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매회 알쏭달쏭한 문제를 제기해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더해 가는 선덕여왕.
지난 회에서는 국선 문노가 주관한 풍월주 비재의 두번째 문제인
신라의 세가지 의미를 덕만공주가 마방진에서 그 해답을 찾는데서 종결이 되었는데

33회 방송에서는 세번째 무술 비재를 통해서 누가 다음 풍월주가 될 것이냐에 촛점이 맞추어질 것 같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들어보았다면
14세 풍월주 호재를 잇는 15세 풍월주는 유신랑이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는 일.

드라마에서는 비재를 통하여 풍월주를 선발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화랑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호재 스스로 유신에게 양위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풍월주의 위는 부제가 이어받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호재의 부제인 보종이 풍월주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마땅하나
보종은 유신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을 뿐 아니라 유신이 '중망(衆望, 여러 사람에게 받는 촉망)'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는데
이는 미실 궁주가 만호태후(진평왕,만명부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종이 유신에게 풍월주의 위를 양보한 것에 대원파가 불평이 많았으므로 이에 유신은 16세 풍월주의 위를 보종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누가 풍월주가 되는지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으니 문노가 주관하는 풍월주 비재의 3가지 문제가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풍월주가 될 때의 유신의 나이는 15세였으니 현재의 엄태웅과는 다소 줄이 그어지지 않는 배역이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꼬투리 잡을 마음은 없고....^^






사실 필자로서는 새롭게 풍월주에 오르는 유신랑보다는 풍월주 호재의 시대가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촬영장에서 만난 호재는 정말 화랑 중의 화랑 '풍월주'로서의 풍채와 카리스마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0화랑이 다 모인 선덕여왕 촬영장에서도 풍월주 호재 '고윤후'는 단연 빛이 난다.






풍월주 호재를 비롯해서 청룡익도의 석품(홍경인),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비천지도의 알천(이승효),
이화정도의 덕충(서동원)...등 서라벌이 10 화랑이 한곳에 다 모였으니 '이보다 더 보기 좋을 순 없다'.






서라벌 최고의 꽃미남 10화랑들이 다 진을 치고 서 있지만 그중에서도 풍월주 호재의 카리스마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앞모습은 물론이고 옆모습도 조각 미남이니 서라벌 여인네들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았을 풍월주 호재에게 딱 맞는 배역이다.






촬영 도중 가끔 이렇게 샤방한 미소까지 날려주니 현대의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 또한 함께 설레이지 않을까....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알천랑 이승효와 함께 잡힌 샷은 저절로 눈이 즐겁다.






경주 신라 밀레니엄 파크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여러번 촬영 현장을 스케치하는 동안에
이요원, 고현정, 엄태웅, 류상육, 이문식, 정웅인....등 여러 탈렌트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싸인도 받았지만
10 화랑의 촬영이 있던 날, 풍월주 호재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의 바로 앞으로 걸어왔을 때
180 이 넘는 큰 키에 광채나는 얼굴, 거기다 발 아래까지 끌리는 화려한 풍월주 의상으로 인해 완전 압도 당해버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싸인 좀 해주실래요?" 할 뻔 했다.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카메라 가방을 열고 수첩과 볼펜을 찾느라 뒤적거리고 있는데
 "자~~ 10 화랑 얼른 용인 세트장으로 이동하세요~!" 하는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필자의 앞에 서 있던 풍월주 호재, 다시 방향을 돌려 황망하게 자리를 뜨고 마는 것이다.
이런....ㅠㅠ
절실하게 '싸인 받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진 것이 처음이었는데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말다니....
아직까지도 살짝 아쉬운 부분이다.






1981 년생으로 지금까지는 시청자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배우 '고윤후'. 
그가 연기한 '14세 풍월주 호재'는 기해년(己亥年,579) 생으로 화랑세기에는 ' 호림공(虎林公)'으로 기술되어 있다. 

호림공은 진골정통으로 복승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지소태후의 딸인 송화공주로 알려져 있는데 
혹은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잘 알 수 없다' 고도 하고 비보랑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진평왕의 황후이자 선덕여왕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바로 호림공의 적형(嫡兄,서자가 자기 아버지의 정실에서 난 형을 이르는 말)이다.

호림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검을 쓰는 법을 익힘)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13세 풍월주 용춘공이 호림공을 부제로 발탁하였고 계해년(603년)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검소하게 지냈으며 진골 정통이었지만 골품으로 뽐내지 않았으며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아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호림공은 처음 문노의 딸 현강랑주(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어 하종의 딸 유모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유신 또한 하종의 딸이자 유모의 동생인 영모와 결혼하니 유신과 호재는 동서지간이 되는 셈이다.)
그 때 미실궁주의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유모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으므로
호림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종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고 호림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져 
풍월주의 위를 유신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호림은 보종을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으며 그들의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고
보종은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고 하니 호림과 보종의 관계는 묘한 뉘앙스가 풍겨난다.
화랑세기의 기록은 보종이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에 촛점이 맞추어지는데
미생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보종의 이력에 대해선 다음 기회가 되면 글을 쓰기로 하고...

