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이곳에는 1903년에 건립되어 무려 111년의 역사를 지닌 한옥 예배당 영천 자천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로 한국교회 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춘 개신교 문화재이다.
독특한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된 자천교회는 영남 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자천교회 예배당의 역사와 내부 구조에 대해선 이전 포스트에서 상세 언급하였으니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영천 자천교회는 아직도 남녀칠세부동석?

 

 

 

 

자천교회 옆에는 날렵한 처마가 일품인 고택이 자리잡고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이다.

신성학당은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가 교회 내에 설립한 신성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배움터로서

내일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배움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신성학당이란 현판이 걸린 중문 위에는 녹슨 학교종이 하나 걸려 있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 건물의 나이는 교회 예배당보다 조금 더 오래 되었다고 하니 이 역시 100년이 훌쩍 넘은 건물인 것이다.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의 소유였던 이 집은 일제 치하 어려운 시대에 교회를 섬기는 과정에서

가세가 많이 기울어 김경환 선생의 선대에 빚 대신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2007년에 고 김경한 선생이 교회에 기증한 것을 교회가 보수,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근대개화기의 전형적인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집은 약 600평의 대지 위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ㄷ'자 가옥이었지만 'ㅁ'자 가옥으로 증축되어 안채, 사랑채, 좌.우 별채, 대문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제1학당은 3칸의 방과 각 1칸의 대청마루와 부엌, 그리고 넓은 툇마루 등 5칸으로 구성된 안채로서

현재는 소그룹 세미나, 성경공부, 각종 학습교실과 Church Stay를 위한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마당에 서서 들어온 곳을 바라보니 중문채에 역사자료실이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창고로 쓰였던 곳을 개조하여 만들었다니 자천교회의 백여년 역사적 유물을 보관한 역사자료실치고는 너무나 소박하다.

 

 

 

 

자그마한 역사자료실 안에는 옛강대상과 주보를 제작했던 등사기, 권헌중 장로가 사용했던 한문성경을 비롯한 각종 옛 성경들과 성경공부 교재, 각종 유품, 강대상, 풍금, 돌화분과 자천교회의 역사를 알려주는 연혁, 사료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111년이 되는 교회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해 준다.

 

 

 

 

전시품 몇개를 소개해 드리자면 피아노가 없던 시절, 찬송가 반주를 담당했던 낡은 풍금이며......

 

 

 

 

1960년대에 사용했던 당회실 팻말과 강대상 종.....

 

 

 

 

여러가지 성경공부 교재도 전시되어 있다.

지금 쓰는 한글과는 너무나 다른 맞춤법이 눈에 들어오는데 <성경연구 삼백 문제>,<예수행적공부>라는 교재이다.

 

 

 

 

경동노회에서 주관했던 성경학교 수료 증서도 보인다. 1955년이니 벌써 60년이 다 된 수료증서이다.

 

 

 

 

권현중 장로가 1924년 당시 신명여학교에 다니고 있던 딸 권수기에게 쓴 친필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권수기는 신명여학교를 졸업(2회)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신명여학교에서 교사를 했다고 하는데

1924년 당시 대구시가 대구부(大邱府)였던 사실도 편지 봉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8년 상해에서 발간했다는 한문판 신구약성경은 권헌중 장로가 1914년에 구입해서 쓰던 성경이다.

 

 

 

 

컴퓨터 프린터는 물론 인쇄기도 가지기 힘들었던 시절, 주보를 인쇄하던 낡은 등사기도 한켠에 전시되어 있다.

 

 

 

 

역사자료실을 보고 중문을 나와 건물을 돌아가면 제2학당으로 쓰이는 4칸의 사랑채가 나온다. 

특별히 이곳은 영천시립도서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사립문고인 <별빛문고>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소장 도서는 약3,000여권으로 교인들과 주민들을 위한 도서 대출, 그리고 방문객들을 위한 독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신성학당은 Church Stay, 한국 기독교 역사 교실, 독서 교실, 문화 체험 교실, 작은 음악회 증의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남신학대학교 영성훈련장과 전국 교회의 각종 수련회 및 소그룹 교육과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111년이 된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인 자천교회와 함께 돌아본 새별배움터 신성학당.

인근에 위치한 보현산 천문대를 둘러보고 돌아가시는 길에 자천리에 들러 한국 교회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자천교회와

지역과 교회의 미래 세대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신성학당까지 돌아본다면

아이들 체험학습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뜻있는 영천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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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1970년대에서 시간이 일시 정지하기라도 한걸까? 
면소재지 토담 골목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길지 않은 골목 끝자락에 이르니 트인 마당이 나타나고
늠름한 모습의 나무 종탑과 함께 기와를 올린 소박한 한옥 건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1903년에 건립되었으니 무려 10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간소한 한옥은
바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된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로 한국 교회 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추고 있는 개신교 문화재이다.
독특한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된 자천교회는 영남 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교회는 1903년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건립된 이 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자천교회의 역사는 미국인 선교사와 서당 훈장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영남지역 선교 책임을 맡아 대구에 들어온 안의와(아담스, J.E.Adams) 목사는 경북 동부와 동북 지역 선교여행에 나섰는데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인 노귀재에서 고향인 경주를 떠나 대구로 가던 서당 훈장 권헌중을 만나게 된다.

