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도 올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수많은 문화 유산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 역사지구' 안에는 톱카프 궁전 문을 나서면 성 소피아 성당이요, 그 맞은 편은 블루 모스크, 바로 옆은 히포드롬, 바로 아래는 지하 궁전, 조금 걸어가면 그랜드 바자르....이렇게 역사적인 볼거리로 넘쳐나니
이스탄불에 한번 발을 붙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기를 아쉬워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히포드롬이 있던 '술탄 아흐멧 광장'은  가히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데 광장 중앙에 있는 고대 유적들과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터키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유적들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영화 '벤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륜 마차 경기장'을 말하는 명칭이다. 이 경기장은 도시를 정복한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AD 2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틴 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여 완성하였다.
                                               
한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를 한 히포드롬은 길이 480 m에 넓이가 120 m로 로마의 시쿠스 맥시무스 다음으로 큰 경기장(히포드롬)인데 'U'자 형태의 경기장을 중심으로 최대 10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청팀과 녹팀으로 나뉘어 응원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치,종교적으로까지 대립하여 갈라진 두 팀은 히포드롬에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전형적인 히포드롬은 언덕을 파헤쳐서 만들어졌으며, 굴착된 흙은 반대측의 관중석을 지탱하기 위한 둑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이곳 역시 땅이 편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히포드럼의 서쪽 부분에 축대를 쌓았는데 마르마라의 해변로를 통해 광장 쪽으로 오면 웅장한 축대의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히포드롬의 기능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스포츠 및 예술 활동 장소여서 전차 경기 및 격투사들의 격투도 이곳에서 열렸다. 두번째 기능은 정치 무대로써의 기능이니 오스만 시대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폭동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세번째 기능은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서 훌륭하게 장식된 야외 박물관으로써의 장식의 기능이다.

 

 

실제로 중앙분리대에의 장식된 '스피나'에는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이집션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델피 신전에 있는 청동뱀 제단, 해시계 등 각종 기념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1204 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현재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에 장식되어 있다. 

 

 

 'U'자 형태의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기념물인 '스피나'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집션 오벨리스크'인데 '디킬리타쉬'라고 부른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전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테우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연한 핑크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이고 높이가 원래는 32.5m 였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부분의 40%가 깨어져나가 현재 높이는 20m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사면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의 용맹을 말해주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의 몇 개의 인물화와 글자는 수송 도중에 떨어져나갔다. 

 

 

 맨 아래 부분에는 AD 389년에 만들어진 대리석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의 사면에는 히포드럼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의 춤 추는 모습,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조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 행해진 그림과 글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부조되어 있다. 

 

 

 100년마다 한번씩 평균 6.5 강도의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집션 오벨리스크는 피해를 입지 않고 1,600 여 년간 이곳에 끄덕없이 있어왔다. 바로 옆에 보이는 미나레(첨탑)는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중 하나이다.  

 

 

히포드롬에서 두번째로 오래 된 기념물은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세워졌던 뱀기둥이다. 이 뱀기둥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AD 326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 곳에 세워 두었다. 뱀기둥은 세마리의 뱀이 몸을 서로 꼬고 올라간 모습이며 머리 위에는 직경이 2m가 되는 거대한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 

 

 

 그러나 이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오기 전에 벌써 분실되었으며 뱀들의 머리는 오스만 제국 때에 돌에 맞아 부서졌다. 이 머리 중에 하나는 1847년 성 소피아 성당 보수 공사 때에 발견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높이는 6.5m였으나 현재는 5m이다. 

 

 

 세번째 기념물은 콘스탄틴 기둥은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황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셀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히포드럼 광장의 중심에 세워 놓았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의 높이는 35m 이며 외부에는 원래 청동이 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접령한 후 청동을 떼어내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여서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1894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부셔졌던 이 기둥은 최근에 다시 복구되었다. 

 

 

히포드롬 광장에 있는 독일 분수(빌헬름 분수)는 이 곳에 있는 기념물 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 것이다.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황제 카이세르 빌헬름은 자신에게 보내 준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우아한 분수를 만들었다. 

 

 

이 분수는 그가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완성된 후에 기차로 이스탄불로 옮겨져 1898년에 히포드롬에 세워졌다. 

 

 

 분수의 안쪽 지붕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입혀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 준다. 

 

 

 이름은 독일 분수이나 분수의 기능보다는 샘 같이 보이는 분수이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길가 곳곳에서 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여행자들은 작열하는 땅 밑의 물이 그토록 시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이런 샘에서 나는 물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데 이런 물은 여행자의 갈증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술탄 아흐멧 사원 맞은 편, 히포드롬 맨 끝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때에 유일한 고관의 궁전 이브라힘 파샤 궁전이다. 

 

 

 이 건물은 1520년 술탄 슐레이만 대제가 국무총리였던 이브라힘 파샤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은 터키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륜 마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던 히포드롬 광장 주변의 오늘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넘쳐 난다. 

