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지세를 찾아나선 비담,
염종의 근거지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삼한지세를 찢어 
공을 접고 노는 춘추를 발견한다.
어이 상실한 비담, 피묻은 칼을 춘추의 목에 겨누자
망나니 공자는 "이거 니꺼야?" 되물으며 겁에 질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선덕여왕' 38회에서 소개되었던 이 장면은 선덕여왕 애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시리라.
멋적은 듯한 웃음마져 너무나 샤방했던 춘추, 그의 귀에 떡하니 걸려 있는 커다란 귀걸이가 눈에 확 들어 오는데....

42회 방영분에서 덕만공주를 만나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귀걸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데.....춘추가 달고 있는 저 귀걸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4세기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가-13호 고분)

경주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전시되어 있는 월성로 고분 출토 금귀걸이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매회 '선덕여왕'을 볼 때마다 덕만이나 미실, 미생, 춘추, 보량...등의 옷차림이나 장신구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데
그것은 필자가 장신구 등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인물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들이
실제로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품이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선덕여왕'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는 단연 미실.

드라마에서 매회 마다 그녀가 선보여주는 의상과 화려한 장신구를 보는 재미 또한 쏠솔하다.

또 신라 최고의 플레이보이 미생의 한쪽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도 우리의 눈을 끌기에 충분하고

춘추가 보량에게 귀걸이를 골라주는 이런 장면에서도 신라 귀족들의 복식에서 장신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미생, 춘추, 진평왕, 알천....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지배층은 남녀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착용했다고 한다.
비슷한 도안의 귀걸이를 착용함으로써 그들끼리는 자신들이 신라를 이끄는 지배층이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신라의 귀걸이에는 신라인의 미적 감각과 최고조에 이른 금공예 기술이 녹아 있는데
전 세계를 통틀어 경주만큼 금귀걸이가 많이 나오는 곳도 없다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귀걸이 중에 유난히 고리가 굵은 귀걸이(태환이식,太環耳飾)들을 보면 
저렇게 굵은 고리를 어떻게 귀에다 걸까..? 무겁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실제로 굵은 고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벼우며 가는 고리는 직접 귀에다 걸기도 했지만 
굵은 고리는 긴 금실을 꿰거나 가죽끈을 꿰어 귓바퀴에다 걸거나 관테나 모자에 장식했다.


또 드라마에서 미실이 자주 걸고 나오는 아름다운 귀걸이를 보면

금드리개 (경주 교동)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이 금드리개를 토대로 귀걸이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금드리개 (황남대총)

드리개(垂飾)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하로 길쭉한 나선 모양의 장식이 일반적인 형태로써 귀걸이와 유사한데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금드리개 (경주 황오동)

금드리개 (경주 월성로)

황오동이나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런 금제 드리개는 요즘에도 응용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분위기이다.

5∼6세기 금드리개  보물 633호 (황남대총)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이 금제 드리개는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기도 하다.

반지는 남녀 모두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양손 모두에 끼었는데

 천마총 발굴 당시 널 안에 누운 부장자는 열손가락에 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들었는데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반지는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들었다.
신라의 금반지는 오늘날에도 못 따라갈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팔찌도 역시 금, 은, 동, 옥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남녀 공용으로 보통 양팔에 착용하였고 

한번에 여러 개를 차기도 하였다니 신라의 귀족들은 그 당시의 패션 리더였음이 분명하다.

3세기 유리와 비취 목걸이 (경주 황성동)

목걸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장신구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목걸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뼈나 뿔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후 구멍을 뚫어 가죽 등에 매달아 목에 착용하거나
돌이나 흙, 조가비, 고동 또는 동물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엮어서 착용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는 천하석으로 만든 대롱옥과 곱은옥
,
둥근 옥 및 작은 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5,6세기 목걸이, 황남대총 출토품

원삼국 시대의 무덤과 집터에서는 벽옥, 수정, 활석, 유리, 마노 등의 구슬을 이용한 목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남색 유리구슬 목걸이는 신라 고분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데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중간에 금제의 장식금구로 연결하고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형식이다.

4~5세기 금목걸이 (경주 월성로)

또한 왕족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에는 금목걸이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 목걸이는 금실을 고리로 만들어 사슬처럼 연결한 것으로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세련된 형태이어서 현대에 착용한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다.

금목걸이 길이 33.2cm (황남대총 남분) 국보 194호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는 금실로 엮어서 만든 금줄에 금제의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리는 양식인데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사슬 4줄과 속이 빈 금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곱은옥을 달았다.
경주 지역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곱은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곱은옥 등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걸작이다.
 


