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자랑거리 한반도지형을 돌아본 후 

그곳에서 약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선돌이 있는 영월군 방절리로 향했다.

해발 320m의 소나기재 정상 휴게소에 잠시 주차를 하고

나무 데크가 잘 갖추어진 오솔길을 따라 5분여를 걸어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기묘한 모습의 바위 두갈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전망대 아래 두갈래로 갈라져 우뚝 솟아있는 높이 70여m의 바위는 선돌(立石).

서강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한국화가 펼쳐져 있는 것 같다.

혹자들은 이 선돌을 신선암(神仙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풍경이 보는 이들에겐 마치 신선경같았던가 보다.

 

 

 

 

전망대 바로 옆 소나무숲 옆에 2m 정도 높이의 철제 계단이 준비되어 있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망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한사람 정도 올라가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이런 계단은 

아마도 더 좋은 앵글을 원하는 사진가들을 위한 누군가의 배려인가 보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는데 

선돌 아랫동네 남애 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 패하자

이곳 선돌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이루어진다는 믿지못할 설화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현재의 38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선돌 밑으로 옛길인 신작로가 있었다는데

이 옛길에는 고종 42년 1905년에 목탄차가 다닐 수 있도록 석축을 쌓아 확장했던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光武九年李春和排路修勅乙巳二月一日>(광무9년이춘화배로수칙을사2월1일)라고 자연석에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또 1820년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 생활을 즐기던 오희상, 홍직필 등

세사람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붉은주색(朱色)을 칠한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선돌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서강(평창강)은 정말 푸르고 깨끗하게 보인다.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감아 흐르는 영월군 남면 북쌍리와 마을 뒤로 펼쳐지는 산들의 곡선이 너무나 평화롭다.

홍이간과 그 벗들이 보았던 것처럼 구름이 걸린 선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한참을 머무르며 시 한수 남기고 떠났으련만......

 

1박2일 영월편에 나와 더욱 알려졌던 선돌은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이 주연했던 영화 '가을로'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 해. 저 아래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쳐지거든" 라는 김지수의 대사처럼 

선돌과 그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잠시 세상의 힘든 것들을 잊고 멍하게 빠져들게 하는 신기한 마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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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편은 방영된지 한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방송 중 하나이다.

 

70년대에서 시간이 오롯이 멈춘 듯한 경북 예천 용궁마을은  

가을동화에서 은서와 준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회룡포마을을 비롯해서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이 11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예전에는 탄광촌을 오가는 사람들로 연일 붐비었던 역이었지만

지금은 오가는 사람 거의 없는 무배치 간이역인이 된 용궁역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한다.

 

용궁마을 양 옆으로 펼쳐지는 오래된 가게들과 빛바랜 간판들을 읽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걷다보니

어디선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겨나와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고소한 냄새의 근원지는 동부제유소.

바로 1박2일 제작진들이 OB팀과 YB팀에게 참깨를 주며 참기름을 짜 오라고 했던 바로 그 참기름집이다.

 

 

 

 

고소한 내음이 등천을 하는 동부제유소의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의 바쁜 손놀림이 먼저 눈에 뜨인다.

장날이라 집에서 수확한 참깨를 가지고 참기름을 만들러 온 손님들의 일거리가 밀린 듯 하여 돌아보기도 조심스럽다.

주인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일 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웃으면서 흔쾌히 허락을 해주신다.

 

 

 

 

1박2일 방송에서 YB팀은 시장제유소에서, OB팀은 동부제유소에서 참기름을 짜게 되는데

시장통에서 가까운 시장제유소보다 동부제유소가 유달리 시청자의 기억에 남은 것은

젊었을 때는 용궁에서 한인물 했음직한 주인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가 한몫했을 뿐 아니라

현대화된 기계를 쓰지 않고 아직도 수십년전 참기름 짜는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년전으로 돌아간 듯 추억이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고

갓짜낸 참기름을 조르르 부어 비벼낸 나물비빔밥은 강호동을 비롯한 1박2일 멤버들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가게를 돌아보니 오래된 물건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참깨나 들깨를 담아두었음직한 천 소쿠리는 도대체 그 언젯적 물건일까?

