬 비싼 비단치마를 꿈값으로 치룬 것이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망칙하게 들릴 수 있고, 개꿈이라고 버릴 수도 있는 꿈을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문희는
보희가 꾼 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열흘 후 유신은 춘추와 함께 축국(蹴鞠,제기차기)를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고름을 떨어지게 한다.
이에 유신은 자기 집에 가서 옷고름을 꿰매기를 청하며 춘추를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유신은 보희에게 춘추의 옷고름 수선을 맡기고자 하나 보희가 병중이었으므로 이에 문희가 나아가 바느질을 해주게 된다.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옷을 바느질할 때에 '일부러 피하고 보지 않았다'고 하니
여동생을 매개로 하여 춘추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려고 하는 유신의 전략이 잘 드러나 보이는 부분이다.
유신이 깔아준 멍석....아무도 없는 집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불붙게 되고 1년쯤 지나자 문희는 임신을 한다.


이때 이미 춘추는 보종의 딸 보량(보라궁주,宝羅宮主)와 결혼해서 딸 고타소를 낳은 상태였다.
보량은 매우 아름다웠으며 춘추와 매우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는데 당시 춘추는 보량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량으로 인해 춘추는 임신한 문희를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할 뿐 아니라 문희를 멀리하게 된다.


 김유신의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 재매정(財買井). 유신의 집터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도산은 지난 5월 9일 일어난 산불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문희를 멀리하는 춘추의 태도에 다급해진 유신은 자신의 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신라 최대의 불쇼'를 벌이게 되는데
사전 계획에 따라 자신의 집 마당에 장작을 높이 쌓아놓고 임신한 문희를 꿇어 앉히고는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어찌 된 일이냐?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
하며 크게 꾸짖으며 어름장을 놓아도 데 문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유신은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온 서라벌에 소문을 퍼뜨린다.

그 때 춘추는 덕만을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는데 유신의 집에서 연기가 하늘로 자욱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공주가 유신의 집에서 나는 연기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좌우에서는 유신의 누이가 부모의 허락 없이 아이를 가져 화형에 처한다고 아뢴다.
이에 덕만은 누구의 아이냐고 되묻자 옆에서 듣고 있던 춘추,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며 용서를 구한다.
덕만에게서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는 질책을 들은 춘추는 
황급히 유신의 집으로 가서 화형 당하려는 문희를 구하게 되고 이에 포사(鮑祠,포석정)에서 길례를 행하여 문희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얼마 안 있어 보량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고 문희는 보량의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니 문명황후(文明皇后)이며
그녀의 장자인 법민은 바로 문무대제(文武大帝)이다.

김춘추의 정실 부인이 되었지만 유신과 문희는 춘추의 배신 행위에 대한 앙금이 오래 갔다고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진정으로 화해한 때는 선덕여왕 11년(642)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백제군에게 전사했을 때이다.
고구려 사신길을 자청한 춘추가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가서 저들에게 해를 당한다면 공은 무심할 것인가?"라고 묻는데
매부가 죽어도 가만히 있겠느냐는 말은 둘의 관계가 정상이 아님을 뜻한다.
이에 유신이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의 말발굽이 고구려, 백제 두 임금의 대궐 마당을 짓밟아버릴 것"이라고 답하여 
둘은 화해하게 되는데 이는 곧 신라 왕실의 핏줄과 가야계 군사력의 결합이기도 했다.
그 결과 김춘추는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 뒤를 이어 신라 29대 왕에 등극,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는다.


후일의 역사서에서는 남성들의 사적만이 기록되어 있지만 춘추와 유신의 정치적 결속에는 문희의 활약이 지대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가의 비단치마를 아낌없이 투자한 그녀의 비젼은 훗날 김춘추와 그녀의 자손들이 대대로 신라 왕실을 장악하는 위대한 유산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문희는 진정으로 멀리 내다 보는 혜안을 가진 슬기로운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통찰력이 부족하여 자신이 꾼 꿈을 비단치마와 바꿔버린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이에 춘추는 보희도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과 개지문을 낳았으니 김춘추는 문희,보희 두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맞아들인 셈이 되는데
유신, 춘추, 문희, 보희를 주축으로 벌어진 이 이야기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같은 신라 최대의 리얼 스캔들이다.

드라마에서 현재 보량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춘추.
41회에서 춘추는 보량을 납치하듯 자신의 근거지로 데려오고 보량과 춘추의 결혼 문제로 세종 측과 설원랑 측은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앞으로 드라마의 전개가 어떻게 펼쳐질른지는 작가의 펜끝에 달려 있지만
선덕여왕에서 춘추와 보량, 문희의 삼각관계는 시청자에게 기다려지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보량역의 박은빈은 성공적으로 시청자에게 얼굴을 선보였는데 문희역의 배우역에는 또 누가 캐스팅될른지...?
벌써부터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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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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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은 조연들의 활약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드라마이다.
얼마전 백제군과의 아막성 전투씬에서 용맹함과 카리스마있는 지도력을 보여
단연 검색 순위상위에 랭크된 알천랑을 비롯해
샤방샤방한 풍월주 호재,
카리스마 호위 무사 대남보등의
10화랑이나 미실을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는 꽃중년 설원랑,
코믹 연기를 담당한 죽방, 고도 등 드라마에서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무르익은 연기를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그 중에서도 미실의 동생으로 출연해서 매번 얄미운 <썩소>로 
시청자에게 각인된 미생(美生) 정웅인을 미실궁 세트장에서 만나 보았다.





