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의 숨은 비경, '날아가던 기러기가 바라보던 정자'라는 뜻을 지닌 정자 반구정을 떠나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기슭에 있는 누정 합강정(合江亭)으로 향한다.





구불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차로 한참 내려오니 반구정으로 오를 때 눈에 잘 뜨이지 않던 낙동강이 발 아래 아스라히 펼쳐진다.





차 한대도 비켜가기 힘든 가파른 산길을 한참이나 내려가니 '합강정'이라고 쓰인 작은 안내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에서는 거의 270도 정도 오른쪽으로 커브를 꺾어 급한 경사로를 내려가야 한다. 

차를 꺾기도 애매하지만 혹시나 가파른 길을 내려가 주자할 곳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

비탈진 산길 한쪽에 차를 구겨 박아놓고 비탈길을 한참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건물 하나가 보인다.





그런데 합강정 앞에는 공터가 너무나 너르다. 차는 십여대를 주차해도 될 정도이다. 

이렇게 너른 공간이 있는 줄 알았더면 차를 가지고 내려올걸 괜히 땀 흘리며 비탈길을 내려왔나 하는 생각도 잠시 

합강정 앞에 자리잡은 커다란 은행나무에 먼저 시선을 빼앗겨 본다.





수령이 350년이나 된다는 은행나무는 가을철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즈음이 최고의 절정을 이룬단다.

은행나무가 물들려면 한참 남은 때이라 게절에 앞서 너무 빨리 찾아온 것이 약간 아쉬운 느낌이 든다.





이곳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인가 보다. 관리도 잘 안 되고 있는 듯 

정자 밖과 안 마당은 이름모를 야생화와 잡초로 약간은 스산한 느낌마져 가져다 준다.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지라 서둘러 계단을 올라 낙원문으로 들어가 본다.





낙원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정자가 바로 합강정. 정면 3칸, 측명 3칸의 정자이다.






이곳은 인조 때의 문관 간송 조임도(趙任道, 1585~1664)가 은거수학한 곳으로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으나 

여기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므로 합강정(合江亭)이라는 이름의 편액을 정자에 걸게 되었다고 한다.





조임도는 장현광의 제자로 학문에 전념하여 인조반정 후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어 한때 공조좌랑이 되었고 

인조·효종 때에는 대군의 사부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이 곳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대청 마루에 걸린 함강정사(合江精舍)라는 편액을 보니 이곳은 단순한 유람을 위한 정자라기 보다 

선비들의 학문 수양을 위한 집으로서의 기능이 더 앞섰던 곳으로 생각된다. 



 

 

 

1633(인조 11)에 건립한 기와집인 합강정은 1980년에 전반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간송 조임도의 문집을 인쇄용 목판에 판각한 것인데 190매이다.

 


 




간송 조임도 선생의 문집은 함안조씨 중 학문으로는 최고로 꼽히는데

간송선생의 충절과 학문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하여 보관하고 있다고.





합강정을 돌아보고 돌아가기 위해 다시 입구인 낙원문 앞에 서니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낙원문 아래로 푸르른 강물이 치마처럼 펼쳐지고 저 멀리 남지 들판과 남지 철교가 한눈에 훤하게 보인다. 




 

낙원문 계단을 내려서 앞 마당에서도 남지 들판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옛사람들은 어쩌면 절경인 곳을 이리도 잘 찾아내어 그곳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를 아름답게 잘 지었을까?

단아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무진정, 깎아지른 절벽 위에 날아가듯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악양루, 

날아가던 기러기가 바라볼 정도의 절경 위에 지어진 반구정, 그리고 낙동강, 남강이 합류하는 절경에 지어진 합강정.....

이런 아름다운 정자들을 한곳에 모은 함안은 '정자의 고향'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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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고향 경남 함안으로 떠난 한여름 여행. 

고요한 연못과 소박한 정자가 잘 어울리는 무진정을 떠나 또 다른 정자 '악양루(岳陽樓)'로 향한다.

무진정에서 악양루까지는 약 13km. 제법 가까운 곳이지만 초행길에 악양루를 찾기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네비의 인도를 받았지만 입구를 지나치기를 두어번. 한참을 돌다 악양루의 입구라는 식당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악양루의 입구가 맞는걸까? 악양루라고 써둔 조그만 안내문을 보니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입구치곤 무언가 상당히 어설프다.