 

 

 

 

손님이 참기름을 짜달라고 맡긴 참깨 대야 옆에 놓인 성냥곽이 눈길을 끈다. 비사표 성냥이라니......!

바닥에 성냥이 놓여 있는 이유는 이 성냥이 참기름집에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요긴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참깨를 볶으려면 화로의 열이 충분히 달구어진 후 참깨를 넣어 볶아야 하는데

 

 

 

 

적정 온도를 알려주지 않는 수동 시스템이므로 참깨를 볶을만한 적정한 온도를 가늠하기 위해

이렇게 파이프 위에 성냥개비 하나를 살짝 올려놓는데

 

 

 

 

파이프 위에 놓인 성냥에 갑자기 확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면 화로의 열이 충분히 달구어진 것이므로 

그때 바로 참깨를 부어 볶기 사작하면 되는 것이다.

 

 

 

 

뜨끈하게 달구어진 솥 안에서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면 

고소한 냄새와 함께 아련한 추억도 맞물려 돌아가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예전 방식 그대로의 수동 시스템이기 때문에 주인 아주머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데

 

 

 

 

 

참깨를 볶는 화덕에서 김이 뭉실뭉실 솟아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할 때 쯤이면

 

 

 

 

잘 볶아진 참깨를 화덕 아래 나무 상자에 내려 한김을 식히고

 

 

 

 

다시 커다란 체에다 참깨를 옮겨 붓는데 이렇게 참깨를 식힌 뒤에 참기름을 짜야 더 고소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넓다란 체에서 한김을 날려보내고 식혀진 참깨를 커다란 베보자기에 옮겨담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베보자기에 거두어진 참깨는 참기름틀에 꽁꽁 싸서 넣어지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강철참기름틀에 밀어넣고 스위치만 켜면 참기름이 만들어지게 된다.

 

 

 

 

압착기에 스위치를 넣고 조금 기다리니 아! 동그란 구멍 사이 사이로 노란 참기름이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그동안 수많은 시간 동안 참기름을 먹어 왔지만 정작 참기름이 짜지는 과정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너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압착기에서 '진짜 참기름'이 조르르 흘러내리니 정말 고소한 내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필자도 오랜만에 정말로 고소한 '진짜 국산 참기름"을 한병 손에 넣었다.

이 참기름으로 산나물 팍팍 무쳐 저녁상에 올릴 생각을 하니 절로 신명이 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년전으로 돌아간 듯 여행자의 빛바랜 추억들을 되살려 주신

예천군 용궁면 동부제유소 아주머니께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번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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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경북 예천 '추억의 타임머신 레이스'편에서

멤버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어주었던 순대국집.

말도 안 되는 가격과 맛으로 출연진들을 놀라게 했던 순대국집은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 위치한 박달식당이다.

1박2일의 인기를 업어 유명해진 맛집인가 했더니

이집은 1박2일에 방영되기 전에도

용궁면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예천 택시 기사님들이 즐겨 추천하는 인기 맛집이라고 한다.

 

 

용궁역 바로 앞에 위치한 박달 식당에 이르니 식사를 마치고 나온 주민들로 식당 앞이 북적거린다.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가니 입구부터 테이블이 놓여있어 내부가 상당히 협소해 보인다.

 

 

돌아보니 의외로 안에는 여기저기 방이 위치하고 있고 방마다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쪽 방에도 저쪽 방에도 방 마다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거주민도 많지 않은 면소재지 구석에 위치한 식당에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들어차 있다니.....!

 

 

1박2일 뿐 아니라 생방송 전국시대, KBS 무한지대 큐 등 여러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고 하니 파급 효과가 큰가 보다.

