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번 국도를 타고 올라간 것은 미슐랭 그린 가이드 한국편 때문이다.

미슐랭 미식 가이드북인 레드 가이드는식당에 별점을 매기지만

관광 안내 가이드북인 그린 가이드는 여행지에다 별점을 매긴다. 

인색한 미슐랭 그린가이드가 한국의 길에다 별점 하나를 준 것은 35번 국도 뿐이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35번 국도의 구간.

도산서원을 지나 그림같은 가송리, 청량산을 돌아 청옥산, 넛재를 넘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35번 국도의 끝에는 바람의 언덕이 있었다.

 

고랭지 배추밭 사이 비탈길을 구불구불 올라가 마주한 바람개비들.

멀리서 찾아온 낯선 여행자들을 맞이하기가 그처럼 부끄러웠을까?

하늘 향해 벌린 커다란 팔을 흐릿한 안개 속으로 살짝 감추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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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그 끝머리가 깊숙이 방어진 반도에 꼬리를 감춘 곳,

대왕암을 비롯한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옛 선비들이 '제2의 해금강'이라 부르기도 했던 울산의 끝 '울기(蔚埼)'



이곳에 자리잡은 대왕암 공원은 28만평에 이르는 넓은 공간에 펼쳐진 아름드리 해송림이 특징인데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이곳에 러·일전쟁 이후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인공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림이 조성된 이후 울산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곳이다.





또 이곳에 위치한 기묘한 바위 중에서도 용추암, 또는 댕바위라고도 불리는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
1박2일 6대 광역시 특집에도 소개된 바 있는 이 대왕암은 육지에 있는 바위와 철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우리나라에서 간절곶과 함께 일출을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코 끝이 시리도록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피부 속 깊숙히 파고 드는 피톤치드를 몸으로 느끼며
공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대왕암을 향하여 입구에서 600m 정도 걸어가다 보면
바다를 바라보는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하얀 등대와 만나게 되는데 바로 105년 역사를 지닌 울기 등대이다.




일제가 동해와 대한 해협의 해상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세워진 울기등대는
고종 광무 10년 (1906년) 3월 24일 처음 불을 밝히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에서 3번째 오래 된 등대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울산 방어진항은 매월 6~700척의 어선과 3~4천명의 어부들이 드나들었고 포경업도 성업 중이었으며
관련 산업인 방어진 철공소와 무라카미(村上) 조선소가 들어서기도 한 분주한 항구였기 때문에
이 등대는 동해 남부 연안을 지나는 선박들의 안전을 지키는 등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맨 처음 6m 등탑으로 세워진 등대는 주변의 소나무가 점점 자라나 등대의 기능이 제한을 받게 되자 1972년엔 3m를 증축하게 되는데
그후에도 주변 소나무들이 점점 자라나게 되자 1987년 12월 12일에는 구 등탑을 증축하는 대신 새로운 등탑을 건설하게 된다.
현재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남아 있는 구등탑은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아서
2004년에는 대한민국등록문화재 106호로 지정된 바 있다.





구등탑 대신 1987년 24m의 높이로 건립된 신등탑의 경우 촛대 모양으로 조형미가 아주 뛰어나다.




울기 등대는 지금 단순히 등대의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라 휴양시설로도 이용되고 있다.
등대 주변에 콘도처럼 꾸며진 '송죽당'과 문인들이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문인의 방'등
주위의 솔 향기와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다바람 소리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특이한 하루를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등대 내에 100석 규모의 야외공연장이 있어 봄철, 가을철 주말이면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려
관광객들로 하여금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오솔길공원, 문학공원 등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끈다.

울산지방 해양항만청은 겨울 방학 동안 간절곶 등대와 이곳 울기 등대에서 1박2일 동안 등대지기가 돼 보는 체험 행사를 운행하고 있는데
1월 30일까지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가족과 어린이들은 등대에서 이틀간 머물며 등대불 점ㆍ소등 주기 확인, 항로표지 장비점검, 해양기상 관측 업무, 등대 주변 순찰 등을 체험할 수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문의해 보시기 바라며.....





세간에 일출 사진 명소로 유명한 대왕암 공원이지만 오후 시간에 울기 등대를 방문하신 분들은 해질녘까지 기다려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등대는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하게 되니 등대가 불빛을 밝히는 저녁 시간까지 기다려
어둠을 가르는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 또한 흔하지 않은 체험이 될 것이니 말이다.





간혹 운이 좋으면 이렇게 가슴이 설레이도록 환상적인 노을을 만나 언제까지나 기억될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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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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