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에 위치한 하회마을은 '하회(河回)'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마을 전체를 감싸 돌아 '물도리마을'이라고 불리우는 마을인데
하회마을에서도 가장 안쪽인 소나무 숲 맞은 편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부용대(芙蓉臺)'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화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용대는 강변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이용해 건너갈 수 있는데
불어난 강물로 인해 나룻배가 운행치 않아 하회마을에서 벗어나 승용차를 이용해 먼길을 돌아 부용대로 향한다.


부용대 입구엔 화천서원(花川書院)이라는 제법 큰 규모의 사원이 자리잡고 있는 이 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맏형인 류운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유도문, 누각인 지산루, 강당인 숭교당이 좌우에 동서재를 거느리고 있어서 병산서원과 거의 같은 배치를 보이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이는데 
100 여년 동안 이어 내려오던 화천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96년에야 복원되었다.


화천서원 앞에 차를 주차하고 좀 걸어가니 서애 유성룡 선생이 건립한 옥연정사(玉淵精舍)가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정사(精舍)란 학식 높은 유학자가 학문을 강의하고 정신을 수양하던 곳을 이름인데


옥연정사는 류성용 선생이 만년에 임진왜란 때의 일을 추억한 징비록을 저술한 곳이니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옥연정사의 문을 지나 부용대로 오르니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치긴 했지만 심한 안개가 끼어 시야가 분명치 않고 뿌옇게 흐려기만 하다.


64m 높이의 절벽인 부용대 정상에 오르니 햐아.....하회마을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바로 아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하회마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방금 앉아서 쉬다 온 소나무 숲도 발을 디디면 사뿐히 내려설 수 있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부용대 정상에 서서 하회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니 아하.....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차 트렁크에 삼각대를 넣어두고 그냥 온 것이다. 좀 무겁더라도 삼각대를 가져와야 파노라마로 담을 수 있는데....
삼각대가 없으니 할 수 없이 선 자리에서 몸을 비틀어 화회마을의 전경을 이리저리 마구 담아본다.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고 손각대로 찍은 사진 4장을 붙여 억지로 파노라마를 만들어 보았다.
이어지는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미지가 많이 틀어진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부디 너그럽게 보아 주시길....

집에서 출발할 때 "모처럼 출사인데 웬 비...."이렇게 생각하며 궂은 날씨를 원망하며 나섰는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회마을을 둘러싼 강과 산에서 신비로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정경 앞에 서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카메라를 든 손마져 떨릴 정도로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절벽 끝으로 조심스럽게 더 다가서서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헉....64m 라고는 하지만 체감되는 엄청난 높이로 인해 발바닥이 짜릿짜릿하다.


강물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물내음을 맡으며 부용대의 시원한 경관에 취해 멍 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맞은편 산에서 피어오르던 물안개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회마을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당황하며 어....어.....하는 동안 순식간에 하회마을은 물론이고 발 아래 강물과 숲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뿌옇게 흐려지고
부용대 정상으로도 물안개가 자욱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채 5분도 안 되어 발 아래 강물이 안 보일 정도로 주변이 안개로 가득해진다.
이미 4시를 넘어 5시가 가까워지는데 안개가 몰려오며 주변이 어두워지니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서둘러 부용대를 내려온다.


부용대 아래로 내려와 절벽 위를 바라보는데 바위가 꿈속의 장면처럼 희미하게 보이니 갑자기 머리와 눈 앞이 몽롱해지며
지금 이 자리에 선 나는 현실의 나일까....꿈 속의 나일까.....하는 착각마져 들기도 한다.


안개로 인해 부용대를 내려왔지만 그냥 발길을 돌리기엔 너무나 아쉬워 인적 하나 없는 강변을 거닐어 본다.


절벽 바로 아래에는 이렇게 수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그림같은 바위도 있는데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강변 모래톱에 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너무나 몽환적이다.


발길을 옮기지 못 하고 가만히 물안개를 바라보고 있으니 구름 낀 하늘, 물안개, 건너편 마을의 불빛이 모두 강물에 그대로 어린다.
하늘의 구름, 물 속의 구름.....땅 위의 물안개, 물 속의 물안개.....모두가 그대로 한폭의 멋진 데칼코마니다. 