 

 

손님들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오픈된 주방 안에서는 많은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손길을 놀리고 있는데

주방 종사자들의 위생모 착용은 물론 주방 내부도 상당히 청결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일 구석진 방의 빈 테이블을 간신히 하나 배정받아 앉아 메뉴판을 쭈욱 훑어보았다.

딸랑 순대만, 순대랑  수육이랑, 수육, 오징어 불고기는 7,000원선. 따로국밥은 5,000원이다.

2009년에 1박2일 팀이 와서 식사했을 때는 따로국밥이  3,500원 밖에 안 했다고 하는데

식자재 값이 미친 듯 인상되는 요즈음 3,500원 하던 국밥이

3년만에 5,000원으로 오른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순대랑 수육이랑, 따로국밥을 주문해본다.

 

 

주문하자마자 기본 반찬들이 후다닥 상 위에 베풀어진다.

김치, 깍두기, 마늘 절임 몇 쪽, 생마늘, 청량고추, 다대기, 된장, 그리고 새우젓 등이다.

 

 

기본 반찬이 나오고 금방 '순대랑 수육이랑'이 나왔다.

그런데 순대의 모양이 영 불품 사납다. 예쁘게 썰어지지 않고 속의 내용물이 다 튀어나왔다.

 

 

순대가 뭐 이래? 하고 자세히 보니 대창을 이용한 진짜 중의 진짜 순대이다.

순대피가 대창이다보니 써는 과정에서 깔끔하게 안 썰어지는 모양이다.

순대를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어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해본다.

대창을 써서 질길 줄 알았는데 전혀 질기지가 않고 적당히 꼬들하고 부드러운 식감이다.

거기다 피와 당면 등 순대 속과 조화를 제대로 이루어 씹는 맛이 일품이다.

 

 

수육도 그냥 대충대충 썰어져서 접시에 턱하니 올려져 있다.

 

 

수육도 아주 잘 삶아졌다. 새우젓에 콕 찍어 맛을 보니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져 퍽퍽하지 않고 목으로 부드럽게 잘 넘어 간다.

 

 

곧 이어 따로국밥이 나왔다. 밥 포함해서 5,000원 짜리 순대국밥이다.

그런데 국물이 진짜 뽀얗다.  마치 사골국물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건더기가 다 가라앉아 보이지 않길래 순대국밥 위에다 청량 고추 썬 것을 듬뿍 얹어 보았다.

이제야 비쥬얼이 좀 그럴싸하게 보인다.

 

 

숟가락을 국밥 그릇에 넣어 건더기 한 숟갈 건져 올려 본다.

 

 

숟가락 위에 올려진 속살이 오동통한 순대는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숟가락으로 푸욱 떠서 건져 올려보니 와! 건더기가 정말 많이도 들어있다.

순대 외에도 머릿고기 등 여러가지 부위의 건더기가 푸짐하기도 하다.

 

 

따로 나온 공기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필자는 유명 맛집 조건의 첫째를 밥 맛으로 꼽는데

영업이 잘 안 되는 식당은 밥을 해서 온장고에 보관하다가 내어놓기 때문에 밥이 굳어있는 경우가 많지만

유명 맛집은 식탁 회전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에 손님이 올 때 마다 새밥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달 식당의 밥도 필자의 맛집 조건에 부합되게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합격이다!

 

 

순대국밥의 국물은 사골 육수처럼 맛이 진하고 고소하기 이를데 없다.

밥을 반 정도 덜어 순대국밥에 투입하고 다대기를 넣은 후 허겁지겁 입 안으로 가져가니

얼큰하고 진한 국물이 속을 확 풀어준다.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국밥 그릇 밑에 가라앉은 건더기가 끝이 안 난다.

아니.....5,000원 짜리 순대국밥에 도대체 순대와 건더기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있는 거야!

다 먹어가는데도 그릇 안을 휘저으면 계속 계속 올라오는 건더기 때문에 나중엔 그만 지쳐 버렸다.

