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는 선비 호창은 

어느날 우연히 YMCA 회관에서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과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호창의 아버지는 호창에게 서당을 물려받길 권유하지만 

호창은 정림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며, 야구라는 신문물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에 조선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황성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YMCA야구단의 연습장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바뀌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결성된 야구단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송강호(호창) 김혜수(정림)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긴 여운을 남겨주었던 영화 'YMCA 야구단'.

전주 한옥 마을 한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전주 향교가 바로 이 영화의 촬영지이다.


한옥 마을에서도 사람이 잘 찾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곳. 전주 한옥 마을 속의 또 다른 세상, 전주 향교를 찾아가 본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으로 채색되는 전주 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향교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경기전 북편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건물은 조선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주 향교의 현존 건물의 배치 형태는 들어가는 누각인 만화루를 지나면 정면에 일월문이 있고 일월문을 지나면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 서무가 있자리잡고 있으며 대성전 담 뒤로는 명륜당이 있는데
 서쪽으로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와 사마재 그리고 주위에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대지 3130평에 모두 19동, 100칸에 이르는 방대한 전향교는 사적 제 3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무와 서무는 배향 공간이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편의 동재와 서재는 강학공간으로 이분되는데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려조 처음 지어진 건물은 경기전 옆에 세워졌는데 경기전이 지어진 뒤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의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 하여
      화산 기슭(중화산동)으로 이전되었다가 좌사우묘(左社右廟)에 어긋나고 전주성 밖이라 다니기에 불편해서 선조36년(160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향교에는 다섯 그루의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눈에 뜨이는데  향교 내 서문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대성전을 지나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나온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쳐 지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은 대성전과는 달리 전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이 명륜당 앞에서 촬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역시 강학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대칭을 잘 이루고 들어서 있다.




동재의 마루에 앉아 명륜당 마당을 보니 탁 트인 정경이 시원하기 그지없고
특히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그늘을 넓게 드리워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한옥마을의 중심거리인 경기전 앞이나 전동 성당 앞이 인파로 북적이고 있을 때도
마을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향교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일기 화창하고 신록이 짙어지는 오월, 한옥마을 속 또 다른 세상, 전주 향교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은행잎 떨리는 소리, 작은 새소리와 함께 느림의 미학을 느끼는 시간을 가져봄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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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인 구시가지 삼덕동에 대한 나의 기억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서민들이 살았던 우리 동네에 비해서 대구 시청 근처에 있던 삼덕동은
일제 시대부터 이십여년전까지는 대구 시내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살던 대단한 동네였다.

아파트가 많은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 되고
주민들이 근교의 대규모 개발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겨 가면서부터

이곳의 집들은 하나 둘 비워지고 빈 자리는 점점 저소득층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IMF이후는 주민들의 삶이 급격히 기울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라고 했다.





삼덕동이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담을 허물면서였는데
담장허물기는 한 사람의 아주 작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예쁜 정원을 정성껏 가꿨는데 혼자보기는 아까웠다는  대구 YMCA 중부지회 김경민 관장이
자기 집 담장을 먼저 허물면서부터 각 가정의 정원은 골목의 공동 정원이 되었다.

그리고 담을 허무는 데만 그치지 않고 동네 어린이들의 환경 그림을 받아 골목에 전시하고 마을 잔치를 하나 둘 열어갔다.



방치되어있던 점포는 수리해 물물교환 형식의 재활용 가게로 열고 벽화만들기, 골목주차선 지우기 등의 운동이 이어졌다.



담장을 허물고 생긴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전국에서 제일 많은 벽화이다.
담장을 허물어도 남아 있는 다른 집에 회색 집 벽만 덩그러니 있다면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들수가 있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설치작가 김정희씨의 지휘 아래 마을의 벽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삼덕동의 벽화는 동피랑처럼 페인트로 칠해져있지 않고 하나 하나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마을의 역사만큼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완성도가 높고 지속성이 있는 벽화를 만들기 위해
타일이나 병뚜껑, 항아리조각 등이 모두 동원되었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벽화 작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인 벽화는 보는 사람이나 집 주인들에게도 애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삼덕동에는 지금 20채에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200채의 집에 벽화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담장허물기운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허물어진 담 위로 마을 주민들의 정이 오갔고 마을미술관, 마을문화관, 녹색가게, 어린이집이 만들어졌고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새로운 골목 문화가 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어 있던 적산 가옥인 삼덕초교 교장 관사를 교육청과 1년 넘게 교섭을 벌여 위탁받아 '빛살미술관'으로 선을 보였다.

담장을 허물어 둘레에는 나무를 심고 뒤뜰은 남새밭으로 만들었다.



경매에 넘어갈 뻔 했던 맞은편 보리밥집도 우여곡절 끝에 불하받아 개조와 신축 작업을 벌인 후에
현판 '마고재(麻姑齋)'를 달고 풍물, 국악 강습과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술관과 마고재가 있는 거리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고재 대청이나 안방에서 쉬거나 또 나무 아래 의자에서 얘기도 나누고 미술관 그림들을 일삼아 둘러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담장 허물기 사업의 출발지, 동네 미술관과 국악당, 그리고 동네 축제가 있는 곳.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라는 주제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삼덕동을 벤치마킹하려는
공무원, 시민단체들이 전국 곳곳에서 방문하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은 조금 어려운 사정이다.



몇 발자국만 나가도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진 대도시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보물 같은 삼덕동에도 재개발 바람은 어김없이 불어왔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주민들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 갈등이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새로운 마음의 담장이 더 높게 날카롭게 세워졌다.


10년이 넘게 마을만들기 운동이 펼쳐져 많은 성과를 거둔 이곳이 갑자기 불어 온 재개발 바람.
재개발로 높다란 아파트가 이곳에 지어지면
기껏 허물었던 담장과 마을의 벽화와 마을회관과 미술관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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