 

 

 

 

안내판을 따라 길을 나서니 이내 벽처럼 커다란 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이곳이 악양루로 가는 길이라고?

도무지 아닌 것 같아 발걸음을 돌리려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바위 사이를 더듬거리며 올라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가본다.

 

 

 

 

이곳을 찾는 이는 거의 없는 것일까?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좁은 오솔길은 길게 자란 잡풀이 다리를 스치고 거미줄은 기분 나쁘게 눈앞을 가로막는다.

 

 

 

 

조금 가다하니 나무 데크로 된 계단이 나타난다. 오~! 이 길이 맞긴 맞는가 보다.

툭 튀어 나온 바위에 머리를 부딛힐라 조심해서 계단 위로 올라보니 발 아래 남강이 시원하게 옷자락을 드러낸다. 

 

 

 

 

벼랑 끝에 놓인 울타리를 잡으며 한참 올라가니 악양마을 벼랑 끝에 자리잡은 정자의 기와지붕이 빼꼼이 드러난다.

 

 

 

 

그런데 정자가 자리잡은 장소가 정말 너무 좁다. 정자 하나 들어앉은 것 외에는 발디딜 틈도 하나 없을 정도이다. 






절벽 위 작은 암반 위에 정자 하나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 누가 이런 가파란 벼랑 위에다 정자를 지을 생각을 했는지......





정자의 규모도 지극히 작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무척이나 소박하고 장식도 배제된 정자이다.

찾는 이가 별로 없는지 정자 여기저기에는 거미줄이 얽혀 있고 천정에는 말벌마져 날아다닌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아차 발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낭떠러지 아래 물속으로 다이빙할 것 같다.

지금은 목책이라도 세워놓았지만 그 예전 처음 정자가 지어졌을 땐 정자 마루에 앉으면 발바닥이 간질간질 했을 듯......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정자를 지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정자 위에 올라보면 저절로 풀리게 된다.





조선 철종 8(1857)에 세웠다니 악양루의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 하나는 정말 대박이다. 

중국 4대정자인 악양루는 산을 뒤로 두고 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세워져 두보를 비롯한 시인과 문장가들이 감탄사를 쏟아냈다던데 

함안 악양루에 올라 정자의 풍류와 경치를 보니 중국의 악양루에 못지 않는 비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자에서 바라보니 물길이 두갈래가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함안 대산면을 굽이치는 남강의 물길이 함안천과 만나는 합수머리라고 한다.


 



악양루는 정자 안에서 바깥을 볼 때의 풍경 뿐 아니라 건너편에서 보는 풍경도 빼어나다고 한다. 

강 건너편에서 악양루를 바라 보기 위해 정자에서 내려가 차를 몰고 강 건너편 제방 아래로 향했다. 





악양루 위에서 처마 아래로 펼쳐지는 남강의 물길과 끝없이 이어지는 제방의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제방 아래에서 짙은 숲 속에 매달린 악양루의 모습을 보는 것도 너무나 근사한 풍경이다.





강 건너편에서 줌렌즈로 당겨서 보니 악양루(岳陽樓)라는 현판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옛날에는 '기두헌"(倚斗軒)'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청남 오재봉이 쓴 "악양루"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악양루의 직벽 아래에는 남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 나루에서 낙동강 강 바람에 치마폭을 적시며로 시작하는 노래 처녀뱃사공의 가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9월,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부친인 윤부길씨가 함안 공연을 마치고 

나루터 주막에서 하룻밤을 머물 때에 군에 입대한 오빠를 기다리며 배를 젓던 뱃사공 처녀를 만났다고 한다. 

그날 윤부길씨는 처녀뱃사공을 주제로 한 노랫말을 품고 있다가 1959년 작곡가 한복남 씨에 의뢰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나룻터가 '처녀뱃사공'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거의 40년 후에나 밝혀지게 되어 

나룻터가 있던 자리에는 지난 2000년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제막식에는 아들 윤항기씨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때 처녀뱃사공의 나이는 19살이었고 소식이 없던 '군인간 오라버니'는 23살이었는데 

기다리던 오빠는 한장의 전사 통지서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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