 

 

식당에서 상을 받으면 밥과 국은 다 해치우는 것을 나름의 법칙으로 삼고 있던 필자.

이미 순대와 수육을 조금씩 맛보아서 그런지 밥도 국밥도 다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1박2일의 인기를 업고 이름만 무성한 맛집인가 했던 예천 용궁 박달 식당.

특허까지 냈다는 진짜 순대와 푸짐한 순대국밥은 멀리 찾아간 여행자의 뱃속을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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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무작정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여정을 멈추게 한 도시, 강릉.

영동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강릉 구경은 하루만에 끝내기엔 너무나 볼거리가 많다.

사시사철 푸르른 동해를 품은 경포대 해수욕장과 함께 커다란 석호인 경포호,

관동팔경의 하나로 그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수가 나올 것 같은 누각 경포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죽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과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생가,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강릉 객사문,

에디슨의 세계 최초 축음기 등 수백억에 이르는 소장품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 등등......

강릉에 소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멋과 풍류를 사랑하는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고 싶은 집으로 꼽히는 곳은 단연 선교장(船橋莊)이다.

 

 

지난번 1박2일에 소개되어 출연진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기도 했던 선교장은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오른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연지(蓮池).

연지 안에 날아갈 듯 자리잡은 아름다운 건물의 이름은 활래정(活來亭)이다.

소나무 숲을 뒷배경으로 하고 연못 가운데도 멋들어진 소나무를 거느린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인데

이곳은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여름나절에 찾아왔더라면 연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연지를 볼 수 있을텐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연지는 어쩐지 쓸쓸함만 더 해준다. 
 

 

활래정을 지나 선교장 앞에 서니 24간이나 되는 행랑이 시선을 압도한다.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처럼 길게 늘어선 행랑은 바로 하인들의 방.

그만큼 하인들의 수도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도망친다는 뜻의 '줄행랑'이란 용어가 이곳 행랑채에서 생겼다는 설도 전해 내려 오는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보존되어 온 집이다.

선교장(船橋莊)이라는 명칭은 예전에 지금의 경포호와 연결된 수로가 있어

배를 대는 선교(船橋)가 집 앞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경포호와 선교장사이에 논밭이 들어서서

선교장 앞에까지 배가 들어오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에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원래는 아흔아홉간이었다는 선교장은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안채 주옥, 열화당, 활래정, 서별당, 행랑채 등 84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열화당은 남자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로 1815년(순조15년)에 이후가 건립한 건물이다.

 

 

 


 

 

 

열화당(悅話堂)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구절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열화당 툇마루 앞에는 이렇게 서양식의 테라스가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양반 살림집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물인 이 서양식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영동지방 여행을 왔다가 선교장에 장시간 머무르다 간 후

 

그 답례로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에서 구리판을 들여오고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테라스는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구조물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별당은 이씨가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되었고 방과 마루의 모든 벽페가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들의 성품과 면모를 보여준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를 전주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에 건립된 건물로서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이다.

 



 

 

안채, 별당, 사랑채를 이어주는 대문들이 한줄로 늘어선 모습이 멋스러운데 선교장에는 이런 대문이 모두 12개가 있다.


 

 

만석꾼 곳간채에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베풀던 선교장.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 선교장.

뒷산의 노송 숲과 활래정의 연꽃, 경포 호수 등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후덕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인 선교장은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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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2일 경북 예천편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에서  제시된 한자를 받아 쓰는 '과거시험 미션'을 치를 때

 한자사전에도 없는 엉터리 한자를 써서 시청자들의 폭소와 쓴 웃음를 자아내던 곳을 기억하시는지?

       과거시험을 치르던 바로 그 장소는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 예천군 삼강 주막이다.

 삼강주막은 사극에서 보던 '주막'가운데서 실제로 남아 있는 최후의 주막이라고 하여 찾아 보았다. 