풍월주를 양위한 후 호림공은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지만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 동일하게 알천, 임종, 술종, 염장, 유신, 보종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유(遊)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삼국유사에는 보종이 빠진 6인이 모였다고 기록)
"통일의 기초가 호림공 등으로부터 많이 시작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국 통일에 유신, 알천을 비롯한 호림공의 공 또한 지대했을 것으로 볼수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14세 풍월주의 지위를 유신에게 물려주게 되는 호재(호림공).
개인적으로 바라는 바는 비록 풍월주의 위에서 물러나더라도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호재의 멋진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은 조연들의 활약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드라마이다.
얼마전 백제군과의 아막성 전투씬에서 용맹함과 카리스마있는 지도력을 보여
단연 검색 순위상위에 랭크된 알천랑을 비롯해
샤방샤방한 풍월주 호재,
카리스마 호위 무사 대남보등의
10화랑이나 미실을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는 꽃중년 설원랑,
코믹 연기를 담당한 죽방, 고도 등 드라마에서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무르익은 연기를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그 중에서도 미실의 동생으로 출연해서 매번 얄미운 <썩소>로 
시청자에게 각인된 미생(美生) 정웅인을 미실궁 세트장에서 만나 보았다.





원래 꽃미남으로 서라벌 일대를 주름잡았던 미생이 맡은 배역인지라 정웅인의 의상 또한 화려하고도 품위가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기보다 실제 모습은 훨씬 멋지고 풍채도 당당하다.





이요원,고현정,엄태웅 같은 주연급 배우들은
일반인이나 기자는 물론 스텝들에게도 사진 찍히는걸 완강히 거부하는 통에 사진 찍기가 정말 어려운데 반해
정웅인은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요청에 기꺼이 허락하고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야간이라 조명이 너무 어두워 플래쉬를 터뜨리며 몇 장 눌렀더니 
"플래쉬 안 터뜨리면 더 잘 나오는데..."하고 코치까지 해 준다...ㅎㅎ





어설픈 사진 애호가인 필자의 셔터 세례에도 정웅인은 즐겁게 여러번 포즈를 바꾸며
카리스마있는 표정, 재미있는 표정, 귀여운 표정을 번갈아 지어 주어 진정한 연기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톱스타들이 간혹 보여주기도 하는 폐쇄성 같은 것은 도무지 찾을 수도 없었고 
마치 자주 만난 옆집 아저씨같은 소탈함과 친근감을 그에게서 느낄 수가 있었다.





정웅인은 드라마 매회에서 코믹한 모습과 절제된 모습을 동시에 갖춘 미생의 캐릭터를 확실히 보여주는데
8년만에 재도전하는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연극 무대에서 다져진 안정된 연기력을 맘껏 발휘하여 
드라마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감초연기자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라며...
여러가지 즐거운 표정과 포즈로
기꺼이 초보 사진사의 모델이 되어주신 멋진 정웅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정웅인의 배역인 '라벌 최고의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던  '미생(美生)' 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화랑세기 10대 풍월주 十世 美生郞 (10세 미생랑) 편>에서 중략하고... 생략하여...  요약해 보았다.

서기 550년에 태어난 10세 풍월주 미생랑(美生郞) 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아시다시피 미생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인데 
진흥대제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은 까닭에 미생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제는 여러번 불러 입궁시켜 동륜태자,금륜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우게 하였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고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공주들과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다.
이에 진흥대제가 문초하려 하자 사도황후가 비호하였고
진흥대제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미실의 명을 받아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가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라 말에 오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미진부공이 그를 화랑에서 쫓아내려 했지만 미실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문노는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 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하며 내치려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미생을 싫어했고 미생 또한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에 사다함이 곤란하였다.

미실의 남편 세종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생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서기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미생의 나이는 이미 36살이었고
3년 동안 풍월주의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니 하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미생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래 사람의 마음을 몰랐고
성품 또한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화랑도으로 있었기에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만여명이라 함) 모두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미생은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기에 유화((遊花)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고 
미생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미생을 천간성(天奸星)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거할 때도 시첩 수십인이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고 하니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고 하고
진(陳)나라의 사신은 이르기를 자기 나라에도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른바 서라벌 최고의 플레이보이라고 할 수 있다.

