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안동촬영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2.01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유산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70
  2. 2009.04.20 '청라 언덕'이 어딘지 아세요? 52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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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원제는 '사우(思友)'였지만 제목을 쉽게 풀어 써서 '동무 생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발표된 이곡은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여고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며
(곡의 후렴 부분을 이중창으로 부르면 진짜 멋지다)
곡 중에 나오는 '청라 언덕'은 어디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교 후에 친구와 들리곤 했던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이 '청라 언덕'이란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한 후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 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고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 세채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산동 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혁우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다.)


따스한 휴일 오후,추억의 '청라 언덕'을 찾아서 봄나들이를 했다.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동산 병원 뒷편, 신명 여고 옆길등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제일교회 옆 
긴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청라 언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교사 주택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은 이제 없고
세 주택들은 선교 박물관,의료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는데
공휴일은 실내를 참관할 수 없어서 정원만 돌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멧돌로 늘어놓은 십자가 형상이 특히 눈에 뜨였다.


대구 읍성 철거 (1907) 때에 나온 안산암으로 기초를 쌓고 붉은 벽돌로 벽을 만든 이 집은
아래는 서양식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로 이은 특이한 동서양 절충식 집이다.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대구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병원장 존슨 박사가 서양 사과나무 72그루를  처음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이곳에서 재배함으로써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 있는 사과나무는 바로 그 나무의 자손목이다.


또 전국 담장 허물기사업의 하나로 유서 깊은 동산 의료원의 담장과 문을 헐었는데
담장의 일부와 초창기 교회의 종들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두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이 되었는데


이 건물은 푸른 담쟁이 덩쿨로 뒤덮여 있어서 '청라 언덕'의 유래가 된 듯 하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방갈로 형을 채택한 주택으로 1910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 역시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다.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현재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었다.


현관 앞에 게양된 태극기에서 그당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청라언덕을 다 둘러보아도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합꽃은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에 나오는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데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백합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청라 언덕에는 등꽃과 라일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벚꽃잎이 장독대며 돌절구에 살포시 떨어져서 청라 언덕의 운치를 한결 더하여주었다.


추억의 청라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나 또한  '동무 생각'을 나즈막히 불러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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