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동리목월 문학관. 

 

  

석굴암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곳에

우리 문학의 거두인 김동리,박목월 두 작가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로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동리 문학관, 오른쪽엔 목월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지난 번 김동리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데 이어 이번에는 박목월에 대해 조명해 보기로 한다.  

 

 

1915년 1월 6일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에서 아버지 박준필과 어머니 박인재 사이의

2남 2녀 중 맏이로 출생한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泳鐘)이다.

 

 

아버지 박준필은 당시 경주군 수리조합(토지개량조합)의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

어머니 박인재는 목월이 보통학교 4학년 되던 해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신앙은 이후 목월의 정서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목월의 할아버지인 박훈식은 개화의식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개화의식은 목월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 때까지 집안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젊은 며느리가 성경책과 찬송가를 옆에 끼고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은 며느리의 교회 출입을 허락해준 시아버지 박훈식의 관대함이다.

그의 선각자적인 개화의식이 거기 뚜렷이 투영되어 있다.

어린 목월은 그러한 집안에서 법도 있는 사랑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것이다. 

 

  

목월은 1923년에 건천 보통학교를 , 1930년엔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고

계성학교 재학 중인 1933년 동요 '통딱딱 통짝짝'과 '제비맞이'가

각각 '어린이'지와 '신가정'지의 현상에 당선되어 동요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다.

 

1935년, 계성학교를 졸업한 목월은 경주군 동부 금융 조합에 취직하게 되는데

1940년에는 산그늘,가을 어스름,연륜 등의 글이 '문장'지에 추천됨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그 이후 1946년에는 '동시집' '초록별' '호랑나비''산새알 물새알'등의 창작 동시를

 

 

1948년에는 창작 동화집 '눈이 큰 아이'를 간행하는 등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한다.

 

 

그의 동시들은 유년지향의 시,생명 지향의 시,향수의 시,동시 언어의 확대가 특징이다.

 

 

목월 문학관의 전시관에는 그의 저서 및 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목월이 편집일을 보았던 '여학생'지와

 

 

1951년의 동시집 수제본에서부터

 

 

초기의 시집 청록집(1946), 산도화(1955)...

 

 

후기의 시집들......

 

 

그의 창작욕을 짐작할 수 있는 수많은 육필 원고들도 전시되어 있다.

 

 

또 목월의 이력서와.....

 

 

중앙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재직 시절의 월급 봉투도 보이는데

그는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76년 문리대학 학장을 지냈다.

 

 

뻬곡하게 쓰여진 그의 강의 노트에선 반듯한 성격이 미루어 짐작되고....

 

 

 생전의 모습이 담긴 앨범들..

 

 

문인들과의 조우..

 

 

여러분의 친필이 담긴 부채.

 

 

문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

 

 

그의 집필에 도움을 주었던 연필, 만년필,파일롯트 잉크..

 

 

그가 수집했던 우표책 등 여러가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목월 문학관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그의 서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데

 

 

원고가 이리저리 흩여져 있는 앉은뱅이 책상과 한쪽에 놓인 흔들의자는

선생이 방금 전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것만 같다.  

 

 

목월의 초기 시에 나타난 '향토적 정서'는

고향 경주의 문화재와 자연 환경을 통해 형상화된다.

 

 

"나는 늘 혼자였다. 사무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거리랬자 5붐난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 뿐이었다."

목월은 산문 '나와 청록집 시절'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목월의 글은 매우 서정적이고 자연지향적이다.

 

  

초기의 대표작인 '나그네', '윤사월','청노루','산도화'....

이런 작품들은 매우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노래하였는데

짙은 서정성과 함께 우리말의 리듬을 아름답게 살려내었다.

 

 

또한 목월이 노래하는 자연들은 이전의 우리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아름다움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가 노래하는 자연은 목월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자연이요, 아름다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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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대웅전의 꽃살문과 자하문의 단청을 사진에 담은 후

자하문 옆 범영루의 법고를 찍으려 다가가다가  법고 바로 옆 마루에 신문지판이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골판지 같은 단단한 것을 넣고 밖은 신문지로 싼 것처럼 보이는 판 주위에는 여기저기 새똥이 흩어져 있었는데...

 

 

새똥의 흔적으로 보아 천정 어디엔가 새둥지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고 다만 법고 위 천정 쪽으로 두개의 용머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일 뿐이었다.