 


 히포드롬 옆 블루 모스크에 부속으로 딸린 건물들은 사원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바자르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어 왔다.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 나와 열심히 설명을 듣는 유럽인 단체 관광객들도 보이긴 하지만 이륜 마차가 달리던 히포드롬은 이제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아침 산책 코스가 된다. 경찰도 근무를 하는지.....노는지 모를 정도로 여유로와 보이는 이곳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낭만의 도시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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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카파도키아 세번째 시리즈로 괴뢰메 야외박물관에 남아 있는
수많은 동굴 벽화를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카파도키아에는 4세기 경부터 많은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9세기 경부터는 강한 이슬람 교도의 종교적 핍박을 피해 바위를 파고 동굴을 만들어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지역 일대에 바위를 깎아 만든 수많은 교회는 거의 3000 여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새 동굴에서 지하도시나 교회들이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고 하고
괴레메 야외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교회 유적 중에서 현재 방문자들에게 개방되고 있는 교회는 약 30 여 개 정도인데
뱀교회, 사과 교회, 바바라 교회, 샌달교회에서 담아온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들을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1,000년이 넘은 프레스코화 중에서는 이미 눈과 얼굴이 파이거나 긁히는 등 많이 훼손되거나 그 빛깔이 희미해져서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뱀교회(Yilanli  Church, Snake Church)는 교회 안 둥근 천정과 벽에 11세기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는데



그 중에 성 바실, 성 도마, 성 오노우프리우스, 성 데오도르가 뱀과 싸우는 장면이 있어 이 그림들로 인해 뱀교회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온다.



벽에는 예수의 초상과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의 모습의 프레스코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이곳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어머니 성녀 헬레나의 프레스코화도 그려져 있다. 

특히 벽에 그려진 성화 중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봉긋한 여인의 가슴을 가지고 섹시한 자태로 있는 그림이 이채로운데
한 예쁜 창녀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 후에 이전의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가지길 원하는데도
그의 아름다운 자태로 인해 여전히 많은 남자들에게 관심을 받게 되고 괴롭힘을 당하게 되자
남자들의 관심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날 남자의 거시기를 달게 되고
수염이 나는 등 남자의 모습을 갖게 되어 다른 남자들로부터 더 이상 추근거림을 당하지 않아서
이집트 사막에서 수도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정의 규모를 보면 짐작이 가듯 바위를 파서 만든 아런 동굴교회는 정말 조그만 규모가 대부분이다.


사과 교회 (Elmali Church ,Apple Church)는 더욱 규모가 작은 편으로 일대의 교회중 늦은 시기에 지어져서 내부의 프레스코화가 꽤 세련된 편이다.



12세기에 이루어진 사과교회는 동굴 속에 돔모양의 천정과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고 
1991년도에 복원되어 최후의 만찬, 십자가 처형, 천사 등을 그린 벽화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사과 교회'라는 이름은 예전에 문 앞에 있던 사과 나무에서 유래하였다고 하고  또는 그림속의 가브리엘 천사가 사과를 들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지어졌다고도 한다.



안타깝게도 프레스코화 인물의 대부분은 눈이 지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슬람교가 성상 숭배를 금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앙의 대상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배격했던 성상파괴주의 (Iconoclasism) 자들의 훼손 행위도 있었고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성상을 갈아서 마시면 전쟁에서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 너도 나도 성상을 훼손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사과 교회(Elmali Church)뒤에는 바바라 교회(Barbara Church)가 있는데
이 교회는 성 바바라에게 바치기 위해서 그린 그림 때문에 바바라 교회라고 명명되었다.


 
초기 성화는 어린 아이가 낙서해 놓은 것 같은 무늬로 그려졌는데
인물 보다는 마치 원시 벽화와 같은 십자가나 포도 송이,물고기 그림들이 주종을 이룬다.
이 교회 역시 성상파괴주의 기간 동안
교회를 실제 성상의 모습으로 장식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무늬로 대체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성화의 화가들은 카파도키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붉은 색의 황토를 재료로 동굴 벽 위에 직접 그렸다고......



개인적으로는 바바라 교회의 성화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원래 복잡한 것 보다는 심플한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겨지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성상 옹호 주의자들은 인물을 성화로 그렸는데 두 시대의 성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 바바라 교회이다.




바바라 교회의 성화도 얼굴은 문대어져서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샌들 교회(Carikli Church,SandalsChurch)는 11세기 경에 지어졌는데 문 안 쪽 바닥에 있는 샌들 발자국 때문에 샌들 교회로 이름지어졌다.



교회는 2층에 자리잡고 있어서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야 하고 아래층은 갤러리로 되어 있어 그당시 수도사들의 생활을 나타낸 성화들을 팔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는 그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고



유다의 배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승천까지의 성화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간략하나마 괴뢰매 야외 박물관에 위치한 동굴교회들의 성화를 소개해 드렸다.
이미 천년이 지난 성화들이라 훼손 상태가 심하기도 하지만
조명이 없는 동굴교회 프레스코화를 플래쉬없이 찍었기 때문에 사진의 상태가 좋지 못한 점 널리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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