미생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는데 미생의 아들인 백생(白生)·월생(月生)·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고
드라마에서 미실의 호위무사로 등장하는 백호비도의 수장인 화랑 '대남보'도 미생의 아들이다.

미생이 백명이나 되는 아들을 사랑하는 정은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는데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품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어머니 묘도부인을 뵈러 갔는데 묘도부인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미생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라고 물으면
미생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주었기 때문에 여러 아들이 미생을 사모하여 따랐다.
미생은 매번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출근하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으므로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지만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미생이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생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생의 노비가 미생의 옥배를 훔친 일이 있는데 미생이 처벌하려하자
노비는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미생의 어머니 묘도부인이 미생을 보고 꾸짖어 
"노비는 수족이요,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부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현사(賢士)를 높이고 무리를 사랑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고 하였더니
미생은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 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하였더니 도둑질은 이내 스스로 그쳤다.

또 미생은 일찍이 동륜태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 다녔는데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를 맺었다.
동륜태자가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죽고 난 후 미생은 당두의 처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 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미실이 곧 미생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고 꾸짖었다.
미실의 말을 들은 미생은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자는 미생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는데 미생은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미생은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였다.
미생은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미생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미생이 조부(調府)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진평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리자 미생은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고 하였다.
당두의 처는 미생의 세 아들을 낳았는데 미생은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일을 서라벌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겼다고 한다.
미생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며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묘도부인은 사도 태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서
미생을 비롯한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미생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색공지신(色供之臣: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 하였다.
미생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은 것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
.

그는 서기 60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60이었다.
..
.
.
풍족하고 부귀로운 화류(花柳)의 일생이다.
.

.

필사본 '화랑세기'는 1989년에 발견되어 오랜동안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책.
원자는 김대문인데 그에 의해 화랑세기가 쓰여진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보는 사람은 자기들이 알고있는 신라의 모습과 따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
당시에 사용하지 않던 글자들이 있다는 점등을 들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화랑세기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삼국사기 자체가 신라인 후손에 의해
유교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므로 신라사회를 미화했을 수 있으며
그밖의 다른 유물들을 볼때 화랑세기에 나타난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풍속등은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라사회의 자유로운 성풍속은 성행위를 묘사하는 각종 토우들이나 성적인 장난감, 삼국유사의 직접적인 성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 이후 유교의식에 젖어 있던 우리네 상식으로는 여성의 지위가 생각 외로 높았던 신라 사회와 
조선에 비해서 너무나 자유로웠던 신라사회의 성의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든 아니든 화랑세기에 그려져 있는 10대 풍월주 화랑 미생은
드라마에 비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간사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여자와 돈을 밝히고 향락에 치우친 불성실한 인간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의리 빼면 시체인 
전형적인
꽃미남 플레이보이 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선덕여왕 촬영장 '신라 밀레니엄 파크 화랑 산채' 에서 연예 전문 케이블 ETN 팀들을 만났다.

미실궁 세트장에서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고 있기에 
누구를 취재하느냐고 물어보니 '류상욱'을 기다린댄다.


얼떨결에 "아...네...그러세요..^^"하긴 했지만 도대체 감이 오지 않는다.
류상욱...??  누구지...?





한참 있으니 미실 고현정의 뒤를 따라 한 화랑이 나타났다.

아름답게 꾸민 미실 고현정의 자태야말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화랑을 보니 눈이 확 뜨인다.
아니....이 훈훈한 꽃남은 도대체 누구냐...?





아하.....이 화랑이 류상욱인가 보다...하고 감을 잡은 필자.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하니 여느 주연급 연기자들처럼 카메라를 피하지 않고 멋쩍은 듯 포즈를 취해준다.

맡은 역할이 뭐냐고 살짝 물어보니 '미실 호위 무사'랜다. 오호.....





미실의 호위 무사답게 촬영장에서 미실이 이 화랑에게 베푸는 관심은 따스하게만 보이는데.....
이들을
쳐다보는 백상승 경주시장과 이요원의 표정이 대박이다.





덕만 이요원까지도 친절하게 손들어 인사하는 훈남의 파워는 역시.....ㄷㄷㄷ...





이 화랑의 정체는 선덕여왕 13회(7/6 월요일 방송분)에서 공개되었는데

미실이 사다함 나무 아래에서 사다함을 추억하고 있을 때 미실의 동생 미생이 한 화랑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는 곧 미생의 100명의 아들 중 가장 무예가 뛰어난 인물로 백호비도의 수장인 화랑 '대남보'
대남보에게 미실은 "넘어서거라...보종을 넘어서거라..."고 말하며
자기 아들 보종에 대한 신뢰를 대남보에게 옮겨 버리는데 그 장면을 숨어서 보고 있던 보종은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 이후부터 그림자처럼 미실을 따르는 대남보를 드라마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