 

 

그냥 돌아서서 가려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서 왼쪽의 용 머리 쪽을 자세히 보았더니

나뭇가지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용의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지은 것이다.

새는 나들이를 나갔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직 마르지 않은 새똥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둥지 안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용의 머리를 깔고 앉아 지은 새둥지라....

여의주를 입에 물고 천하를 휘어 잡던 용도 그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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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사람들의 필수 수학 여행지 불국사는 언제 가도 경내에 사람들이 바글 바글하다. 

 

 특히 대웅전 앞 석등 앞에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인 관광객들로 추정되는 이 사람들은 한 사람이 석등 앞에 손을 합장하고 한참이나 석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절하고 나오면
그 다음 사람이 석등 앞에 합장하고 서서 또 한참 바라보다 절하고.....
모두가 이렇게 줄을 서서 석등을 살피는 것이었다. 

"참 일본 사람들이란....저런거 구경하는데도 줄을 서서 봐야 하나....질서 의식이 투철한건 좋지만 너무 심하군..."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좌우로 젓던 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는 시선이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다들 석등의 한 가운데 네모난 등집 창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관광객들이 다 물러간 후에 나도 그들이 섰던 자리에 서서 등집의 네모난 창을 바라  보았다. 

네모난 창으로 보이는 것은...대웅전 안의 본존불의 얼굴이었다.
그랬다...!
석등을 대웅전 앞에 놓을 때에 석등을 통해서 부처의 얼굴이 보일 수 있도록 배치하여 놓은 것이었다.

 불국사에 들어서서 청운교,백운교를 계단으로 올라 자하문을 지나
봉로대(향로를 놓는 곳),연화문 석등,대웅전 현판, 대웅전 본존불......
이렇게 가람의 모든 배치가 일직선 상에 위치해 있는데
신라 장인들의 찬란한 솜씨와 더불어 계획적인 가람 배치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석등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하대와 중대에는 쌍잎의 연꽃문이 새겨져 있었고
사방으로 난 팔각형 등집의 네모난 창 주위에는 예전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었다. 

 근데 하나의 궁금증을 풀고 나니 또 하나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팔각으로 된 등집과 팔각 지붕돌(옥개석)부분이 만나는 부분에서 이상한 둥근 물체가 여러개 보이는 것이다. 

 둥글고 검은 물체는 팔각 지붕돌을 빙 둘러가며 골고루 박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그건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왜 동전을 옥개석 아래에 끼워넣어두었을까...?
관광객들이 복을 빌기 위해서 끼워둔 동전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확실하진 않다.

 혹시 석등 아래에다 동전을 끼워놓은 이유가 정녕 복을 빌기 위함이라면
문화재를 훼손하면서까지 소유하고 싶은 그 행복은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다고 살짝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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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국보 31호로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술병 모양의 이 첨성대는

높이 약 9.5m로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되어 있으며 총 석재수는 음력의 일년의 날 수와 같은 362개이다.

13단부터는 내부가 비어 있어서 가운데 난 출입구를 이용해서 사다리를 타고 아래 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라 추측된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처음이고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기록은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에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서운관지나 문헌비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일제 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와다[和田]라는 일본인인데

1910년에 그는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우리 나라 학자인 홍이섭도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 것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상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박동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 해방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첨성대가 실제로 개방식 돔으로써 관측에 불편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어 상설천문대로 보기 어렵다는 학설이 있으며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 보다는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또한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고 주장하고

토속 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하는 학설도 있다.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다 하겠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 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지배적이다.

 

첨성대가 천문대이든 아니든 첨성대는 신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동부 사적 지구 부근을 돌아보는 사람들 중에선

첨성대 앞에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담장 밖에서(사실 담장 밖에서도 거의 다 보인다) 대충 둘러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안으로 들어가서 슬쩍 보고는 "흠....겨우 이런 거였어...첨성대가...?"라며 실망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너무나 소박한 외관으로 인해 소흘히 여겨지는 곳.한 번 휘익 돌아보고는 다른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중간 기착지....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기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숭례문이

우리 눈 앞에서 소실되고 난 뒤에 그 아름다움과 중요성이 새롭게 조명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에 다시 한번 첨성대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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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나 월요일을 맞이하는 스트레스는 막중하기만 하다.