처음 오른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의 정겨운 파노라마, 뭉실뭉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건너편 산의 장엄한 모습,
저녁 무렵 강물에 어리는 산과 구름, 물안개......꿈인지 현실인지 모든 것이 너무나 몽환적이다.
해지기 전에 하회를 벗어나리라 생각했던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떼어지지 않고
하염없이 건너편을 응시하다 그만 그 자리에 털석.....주저 앉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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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드라마 '추노'의 자취를 찾아 안동과 영주로 떠난 날,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는 비가 그다지 달갑지 않다..
먼저 추노의 주촬영지인 병산서원을 돌아보고 화회마을로 들어서니
빗속이라 관광객들도 뜸하고 마을은 고요하기만 하다. 

                           

 얼마전 1박 2일 안동편에서도 소개되었던 하회마을.
3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의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서
화회마을 어귀에서 시청자들과 줄넘기를 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씨족 마을로 유운룡, 유성룡 형제 대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다.
'하회(河回)'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마을 전체를 감싸돌아 '물도리마을'이라고도 불리운다.


1999년 영국 엘리바베스 여왕이 방문하여 더욱 명성을 얻게 된 이 마을은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민속마을인데

아쉽게도 요즘은 대부분의 마을집이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등
너무나 상업적으로 치우쳐 찾는 이를 씁쓸하게 한다.

 

몇번이나 다녀갔던 마을 구경은 간단히 건너뛰고 마을 끝부분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향한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눈을 들어 맞은편을 보니 소나무 숲 맞은 편에 펼쳐진 64m 절벽, '부용대(芙蓉臺)'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부용이란 연꽃을 이르는 말로써 처음에는 북쪽에 있는 언덕이란 뜻으로 '북애(北厓)'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솔밭을 지나 하회나루터로 내려서니 발 아래 넓게 펼쳐진 강변의 모래는 곱기만 하다.
 


평소에는 여기서 나룻배를 타고 강건너편 부용대로 오를 수 있으나
오늘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난지라 아쉽게도 나룻배를 이용할 수 없다.



강 너머로 자세히 살펴보니 너무나 운치있는 고택들이 부용대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동쪽에 위치한 고택은 '옥연정사(玉淵精舍)'로
서애 유성룡 선생이 건립한 정사(학식높은 유학자가 학문을 강의하고 정신을 수양하던 곳)인데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의 일을 추억한 '징비록'을 저술하였으니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는 곳이다.



서쪽에 위치한 고택은 '하회겸암정사(河回謙菴精舍)'로
유성룡 선생의 맏형인 유운룡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을 위해 세운 것이다.



드라마 '추노'를 보면 많은 장면들이 화회마을 인근의 낙동강변에서 촬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사극에서 등장하지 않은 곳을 화면에 담기를 원하는 곽정환 감독의 로케이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4회에서 운신해있던 사찰을 빠져 나와 대길과 백호의 추격을 피해
나룻배로 강을 타고 내려가는 장면이 부용대 바로 앞에서 촬영되었다.

강을 건너지 못한 대길, 최장군, 왕손이 먼 길을 돌아 세차게 말을 몰고 달려오던 강변은


역시 부용대의 서편으로 하회겸암정사의 바로 앞 강변이다.
먼 길을 달려와 송태하와 언년이가 탄 나룻배를 향하여
애기화살을 겨누는 가슴 조마조마한 장면을 촬영한 곳도 바로 부용대 앞.

대길의 어깨 바로 뒷편에 옥연정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대길이 서서 활시위를 당기던 곳에 서서 한컷 담아 보았는데 궂은 날씨로 인해 하늘이 하얗게 다 날아가버려 아쉽기만 하다.


강편 서쪽으로 한참 걸어와 부용대와 낙동강 동편을 바라본다.
대길의 화살 공격을 간신히 피하고 뱃사공(김경진 카메오 출연)도 내친 후
유유히 노를 저어 하류로 사라지는 송태하와 언년이의 모습이 기억에 남던 곳이다.



한떨기 연꽃같은 하회마을 부용대. 비가 와서 파란 하늘 아래 버티고 선 부용대는 담지 못했지만
맑은 날 본 부용대와는 또 다른 운치있는 느낌으로 보게 되었으니 비오는 날 나선 추노 여행은 도리어 행운의 여행길인 듯.....


다만 비가 내림으로 인해 나룻배를 이용해서 부용대를 오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아
자동차를 이용해서 한참을 돌아 부용대에 오르는 코스를 택하고 서둘러 하회마을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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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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