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볼일이 있어 들렸던 날, 점심을 뭐로 해결하지......생각하던 중 
불현듯 예전에 먹어본 찜갈비가 생각이 나서 얼른 동인동으로 차를 돌렸다.

직장 동료의 결혼식 피로연으로 먹었던 동인동 찜갈비의 아련한 맛이 떠올랐기 때문.....
찌그러진 양푼이에 담겨져 나온 매콤한 찜갈비를 처음 대했었을 떄 그 환상적인 느낌은
동인동 근처를 지날 때 마다 입에 침이 스르르 돌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동인파출소 뒷골목길로 들어서니 봉산찜갈비, 유진갈비, 낙영찜갈비, 풍성찜갈비, 아성찜갈비, 산호찜갈비......
주변 일대가 다 찜갈비 식당 일색이다.





지난 60년대부터 동인동의 한 대포집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매콤한 찜갈비를 술안주로 내어놓았는데
음식이 소문을 타고 점점 손님이 많아지자 주변에 찜갈비를 메뉴로 한 음식점이 하나, 둘.... 들어서게 되었고
지금은 동인동 주변에 20 여개 찜갈비 전문 음식점들이 성업중하고 있어서
대구 명물 <동인동 찜갈비 골목>으로 음식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낙영찜갈비집으로 들어가 돼지 찜갈비를 시켰다.
점심 시간인지라 식당 안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상당히 빠른 시간에 상이 차려진다.





반찬이야말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
물김치, 통백김치, 무말랭이무침, 도토리묵, 김치,양파절임, 그리고 상추......
반찬은 그저 곁들이로 나온 것이라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제일 가운데 떡 하니 자리잡은 오늘은 메인 메뉴, 매운 찜갈비....

이곳 동인동 찜갈비의 가장 큰 특징은 접시에 담아내놓는 것이 아니고 불 위에서 쩌낸 노란 양푼이 채로 상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도 요즘 양푼이 찜갈비가 많이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양푼이 찜갈비는 동인동 찜갈비가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맵고 짠 양념이 대세인 대구 음식을 미식가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와 등줄기에 땀이 배일 정도로 화끈한 대구 토박이 음식들은 유난히 중독성이 강한게 특징이다.
특히 갈비살에 빨간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은 양념과 함께 조리되어 양푼이에 담겨진 찜갈비는
그야말로 투박하고 서민적인 대구 토박이 음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중부지방의 갈비찜은 간장으로 깔끔하게 조려 달작지근한 맛이 주를 이루지만 
동인동의 매운 양푼이 찜갈비는 진간장과 조선간장을 적절히 섞어 재워둔 갈비에
주문과 동시에 고추, 마늘 등의 여러가지 양념으로 잘 버무려 양푼이에서 마늘향의 풍미가 배이게 조리된다.
특별히 양푼이에다 찜갈비를 하는 이유는 스텐레스 냄비를 쓰면 양념이 고기에 밸 겨를이 없이 타버리고 말기 때문인데
상 위에 올려진 찌그러지고 낡은 양푼이는 그 음식점의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자랑스런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뜨끈뜨끈한 찜갈비 양푼이에 떡 하니 걸쳐져 있는 집게와 가위가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서양 사람이 본다면 " 아니....테이블 위에 가위와 집게라니...!" 하며 놀랄 수도 있는 상차림이다.
하지만 집게와 가위가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한국 사람은 다 아실 터.....
집게로 집어 가위로 잘 발라낸 갈비살을 상추 위에 올려놓고
파와 장아찌를 하나씩 올려 놓으면 그 모습만으로도 금방 입안에서 군침이 넘어간다.


매콤하고도 부드러운 고기살을 상추에 싸서 입안으로 가져가면 
강하게 배어나오는 마늘향과 함께 달콤하고 매콤한 양념향이 입안을 감돌아 편안하면서도 행복한 맛을 오래도록 느낄 수 있다.
고기를 다 먹고나면 남은 밥을 양푼에 넣어 비빈 다음에 상추나 깻잎에 싸 먹곤 하는데 
고기에 뱄던 양념 맛과는 다른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어 누구나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게 된다.

환절기에 감기 등으로 입맛을 잃은 사람의 식욕을 되돌려주기에 알맞은 동인동 찜갈비.
대구를 찾는 사람들에게 대구 명물로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구 토박이 음식이다.


 올려드린 맛집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모든 리뷰는 전혀 댓가를 받지 않고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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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많던 여중생 시절, 단짝 친구와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그 앞을 지나다니던 대구 계산동 성당.

호기심에 성당 문을 살며시 밀고 안을 훔쳐 보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성당의 높은 첨탑, 하얀 미사포를 곱게 쓰고 미사를 드리던 여자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기도하던 긴 머리 아가씨의 모습도 바로 엊그제 일인양 생각나는데....






대구 나들이길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계산성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담장허물기 운동으로 사라진 담장 둘레에 새롭게 만든 화단엔

금강소나무, 배롱나무, 화살나무, 철쭉 등이 심겨져
예전보다 더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건물은 108년이나 된 역사가 무색하리만큼 깨끗하여 돌아보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다. 
 