 

 

예천군 용궁면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삼강교를 지나 풍양면에 이르면

세개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지점에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주막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흘러오는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함께 만나는 마을의 이름은 삼강마을이라 하고

세 강이 만나는 곳에 지어진 주막의 이름을 예로부터 삼강주막이라고 불렀다.

 

 

1900년대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110여년이 넘은 삼강주막은 아직도 주막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막 내에는 1900년대에 지어진 주막과 함께 사공 숙소, 보부상 숙소, 원두막과 평상이 군데군데 위치하고 있어 

주막을 찾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도토리묵, 두부 등을 안주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예전에는 주모가 한상 차려서 손님 상에 일일이 가져다 주었던 삼강주막,

요즘은 손님이 직접 음식을 주문해서 가지고 가는 셀프 주막이 되었다는 점이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원래 이곳에는 1900년대에 지은 사공 숙소와 보부상 숙소가 있었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물류 이동이 아주 활발한 곳이었는데

보부상과 길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한 곳이었다.

밤이 되면 낯 모르는 사람들이 호롱불에 둘러앉아 야담을 나누면서 잠을 청하던 곳이 보부상 숙소이며

 

 

보부상 옆에 있는 작은 오두막은 길손들을 실어나르느라 기꺼이 노를 찹았던 사공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 두 건물은 갑술년 (1934년) 대홍수로 멸실되었으나

2008년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2008년 복원하였다.

현재 삼강주막 내의 대부분 건물들은 민박 체험도 하고 있어 이곳에서 민박하는 사람들은

110여년 전 주막에서 하룻밤 묵던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도 있어 좋다.

 

 

강둑을 따라 주막 바로 옆에는 이렇게 커다란 '들돌'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들돌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청년들이 장성하여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례에서 생겼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많은 물류의 이동에 따라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책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들돌은 상당히 커서 웬만한 장정들은 들어올리기는 커녕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큰 들돌로 힘을 측정한 것은 예전의 장정들이 힘이 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장정들이 힘 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일까? 그점이 궁금하다.

 

 

삼강주막 내 많은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지만

다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주막이다.

 

 

경상북도 민속 자료 제 134호로 지정된 삼강주막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고 다소 초라하기까지 하다.

 

 

건물은 방 2간, 부엌 1간, 마루 1간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이지만 

주막의 기능에는 충실한 집약적 평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삼강주막의 중심인 부엌 문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본다.

 

 

안에는 소박한 찬장이 하나 놓여 있고 부엌 아궁이 위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가마솥 하나 가득 끓여진 국밥은 이 주막에 머물다 간 많은 사람들의 속을 따끈하게 덮여주었겠지......

 

 

부엌 흙벽에는 이렇게 주막 주인이었던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 장부로 그은 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저렇게 금을 그어놓은 것만으로 누가 얼마나 외상으로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낼까?

아마도 유옥연 할머니 만이 풀 수 있는 신비로운 수수께끼인 듯 하다.

 

 

그런데 주막엔 외부, 내부 할것없이 수많은 낙서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장부였던 흙벽의 수많은 금들도 이렇게 유리를 씌워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오래 전에 훼손되어 없어졌을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 한다.

삼강나루의 나들이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로는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사용되던 삼강주막.

세월은 흘러 이곳을 기점으로 오가던 행인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이 스쳐간 흔적은 남아 오래된 발자취를 전하고 있다.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의 평상에 걸터앉아 옛 행인들처럼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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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용궁역은 하루 종일 있어도 찾는 사람 거의 없는 이른바 간이역이다.
1928년 11월 1일 보통역으로 역무를 시작했던 용궁역.
바로 이웃한 문경이 탄광으로 호황을 누리던 70년대,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던 이곳도 
탄광 산업의 내리막과 함께 이용객이 서서히 줄어들고
2004년부터는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이 되어버렸다.