 3세기 크리스탈 목걸이. (경주 황성동)
 

금이 흔했던 신라에서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유리이다.
로만 그라스라고 불리우는 유리그릇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에서 생산되어 동쪽으로 확산된 실크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에 보면 파손된 유리병의 손잡이 부분을 금실로 감아 둔 것으로 보아 유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가 있고
중국의 옛 기록에도 '삼한인(三韓人)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재보로 여겨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고 늘어뜨려 장식한다'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의 각별한 유리 구슬 애호 풍습을 전해 준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한반도에서도 유리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이때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은 남색 혹은 감색의 유리 구슬이다.
때로는 유리 구슬을 금이나 금동 제품과 함께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구슬처럼 남색 구슬 표면에 작은 노란색 구슬을 박아 넣어 미적 효과를 더하기도 했다.
또한 유리 곡옥을 만들어 갖가지 펜던트에 활용하는 등 목걸이용 유리 구슬의 많은 양이 고분에 부장되었기 때문에
유리 목걸이가 삼국 시대를 대표할 만한 고분 출토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5~6세기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보물 634호 (미추왕릉 c지구 4호 고분)

윗 사진의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길이 41.6cm의 이 아름다운 색감의 목걸이는 
청색환옥과 마노환옥, 청색관옥, 수정, 홍색마노곡옥 등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옥구슬이 눈길을 끈다.


특히 하단부에 달린 지금 1.8cm의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16마리의 오리, 구름, 두사람의 인물이 상감되어 있는데
인물상은 얼굴 바탕이 백색이며 세부는 청색선으로 처리하고 입술은 빨간 칠을 하는 등 
신라인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 또는 지중해 부근에서 수입된 목걸이로 추정된다. 

6세기 금목걸이 보물 456호 (경주 노서동)

나뭇잎모양 날개가 달린 금구슬 70여개와 녹색 옥구슬이 조화로운 이 금목걸이(금제경식)는
신라 목걸이의 화려함을 대변해 주는 걸작인데
선덕여왕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는 이 목걸이를 재현한 것이다.

6세기 가슴걸이 보물 619호 ( 천마총 )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실에는 이렇게 고분 출토 현장을 그대로 떠옮겨서 전시해 놓은 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가슴걸이(경식)는 천마총 안의 널(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서 있던 것으로 보아 목걸이로 쓰였던 장신구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의 재료를 사용했는데 원래의 줄 외에 가슴 부근에서 좌우로 늘어지는 짧은 가닥이 달려있고
청색 유리옥과 금·은 제품이 여섯줄로 이어져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큰 곡옥이 매달려 있다.
이 가슴걸이는 목에 걸었을 때 전체가 V자형이 되는데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매우 화려한 작품이다.

금제 허리띠(과대), 띠드리개(요패) 국보 190호 (천마총)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제 과대와 요패.  과대란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5㎝, 띠드리개(요패)의 길이는 73.5㎝이다.
과대는 뚫은 장식이 있는 44개의 판을 연결하였고, 주변에 9개의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있으며 양끝에 허리띠 고리를 달았다.
과대에서 늘어뜨린 장식은 13줄로 타원형 금판과 사각형 금판으로 연결하였는데 과대와 요패는 널 안에서 허리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본 신라인의 장신구에 대해 소개해 보았는데
신라 장신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은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지라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박물관 전시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인들의 장신구는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더러
현대의 패션 리더들이 바로 착용하고 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정교한 디자인이 많다.
이 장신구를 현대의 장인이 그대로 복제하려고 해도 흉내내기 힘들만큼 신라인의 세공술은 뛰어났는데
이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게 되어 장신구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유교 사상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상고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 은의 사용을 막았던 조선의 정책은 찬란했던 금, 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켜 신라의 장신구 세공술은 고분 속에서 잠자게 되니
이렇게 멋진 신라인의 장신구는 오늘날 박물관이나 드라마의 재현품에서 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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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근래에 와서  지반 침하와 석호의 오염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베네치아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배를 타고 첫발을 디딘 베네치아는 마치 세계 각국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전 세계 사람이 다 여기로 여행을 온걸까...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 이유는 많은 여행객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북적대는 인파 속을 뚫고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광장 가운데 PIAZZA 라고 이름 붙여진 유일한 광장......
일찌기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장방형의 광장 주위로 하얀 대리석의 열주가 늘어서 있는데
광장 동쪽으로는 산마르코 대사원, 두칼레 궁전이 둘러싸 있고 
두칼레 궁전 앞에는 99미터의 대종루가 우뚝 서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시계탑, 사원의 맞은 편에는 나폴레옹의 날개 라고 하는 박물관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상징 산마르코 사원은 예수님의 제자 마가의 유해를 모셔놓은 사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산마르코 사원은 5개의 돔을 가지고 있는 사원인데
정면의 모자이크화는 사원의 창건유래를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으로
15세기에 건조된 건물이며 12시가 되면 청동상이 나와서 종을 친다.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광장 한가운데는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진 자욱과 군데 군데 낮은 곳에는 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비둘기들이 광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어미니 먹이라도 주려나 해서 많은 비둘기들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가면들을 파는 전문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미로같은 좁은 골목에서 스파게티를 먹게 되었는데 내 앞에 나온 스파게티는
본고장의 스파게티가 이 정도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냥 스파게티면에 위에 얹혀진 초라해 보이는 소스.......
그런데 맛을 보니......^^  이런게 원조의 맛인가보다.
허겁지겁 내 접시의 것을 다 해치우고 다시 덜어서 먹고나니
너무 배가 부르고 여행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니 많은 여행객들로 화장실은 만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수염을 기른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남자화장실을 쓰라며 자기들 차례를 양보해준다.
얼마나 고맙던지.......얼른 볼일을 보고 나와 그라찌에~하고 인사했더니
한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해 주었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많은 카페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플로라' 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 마니아인 내가 그냥 지나칠수가 없다.
1720년에 처음 문을 연 카페인데 카사노바,괴테,멜빌,바이런,프로스트.....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던 카페라고 한다. 