원래 꽃미남으로 서라벌 일대를 주름잡았던 미생이 맡은 배역인지라 정웅인의 의상 또한 화려하고도 품위가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기보다 실제 모습은 훨씬 멋지고 풍채도 당당하다.





이요원,고현정,엄태웅 같은 주연급 배우들은
일반인이나 기자는 물론 스텝들에게도 사진 찍히는걸 완강히 거부하는 통에 사진 찍기가 정말 어려운데 반해
정웅인은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요청에 기꺼이 허락하고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야간이라 조명이 너무 어두워 플래쉬를 터뜨리며 몇 장 눌렀더니 
"플래쉬 안 터뜨리면 더 잘 나오는데..."하고 코치까지 해 준다...ㅎㅎ





어설픈 사진 애호가인 필자의 셔터 세례에도 정웅인은 즐겁게 여러번 포즈를 바꾸며
카리스마있는 표정, 재미있는 표정, 귀여운 표정을 번갈아 지어 주어 진정한 연기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톱스타들이 간혹 보여주기도 하는 폐쇄성 같은 것은 도무지 찾을 수도 없었고 
마치 자주 만난 옆집 아저씨같은 소탈함과 친근감을 그에게서 느낄 수가 있었다.





정웅인은 드라마 매회에서 코믹한 모습과 절제된 모습을 동시에 갖춘 미생의 캐릭터를 확실히 보여주는데
8년만에 재도전하는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연극 무대에서 다져진 안정된 연기력을 맘껏 발휘하여 
드라마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감초연기자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라며...
여러가지 즐거운 표정과 포즈로
기꺼이 초보 사진사의 모델이 되어주신 멋진 정웅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정웅인의 배역인 '라벌 최고의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던  '미생(美生)' 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화랑세기 10대 풍월주 十世 美生郞 (10세 미생랑) 편>에서 중략하고... 생략하여...  요약해 보았다.

서기 550년에 태어난 10세 풍월주 미생랑(美生郞) 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아시다시피 미생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인데 
진흥대제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은 까닭에 미생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제는 여러번 불러 입궁시켜 동륜태자,금륜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우게 하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고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공주들과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다.
이에 진흥대제가 문초하려 하자 사도황후가 비호하였고
진흥대제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미실의 명을 받아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가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라 말에 오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미진부공이 그를 화랑에서 쫓아내려 했지만 미실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문노는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 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하며 내치려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미생을 싫어했고 미생 또한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에 사다함이 곤란하였다.

미실의 남편 세종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생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서기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미생의 나이는 이미 36살이었고
3년 동안 풍월주의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니 하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미생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래 사람의 마음을 몰랐고
성품 또한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화랑도으로 있었기에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만여명이라 함) 모두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기에 유화((遊花)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고 
미생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미생을 천간성(天奸星)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거할 때도 시첩 수십인이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고 하니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고 하고
진(陳)나라의 사신은 이르기를 자기 나라에도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른바 서라벌 최고의 플레이보이라고 할 수 있다.

미생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는데 미생의 아들인 백생(白生)·월생(月生)·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고
드라마에서 미실의 호위무사로 등장하는 백호비도의 수장인 화랑 '대남보'도 미생의 아들이다.

미생이 백명이나 되는 아들을 사랑하는 정은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는데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품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어머니 묘도부인을 뵈러 갔는데 묘도부인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미생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라고 물으면
미생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주었기 때문에 여러 아들이 미생을 사모하여 따랐다.
미생은 매번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출근하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으므로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지만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미생이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생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생의 노비가 미생의 옥배를 훔친 일이 있는데 미생이 처벌하려하자
노비는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미생의 어머니 묘도부인이 미생을 보고 꾸짖어 
"노비는 수족이요,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부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현사(賢士)를 높이고 무리를 사랑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고 하였더니
미생은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 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하였더니 도둑질은 이내 스스로 그쳤다.

또 미생은 일찍이 동륜태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 다녔는데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를 맺었다.
동륜태자가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죽고 난 후 미생은 당두의 처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 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미실이 곧 미생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고 꾸짖었다.
미실의 말을 들은 미생은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자는 미생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는데 미생은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미생은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였다.
미생은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미생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미생이 조부(調府)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진평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리자 미생은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고 하였다.
당두의 처는 미생의 세 아들을 낳았는데 미생은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일을 서라벌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겼다고 한다.
미생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며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묘도부인은 사도 태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서
미생을 비롯한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미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색공지신(色供之臣: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 하였다.
미생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은 것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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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기 60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6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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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고 부귀로운 화류(花柳)의 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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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화랑세기'는 1989년에 발견되어 오랜동안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책.
원자는 김대문인데 그에 의해 화랑세기가 쓰여진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보는 사람은 자기들이 알고있는 신라의 모습과 따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
당시에 사용하지 않던 글자들이 있다는 점등을 들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화랑세기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삼국사기 자체가 신라인 후손에 의해
유교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므로 신라사회를 미화했을 수 있으며
그밖의 다른 유물들을 볼때 화랑세기에 나타난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풍속등은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사회의 자유로운 성풍속은 성행위를 묘사하는 각종 토우들이나 성적인 장난감, 삼국유사의 직접적인 성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 이후 유교의식에 젖어 있던 우리네 상식으로는 여성의 지위가 생각 외로 높았던 신라 사회와 
조선에 비해서 너무나 자유로웠던 신라사회의 성의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든 아니든 화랑세기에 그려져 있는 10대 풍월주 화랑 미생은
드라마에 비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간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여자와 돈을 밝히고 향락에 치우친 불성실한 인간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의리 빼면 시체인 
전형적인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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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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