잠시 잊고 살아온 꿈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오롯이 추억과 벗하고 있는 용궁역.
오가는 사람의 흔적없이 적막감이 감도는 용궁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문경시 산양면을 지나 예천읍 용궁면의 작은 지방도로 들어서 얼마 안 가니 금방 눈 앞에 용궁역이 나타난다.
여느 역 같으면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겠지만 간이역인 이곳은 찾는 사람 없이 적막감만 감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니 매표구가 벽으로 막혀 있고 다른 역의 열차 운행 시간표가 매표구를 대신한다.

 

역 안쪽 문 옆에는 개찰구 대신 이렇게 표 넣는 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함 안을 들여다보니 언제적 것인지 모를 열차 승차권 몇장이 버려져 있고
쓰레기통인줄 오해한 승객들이 버리고 간 양심도 눈에 뜨인다.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역의 이름, 용궁역.
바다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이 곳의 이름을 왜 용궁(龍宮)이라고 했을까? 
바다가 먼 만큼 바다를 그리워했기 때문일까?
 


어떤 연유에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나 용궁역 구내에는 커다란 용 장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용궁을 상징하는 용이라지만 조용한 간이역에 서 있는 여의주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는 용 장식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인적 없는 기찻길 한가운데 서서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지는 기찻길을 바라 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찻길을 보면 왜 이리도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기차로 떠나보낸 가슴 아픈 사연도 없는데.......



기찻길이 멀리 뻗어가 하나의 점이 되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추억도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하나의 희미한 점으로 남기 때문에 애틋함을 더하는 것일까?

 
녹슬어 가는 철로와 함께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키며 닳고 또 닳아 온 침목은 그 빛이 날로 희미해지고



멀리 공부하러 나갔던 아들을 기다리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이던 벤치도 세월의 수만큼 낡아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다시 이 자리에 앉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 이제는 이 적막한 역에 머물러 줄 기차가 있을까?



아......! 적막감이 감돌던 간이역에 저 멀리서 기차가 들어온다. 혹시나 잠시라도 정차하지 않을까?

기차가 들어오는 설레임도 잠시, 잠시라도 머물러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저버리고
기차는 무심한 듯 여행자를 스쳐 지나가 버린다.

또 다시 감도는 적막함. 기침 소리마져 크게 울리는 고요함이 사방을 감싼다.


이미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둠이 사방에 서서히 내려 깔리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살아왔던 어린 날의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쉽게 간이역을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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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시에서 예천읍 쪽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금천 위에 놓인 산양교를 지나 924번 지방도로 접어 들면
시간이 멈춘 듯 거리마다 70년대의 풍경이 가득한 마을을 만나게 된다.

바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1박2일에도 소개되었던 용궁로를 걷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을 거슬러 올라 1970년대로 돌아간 듯
양 옆으로 펼쳐지는 오래 된 가게들과 간판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용궁면의 메인 스트리트인 용궁로. 나름 번화가인 용궁 사거리가 지척이건만
거리를 지나다니는 차들도 많지 않고 대로변에 위치한 주택 앞에서는 할머니 한분이 무심한 듯 집 앞 청소를 하고 있다.



도시에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동물병원이 많지만 농촌인 용궁에 위치한 동물병원은 그야말로 '가축병원'일 뿐이다.
 


어렸을 적엔 동네 어디에서나 있었던 간판 '상회'.
요즘 어느 도시에 가든 '상회'라는 간판은 보기 힘든데 용궁 이곳저곳에는 '상회'라는 간판이 심심찮게 남아 있다.
용궁의 삼천리 상회는 운동화, 장화를 비롯하여 자전거, 농기구, 락카......등
농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이른바 '만물상'이다.

 


농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호스, 플라스틱 통, 삽, 괭이, 갈퀴.......등을 파는 철물점.
요즘 보기 힘드는 연탄 보일러도 눈에 뜨인다.


 

요즘은 거의 입지 않는 무스탕도 세탁한다는 세탁소. 2층 건물은 지은지 50년도 더 되어 보인다. 

