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선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6.16 일본에서 만난 턱받이 두른 불상 26
  2. 2009.11.25 대마도에 남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 46


 


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부터이다.
그들은 외교적, 상업적 동기에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특히 대마도(쓰시마)사람들이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고 한다.
조선의 역관들은 다른 나라로 유학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역관들은 초량 왜관에 와서 유학을 하며 조선어를 배웠다.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의 남자의 반이 일생에 한번은 조선에 왔다고 하니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어에 능통했던 것 같다.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에서 보면 건너편 산 중턱에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광청사이다.
서산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청사는 길에서도 경사가 급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광청사(光淸寺,고우세이지)는 1727년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학교가 있던 건물이다.

이 조선어학교의 수업은 하루 4시간씩. 매월 27일은 시험을 쳤다.

교재는 1학년 <교린수지> 2학년<전일도인> 3학년<인어대방>이란 책이었는데 통역사 양성이 목적이었는데

교사는 인위문길(仁位 文吉)이라는 20세의 전문통역사였다.

 

 

길에서 광청사 입구까지는 약간의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므로 입구에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다.

지팡이에 붙어 있는 명찰에는 좌수용,우수용이라고 쓰여져 있다.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구별하여 지팡이를 구비해 놓은 것도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절 본당에서 1872년 10월 25일 '한어학소(韓語學所)'가 개소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통역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마도에서 조선어는 매우 인기가 높아 입소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1873년 8월 2일까지 1년간 대마도 고위층 자제 34명을 입소시켰는데 그들 중 10명이 10월 16일 조선말을 더 잘 배우기 위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왔다. 초량 왜관 내에 '초량관 어학소'를 만들었으니 한어학소의 전진 배치였던 셈이다.

 

이들이 이후 경복궁을 드나들며 한일 합병의 통역관 겸 정보원 역할을 했으며 1895년 민비 시해사건 때 투입된 자객들 중에 낀 통역 2명이 이 어학소 출신 대마도인이었다. '초량관 어학소'는 1880년 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자동 폐소되었다.

 

현재 대마도 소학교에서는 5,6 학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어과를 설치해 교육하고 있고 한국인 원어민교사가 있다고 한다. 대마도 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물놀이를 학습하고 있으며 곧 태권도도 가르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조선어학교...이제는 상생하는 이웃이 되기 위해 선하게 쓰여지기만 바랄 뿐이다. 

 

 

광청사를 나와 수선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는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개인 사찰이라 최익현 순국비에 참배키 위한 한국 사람 외엔 거의 찾는 사람도 없는 절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인데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높이 9.5cm의 신라 동조여래현좌불상이 있으며 최익현선생의 순국비와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신라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비각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어서 확인할 수도 없다.

 

 

수선사 내에 있는 '대한국인 최익현 순국지비'. 최익현은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은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수선사에 지장보살이 단체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장 보살들이 여러 가지 무늬의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전번에 서산사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래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의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부모들은 어린 영혼을 지워 버린 몹쓸 짓을 한 자기들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치장을 한다.

 

그리고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어린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다. 

(이 코딱까리만한 지장보살은 서산사(세이잔지)정원에 있는 지장 보살이다.) 

 

가는 곳마다 턱받이로 장식한 지장 보살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만제키바시(만관교) 다리 옆 숲에 있던 지장 보살들은 하나같이 파란 색깔의 턱받이로 치장하고 있었다.
 

 

뒤에 광배가 있는 수선사의 이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선 한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일본의 부처는 석가모니불조차도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화꽃 턱받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본인들의 불심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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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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