깨어있던 선비 권현중은 안의와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대구로 이주하려던 이삿짐을 내려놓고 
자천리에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사랑방을 예배당겸 서당으로 삼아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성경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교인이 서당 문동들과 노비와 머슴이 전부였는데
권헌중은 앞장서 상투를 자르고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불태워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깨어 있는 권헌중에게 감화된 신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1903년에 기와 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니 바로 오늘날에 만날 수 있는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예배당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는 가마니 공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쓰이는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천지역은 한국전쟁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라 당시 모든 집들이 포화를 맞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교인들이 평평한 교회 지붕에 올라 흰 횟가루로 십자가를 그리고 'CHURCH(교회)'라 표시해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영천 화북면 지역에선 이 자천교회와 교회 바로 옆 한옥만 폭격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배당 건물의 외관을 살펴보면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지붕으로 얹은 것이 눈에 뜨이는데
우진각 지붕이란  건물 네면에 지붕면을 만들어 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도록 한 형태를 이름이다.
이는 전통 한옥의 대문에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독립 건물에 쓰여진 것은 흔치 않은 형태로
일(一)자형 예배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이 되었던 것 같다.





자천교회 예배당의 가장 큰 특징은 남녀 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내부에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다.






25평 정도가 되는 작은 예배당의 정면에는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강대상을 두었는데
신자석에는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다.




                                                                                                       예배당 구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시는 자천교회 손산문 목사님

구한말, 유교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사고는
초기 우리 교회들의 건축물들이 ‘一자형’과 ‘ㄱ자’형으로 지어서 남녀가 구분지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했는데
ㄱ자로 지어진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의 경우 한쪽 날개는 여자석이고 다른 한쪽 날개는 남자석으로 되어
설교자가 서는 강대상은 그 모서리에 위치함으로 남녀석을 번갈아쳐다보며 설교하게 되어 있다.
반면 ‘一자형’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실내 중앙에 기둥이 네개 버티고 있는데 
기둥을 이용하여 중간에 칸막이를 함으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내외하여 서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녀 신자석을 갈랐던 초기 교회들이 대부분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자천교회 예배당에서는 아예 나무 칸막이를 만들어 공간을 양분한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다.
 





설교를 듣는 남녀 신자들은 서로를 볼 수 없지만 설교자는 물론 남녀 신자를 모두 보며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앞에 있는 칸막이로 인해 답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강단 앞에 서보니 예상 외로 설교자의 시야도 별로 가려지지 않고 답답한 느낌도 거의 들지 않는다.





현재의 사고로 보면 참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물의 배치이지만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교 국가에 웬 기독교 교회인가?' 라는 동네 주민들의 반대로 교회 건립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자명한데
오늘날처럼 남녀가 함께 섞여서 예배를 드렸다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겠는가?
이처럼 유교 문화를 지혜롭게 수용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지역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신자석 뒤쪽에 두 개의 방을 낸 것도 이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데 
남녀 신자들이 따로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도록 방을 낸 것이다.





천정을 올려다 보니 대들보와 기둥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자재로 쓰인 나무들은 거의 다듬지 않은 목재들로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네 목수들이 천장이며 들보, 기둥들을 모두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넉넉지 않은 교회 사정에서 목수들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교회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배당은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게 아주 튼튼한 구조로 지어졌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붕과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되고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훼손 정도가 심각하였다.
이에 2005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하여 안의와 선교사가 생활하던 방을 복원하고
일제시대 때 유리문으로 바뀌었던 창문들도 본래의 창호지문으로 복원하는 등
창문틀의 크기와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가의 조언을 거쳐 복원,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물 뿐만 아니라 마당 한켠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종탑도 방문하는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집집다다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교회 종소리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기능 외에 신자가 아닌 동네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말기,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모든 놋 제품을 강제로 징발하였는데
이때 자천교회의 종도 강제로 철거되어 나무 종탑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해방이 되고 1948년에 이으러서야 새로운 종탑을 교회 마당에 다시 세우게 되고 종탑은 다시 구원의 목소리를 되찾게 된다.

집집마다 시계가 있어 대부분의 교회 종탑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
아직도 자천교회 나무 종탑은 은은한 소리를 내며 생명의 목소리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하나님 주신 동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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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온수리 성공회 교회는
고딕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일반적인 성당 건물과는 달리  

전통 한옥으로 지어져 찾는 이들에게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이 성공회 교회는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 가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니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버티고 서 있음으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교회 건축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귀한 사적이다.



건물은 시장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붕 위에 솟아 있는 십자가가 이 건물이 성당 건물임을 눈치채게 한다.


 

대문 또한 우리 나라 전통 대문 양식을 본따 솟을 삼문의 종루로 지었고 지금도 종을 칠 수 있도록 줄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은 벽체가 회벽으로 되어 있던 것을 들어내고 원래대로 창살로 고쳐 복원했다고 한다. 
 


종루에 다소곳이 달려 있는 종은 곧 청아한 소리가 들려올 듯 하고 


 
종루 처마의 날렵한 선은 하늘로 날아가듯 솟아 있다.

 


본당의 건물은 정면이 세칸이고 측면은 아홉칸인 동서 절충식 강당형 건물이다.


100년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건물이 깨끗한데 2004년 새 성당 축성 공사를 하면서 함께 복원 수리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서양식 성당 같지 않고 그저 수수한 우리 관아나 반가 가옥의 일부분 같아 친근감을 주는데 
정면 옆 출입문은 항상 열려 있어서 부담없이 그저 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입구 문위에 '대한 성공회(온수리) 성안드레 성당'이란 현판이 다소곳이 걸려 있다.  
 


성당 내부는 간막이가 없이 통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두 줄로 네모난 기둥(고주)을 두어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전면은 집례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뒷면 亞자형 문 뒤는 집례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듯... 


성당 내부 장식과 예배 집기 등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성당의 바로 옆에는 야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새로운 건물이 3층으로 지어져 있다.
원래의 건물에 비해서 경건함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선입견일까.....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이 땅에 묻혀 흙이 된 주교의 비석 앞에 서니
이 민족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그들의 믿음과 희생 정신에 다시 한번 웃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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