 


이발소와 미용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 장날이라 그런지 이발소에는 손님들이 제법 있어 보인다.
대도시의 이발소는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미용실을 가지 않는 시골 할아버지들 덕에
이 조그만 마을의 이발소는 아직 살아남을 수 있었나 보다.


전화번호 국번이 두자리라니.....! 초원이발관의 간판은 대체 언제적 것일까?
간판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북향집인데도 불구하고 낡고 삭아버린 간판의 글자가 세월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곳을 터전으로 미래를 점쳤던 용궁도사님은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 미래를 점치는 일을 그만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호미, 곡괭이, 삽 등 여러가지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철공소.
큰 공장에서 제작되어 나온 농기구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요즈음
더 이상 철공소에서 농기구를 제작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간간이 들어오는 경운기 등 농기구 수리에나 의존해야 하는 철공소.......



승용차가 없는 시골 노인들에게 오트바이는 최고의 멋진 교통수단.
장날을 틈타 오트바이 수리하러 온 손님들로 인해 오트바이 가게 주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닭도리탕, 오징어구이, 매운탕을 파는 통일식당 아줌마의 요리 솜씨에 반한 것일까?
문이 열렸을 때 본 식당 안에는 의외로 장을 돌아보러 나온 아저씨들로 그득하다.


60년 이상 한자리를 고수해왔다는 참기름집은 유리로 된 나무 문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박2일에서 은지원 등 YB팀이 참기름 짜는 미션을 실행했던 제유소 옆을 지나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한다.


강호동 등 OB팀이 찾아가 수공업으로 직접 제조한 막걸리를 맛보던 용궁양조장.
1958년에 지어졌다는 벽돌집 외부를 다 덮어버린 담쟁이 덩굴은 50여년이 넘은 건물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1박 2일 팀이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던 털보 사진관에는 다른 집처럼 1박2일 촬영을 했다는 플래카드도 붙어있지 않다.
집집마다 디지털 카메라가 한두대 쯤 있는 요즈음, 장날이 되어도 사진관을 찾는 발걸음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이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털보 아저씨는 아직도 계속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까?
사진관의 문을 밀고 들어가 확인해 못했던 것이 계속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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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집에서 휴일을 즐기면서 1박2일을 본방으로 보았다.
12월 5일 분 1박2일은 대한민국 6대 광역시를 하루에 돌아보아야 하는 주먹을 부르는 특집.

강호동,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 김종민 멤버 5명이 각각 대구, 부산, 울산, 인천, 광주로 흩어져 
제일 먼저 시작한 대구 미션에 성공하면 다음 멤버들에게  미션을 전하는 릴레이방식.

제한 시간 7시까지 마지막 멤버가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인데
시간내에 완수하지 못하면 대전 번화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미션!

1박2일 멤버의 불행은 시청자들의 행복이니....멤버들이 고생을 하면 할수록 더 즐겁기만 한데
대체 이 많은 미션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흥미롭게 보고 있노라니.....

나영석 PD와 함께 대구에 도착한 릴레이 미션 1번 주자 강호동이 수행해야 하는 미션은 바로
"100년전 대구의 사진을 찍어라!"

100년전의 모습을 건직한 대구의 근대 문화 유산을 찾아 3장의 사진을찍는 것이다.

미션의 첫번째 대상은 3.1운동 계단, 두번째는 선교사 챔니스의 집, 세번째는 정소아과 의원이다.


지금이야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이지만 대구가 고향인지라
강호동이 찾아서 사진 찍어야 하는 곳은 필자가 너무나 잘 알고 사진도 찍으러 다니던 곳.
직접 뛰어놀기도 하고 자주 발로 딛고 다니던 곳이 TV에는 어떻게 비칠까 궁금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3.1운동 계단과 챔니스 주택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대구 동산 의료원 뒷동산에 자리잡은 청라언덕을 찾아가야 한다.