카페의 입구는 하얀 커튼으로 장식되어있었고 내부는 생각보다 좁고 침침했다.
18세기에 중국풍이 유럽에서 유행이 되어서 내부는 약간 오리엔탈 풍으로 되어있었다. 에스프레소의 본 고장에 왔으니 한번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두 잔을 시켰더니 간장 종지만한 작은 잔에 새카만 원액같은 커피와 설탕 두개씩,
그리고 큰 물병을 쟁반에 담은 채로 내어왔다. 물병은 왜 줄까....?
아마 쓴 커피를 먹은 후 입가심을 하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생각되었다. 남편은 설탕을 하나 뜯어 에스프레소에 탔는데 난 원래 맛을 알고 싶어 그냥 살짝 맛을 보았다. 
무지 쓰면서도 커피의 깊고도 진한 향이 우러나는게 먹을만해서 설탕도 타지 않고 그냥 먹었다.
다른 곳에서 먹던 것보다 한결 깊은 맛이었다.  
베네치아까지 와서 세계 최초의 카페에서 맛보는 에스프레소라니.....
길이 기억에 남기고 싶은 커피의 맛이었고
그 이후로도 에스프레소를 자주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는데
건너 편에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한 청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난 반가운 맘에서 그 남자에게 카메라를 주려고 하니 남편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를 한다.
이탈리아엔 도둑이 많으니 절대로 카메라를 남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기억났나보다.
남의 호의를 무시한 것 같아서 약간 미안하기도 했고
설마 그 비싼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이 도둑이랴....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에 소매치기가 가장 많아서
배낭 여행 온 사람들의 물건을 잃어버린일이 허다하다는 말을 들으니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카메라 보다 그 동안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카메라를 넘기지 않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후 중앙 로비에 있는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이탈리아 남자가 약간 신경질을 내며 뭐라고뭐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영어이긴 한데 이 무슨 희한한 발음인가......
이탈리아식 영어는 영어같지도 않고 마치 이탈리아어같이 들렸다.
다시 들어보니 네 자리에 가서 앉아서 웨이터를 부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리에 왔더니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지고 왔다.
돈을 주니 거스롬돈과 영수증을 다시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처럼 계산대에 가서 계산해야 하는 줄 알고 서서 지갑을 내밀었던게
좀 챙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문화의 차이니까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베네치아에 왔으니 곤돌라를 타지 않을 수 없다.
악사가 연주도 해주는 고급 곤돌라는 돈을 많이 내야 탈 수 있어서 난 평범한 곤돌라를 탔다.
배를 타고 베네치아 운하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동안 
옆으로 지나가는 비싼 곤돌라에서 연주하는 음악도 덤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사진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잇는 탄식의 다리이다.
죄수가 이 다리를 건너가면 사형장으로 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워졌다. 

 

 

곤돌라에서 내려 전통 방법으로 세공하는 크리스탈 장인이 있는
크리스탈 세공 공장에 들어가 보았더니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탈 수공품이 많았다.
이쁜 유리 그릇들이 너무 많았지만 여행에서 짐 늘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작은 크리스탈 목걸이 하나 기념품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관광을 마치고 Laguna Palace Hotel 에서 묵게 되었다.
호텔은 아주 화려하고 시설이 좋았으며 가운데는 요트 선착장 까지 있는 큰 호텔이었다.
호텔 객실 내부도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있었는데
우리 나라 특급 호텔 보다 좋은 시설이었지만 1급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는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오래 되지 않으면 특급이 될수 없고
좁고 작은 호텔이라도 100년 이상된 건물이면 특급 호텔이 될수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베네치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는데
아까 마신 에스프레소로 인해 잠은 전혀 오지 않았고

곤돌라와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이 밤새도록 머리 속으로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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