하지만 요즘 여학생들은 물론, 주부들까지 은근히 월요일 밤을 기다리곤 하는데

바로 '꽃보다 남자' 가 대한민국 누나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꽃남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인터넷은 물론, 어딜 가나 '꽃남'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인데

 극중에서 F4 멤버가 살고 있는 호화 주택들 또한 시청자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금잔디를 놓고 구준표와 삼각 관계를 벌이는 윤지후의 

이색적인 한옥집이 대체 어디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다. 

  

 

 

 전대통령의 손자이기도 한 윤지후의 으리으리한 한옥집은 다름아닌 경주에 위치한 '라궁' 

 

 

무한도전 촬영 등을 비롯한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이미 여러번 소개되기도 한 곳이지만

꽃남 촬영을 계기로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라궁에서 숙박하거나

기념 사진이라도 한번 찍어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이 때....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특심(?)한 필자가 라궁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라궁 밀착 취재(?)를 위해 선약을 하고 신라밀레니엄파크로 향하니

담당 직원을 만나기도 전에 부푼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인다.  

 

 

신라밀레니엄파크 주차장에서 왼쪽 산 아래 한적한 길로 접어들면 라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라궁의 입구엔 방문객들이 서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기념 촬영에 빠지지 않는 것은 다름아닌 '구준표나무'이다.  

 

 

 꽃남  8회, 금잔디와의 정식 데이트에서 윤지후는 그녀를 바이크에 태워 자기 한옥집으로 데리고 가게 되는데 

 

 

 두 사람의 데이트를 미행한 구준표는 금잔디에 대해 접혀지지 않는 마음을 괴로워하며 윤지후의 집 앞에서 서성거린다. 

 

 

  질투심으로 괴로워하던 구준표, 급기야 담 옆에 서 있던 나무를 사정없이 발로 차며 화풀이를 하고는 

혼자 길길이 뛰다 돌아가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구준표에게 수난을 당하던 나무가 담 옆에 불쌍하게 서 있다.

내가 갔을 때에도 그 작은 나무는 구준표의 거친 발길질 때문에 지지대 하나가 살짝 뽑혀 있었는데 며칠 전 보수되었다. 

 

 

 8회 방영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구준표나무'는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오는 사람들마다 구준표나무 옆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 나무가 부디 튼튼하게 잘 자라주어야 할텐데.... 

 

 

 구준표가 애태우며 왔다 갔다 하던 돌담길도 여학생들에겐 필수 사진 촬영 코스가 되었다.

 

 

 

  이렇듯 인기를 누리고 있는 라궁은 우리나라 유일의 한옥 호텔인데 

 

 

  '신라밀레니엄파크'의 한 부분인  '라궁(羅宮)'은 '신라의 궁궐'이란 뜻이다.  

 

 

 기존의 한옥들과 달리 전통 한옥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대에 맞게 과거를 재해석하여, 새롭게 현대화한 기능을 담아 재탄생시켰다. 

 

 

 이것은 문화재 형태로만 존재해오던 과거 유산을 실용적 건축물로 재탄생시킨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5월 완공한 라궁은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목수 107명 ,석공 16명 등

전통 한옥 장인들이 모이는 유래없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데

경복궁 증축 이래의 전문 목수 최대 동원이라는 기록을 남기도 했다. 

 

 

  처음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곳은 관리동.

로비, 리셉션데스크, 레스토랑이있는 관리동은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라궁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화려함을 보여준다.   

 

 

 자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금잔디와 꽃남 F4들이 반겨 맞아 준다.

 

 

이어 중정(中庭)을 가운데 두고 ㅁ자 형의 로비가 이어지는데

2층 건물을 그대로 터놓은 서까래 천장과 이를 받치고 있는 육중한 대들보가 그대로 다보이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높은 천장과 독특한 조명등으로 인해 '라궁'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는 위엄과 기품이 드러난다.  

 

 

 

천장 아래는 대형 노리개와 둥근 한지 조명등이 설치 미술작품처럼 걸려 있다.  

 

 

 그 외에도 물결치는 파도처럼 곡선을 그리는 조명등을 비롯해

모든 인테리어가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특별한 멋을 더해준다.  

 

 

  이 종이 공예 작품들은 공예 작가 차현림씨의 작품이다.  