청라언덕에는 100년이 된 선교사 주택 3채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 건물들은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100년 된 3채의 주택 중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현재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현재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강호동이 미션으로 찾아야 하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현재 의료 박물관이 되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미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하던 방갈로풍으로 지어졌는데 지금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집이다.






이 집들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해서 '청라 언덕'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중고교 시절 음악책의 유명한 가곡 '동무 생각(思友)'에서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친구야"하는 가사의 청라 언덕이 바로 이곳!
청라 언덕은 필자가 어릴 때부터 대구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라고 혼자 점찍어둔 곳이기도 하다.



또 이 청라언덕에는 머나먼 조선까지 와서 목숨을 바쳐 선교 활동을 한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묻혀있는 무덤인 은혜정원도 있다.
비록 서울의 양화진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묘비들로 둘러싸인 이곳에 서면 저절로 옷깃이 여미어지게 된다.



챔니스 주택 바로 옆,  청라언덕에서 계산 성당 쪽으로 내려가는 제일 교회 옆 계단은 

대구 독립 운동 당시 만세 운동을 준비하던 대구 학생들이 헌병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길로써  3.1운동 계단으로 불리운다.





계단은 모두 90개로 3.1운동 당시의 
사진들이 90계단 양 옆을 장식하고 있는데
대구에서도 아는 사람만 알던 이길은 대구 골목 투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연인들이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거나 혼자 사색에 젖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인데
1박2일에 소개되어 버렸으니 사람들로 붐비게 되어 이곳 특유의 낭만과 고즈녁함을 잃을거 같아 걱정이 앞선다.,

3.1운동계단을 내려가 길을 건너면 고딕식 붉은 벽돌 성당이 나타나는데 바로 대구 계산 성당이다.





1902년에 첫 미사를 드렸으니 올해로 108년이 된 이 성당은 대구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지은 이 성당은 지금도 더 잘 지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기 이를데 없다.
성당 바로 옆 뽕나무 골목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 국채 보상 운동을 일으킨 서상돈 고택들도 자리잡고 있다.





계산 성당을 지나 바로 옆 약전 골목으로 들어서면 초입부터 한약재 냄새가 온 골목을 진동하는데 이 골목은 바로 대구 명물 약전 골목.
1,658년부터 약령시가 열리던 이곳은 지금도 한약방과 한의원 등 한약 관련 업소 300여개가 성업중이다.

약전 골목을 돌아보다 보면 고풍스런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대구 제일교회 구예배당이다.





112년의 역사를 지닌 대구 제일교회의 구예배당은 고딕 양식으로 193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는 청라 언덕 위로 예배당을 이전하였기 때문에 구건물은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구 제일 교회와 계산 성당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정말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강호동의 마지막 미션은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에 등장하는 대구 최초의 주택 정소아과의 간판을 찍는 것.
진골목(긴 골목)에 자리잡은 2층 양옥 정소아과는 대구부자 달성 서씨의 저택으로 1937년에 건립되었다.
1947년에 소아과가 들어선 이후 내외부 수리 없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일제시대 상류층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지금은 진료를 하지 않고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정소아과의 사진은 미쳐 찍어놓지 못한지라 스샷으로 대신하는 점이 아쉬운데
가까운 시일에 정소아과를 비롯한 대구 진골목 기행을 다녀와서 여러분들께 공개해 드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호동의 대구 여행 마지막은 강호동과 양준엽이 함께 한 대구 대표 음식 기행.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은 막창, 닭모래집.....납닥 만두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1박2일에는 동인동 찜갈비가 소개되는데
필자는 바로 지난주에 동인동 찜갈비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간단하나마 1박 2일 6대 광역시 특집에 나온 대구의 근대 문화 명소들을 소개해 보았다.
자세한 사진과 해설은 관련 상세 포스트의 링크를 눌러 확인하시길 바라오며....
다음 주에 이어질 다른 광역시 기행도 은근 슬쩍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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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도에 소개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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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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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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