 
 

 

성당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기념 성수대가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내부 장식은 간결하고 깔끔하며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느낌이 앞선다.
 

 
양쪽 벽에 늘어선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주는데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 중에는 한복 차림의 성인도 눈에 많이 뜨인다.




갓을 쓰거나 사모관대를 한 이들 성인들은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이다. 

 계산 성당의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신나무골, 세방골에서 에배를 드리다가

1886년에는 대어벌(현 인교동)에 있던 정규옥 승지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정규옥 승지의 집은 관청이 아닌 건물로는 대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899년, 한국식 십자형 목조 성당으로 지어진 본당의 축성식은 성탄절에 거행되었는데

사방에서 축성식을 구경하기 위해 신자와 비신자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력한 지진이 대구 지역을 휩쓸었던 1901년 2월 4일,

제대 위에 올려둔 촛대가 진동으로 쓰러져 제대보와 양탄자에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일어나 이 아름다운 목조 성당은 전소되는 참변을 맞게 된다.


한국형 성당을 화재로 잃게 되자 그 위치에 현재의 벽돌로 된 서양식 성당을 세우게 되는데


설계는 프랑스 선교사가, 건축은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벽돌을 굽는 기술이 우리나라엔 없었던지라 중국인들이 벽돌 공장을 새로 새워 건축을 했으며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건축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서 조달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열차로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서 대구로 우송되기까지 했다.


1902년 12월 3일 첫미사를 드린 후 1903년 11월 1일 열린 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지역 선교사들이 대부분 참석하였고,
 
사방 2백리 안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축성식에 참여하려고 대구로 모여 들었다.

이 축성식에는 인근 주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고,

대구 감사와 지역 유지들도 초대에 응해서 대구 전체의 축제날과 같았다고 한다.




대구에선 전래가 없었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보면 너무나 잘 튼튼하게 서 있어서 성당 건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기와집과 초가집 밖에 없던 시절에 이렇듯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니.....정말 놀랍기만 하다.


이 성당 건물은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건축된 서양식 건물이고 서울,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이다.

경상도 지역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된 이 성당은 현재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에서 시인 이상화가 영감을 얻어 그의 시 '나의 침실로'를 지었으며

1950년 12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이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경북지사가 주례사를 했는데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했다는 일화는

대구사람이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계산 성당 주변 일대에는 우리나라 근대 문화 유적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 뽕나무 골목 안에는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구의 중심이었던 종로, 약전골목, 진골목들을 돌아볼 수 있다.



 

또 계산성당과 마주 보는 언덕은 바로 가곡 '사우(思友)'의 배경이 된 '청라언덕'인데

이곳에는 102년 역사의 대구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초창기 의료 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사 주택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어서

대구의 근대 문화 거리를 돌아보는 골목 투어의 기점이 된다.


108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제 자리에 서 있는 계산성당.


오늘도 여전히 대구의 근대 역사를 알려주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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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원제는 '사우(思友)'였지만 제목을 쉽게 풀어 써서 '동무 생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발표된 이곡은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여고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며
(곡의 후렴 부분을 이중창으로 부르면 진짜 멋지다)
곡 중에 나오는 '청라 언덕'은 어디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교 후에 친구와 들리곤 했던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이 '청라 언덕'이란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한 후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 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고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 세채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산동 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혁우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다.)


따스한 휴일 오후,추억의 '청라 언덕'을 찾아서 봄나들이를 했다.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동산 병원 뒷편, 신명 여고 옆길등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제일교회 옆 
긴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청라 언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교사 주택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은 이제 없고
세 주택들은 선교 박물관,의료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는데
공휴일은 실내를 참관할 수 없어서 정원만 돌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멧돌로 늘어놓은 십자가 형상이 특히 눈에 뜨였다.


대구 읍성 철거 (1907) 때에 나온 안산암으로 기초를 쌓고 붉은 벽돌로 벽을 만든 이 집은
아래는 서양식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로 이은 특이한 동서양 절충식 집이다.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대구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병원장 존슨 박사가 서양 사과나무 72그루를  처음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이곳에서 재배함으로써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 있는 사과나무는 바로 그 나무의 자손목이다.


또 전국 담장 허물기사업의 하나로 유서 깊은 동산 의료원의 담장과 문을 헐었는데
담장의 일부와 초창기 교회의 종들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두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이 되었는데


이 건물은 푸른 담쟁이 덩쿨로 뒤덮여 있어서 '청라 언덕'의 유래가 된 듯 하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방갈로 형을 채택한 주택으로 1910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 역시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다.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현재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었다.


현관 앞에 게양된 태극기에서 그당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청라언덕을 다 둘러보아도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합꽃은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에 나오는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데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백합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청라 언덕에는 등꽃과 라일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벚꽃잎이 장독대며 돌절구에 살포시 떨어져서 청라 언덕의 운치를 한결 더하여주었다.


추억의 청라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나 또한  '동무 생각'을 나즈막히 불러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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