 

 

 중정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아 리셉션 데스크로 연결되는 관리동의 1층에는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전통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ㅁ자 형 로비에 둘러 싸인 중정에는 열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가 있는데 

어느 공간에서나 창을 통해 이 중정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한지로 된 문살 앞에 휴식하듯 놓인 화분과 토기,가구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오후의 빛이 잘 비쳐드는 아담한 리셉션 데스크의 직원들은 예약차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분주해 보였다. 

 

 

 

 호텔 직원들은 다 이렇게 신라인 복장을 하고 근무를 하는데  

 

 

 꽃남 방영 이후 더욱 많이 알려진 라궁에는 평일에도 예약이 밀려들고 있다는 후문이....  

 

 

 

 관리동의 2층은 한식 레스토랑인데  여기에서 라궁을 찾은 이들을 위한 식사가 준비된다. 

 

 

 녹두전, 제주생갈치구이, 소갈비찜 등으로 이어지는 한정식이 저녁 메뉴이며,

아침으로는 정성스럽게 끓인 죽도 제공된다는데 숙박 요금에는 석식과 조식이 다 포함되어 있다. 

 

 

 특히 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라궁의 운치있는 전경 덕분에 그 맛이 배가가 된다고....  

 

  

 

 전체 건물의 구조는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ㄴ자로 객실이 연속해있으며

로비가 있는 관리동과 함께 ㄷ자를 구성,

뒤쪽 산으로 이어지며 빙 둘러싸인 ㅁ자형을 구성한다.  

 

 

 라궁의 배치도를 보면 복잡한 이 건물의 구조 이해에 조금은 도움이 되실 듯....  

 

 

 호텔의 꽃은 객실....오천평이나 되는 대지 위에 세워진 라궁의 객실은 16개에 지나지 않는다.   

 

 

 길게 이어지는 지붕을 공유한채 독립된 각 객실이 회랑을 따라 이어지는 형태로 지어졌다. 

 

 

 객실의 형태는 앞쪽 호수로 돌출된 누마루형, ㄷ자형을 기본으로 하는 마당형,

그리고 스위트룸,로열 스위트룸 총 네가지 유형이다.  

 

 

  작은 연못이 있는 서쪽편에서 보면 객실은 누마루형과 마당형이 교차되면서 이어지고 있는데 

 

 

 누마루만 반복되면 외관상 모양이 좋지 않기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호수쪽으로 돌출된 누마루가 있는 누마루형과 상대적으로 마당이 더 넓은 마당형이 교차되도록 하고  

 

 

 양끝에 각각 스위트룸을 마련, 반복의 끝에서 약간의 변주를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어떤 하루를 누릴 수 있을까?

리셉션 데스크에서 키를 받아든 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랑 맨끝에 위치한 객실로 향했다. 

 

 

  라궁의 제일 가장자리인 이 방은 '로열 스위트룸'이다. 

 

 

 카드 키를 갖다 대면 열리는 현대식 호텔문 대신 삐거덕거리는 나무대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문을 열고 빼꼼이 들여다 보니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라서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내부는 29평 정도인데 대청 마루, 안방, 침실, 미니바, 누마루 스파,마당이 자리잡고 있다.  

 



 

깔끔하게 마감된 대청마루에는 장지문을 뒤로 하고 전통미를 가미한 소파가 갖추어져 있다.



 

한옥이니까 당연히 방바닥에 이불을 펴는 좌식 구조이거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객실 내의 모든 가구는 입식인데 좌식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온돌이 도입되기 전인 신라 시대에는 침대, 의자등을 사용한 입식 생활을 했으므로

신라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대청 마루문은 유리 미다지로 되어 있어 창을 열지 않아도 툇마루가 달린 아늑한 마당이 다 보인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이면 마루 문을 열고 남서쪽에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에 느긋하게 몸을 맡기며

복잡한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잊고 있었던 고요의 미덕을 오랜만에 흠뻑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  

 

 

 대청마루 오른편에는 침실이 자리잡고 있다.

 

 

 

 조용하고 아늑한 침실은 적막함 속에서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서인지 TV조차 비치해 놓지 않고 있었다. 

 

 

 침실의 모든 가구는 금빛 장식을 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는데  

 

 

 불꽃 모양 스탠드를 밝히고 붉은 빛에 금빛 수를 놓은 침구 속에 파묻히면 

마치 신라의 임금이 된 듯한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스파가 따로 있지만 객실에는 화장실 겸 욕실이 2개 더 있는데 여기는 침실 옆의 욕실이다. 

 

 

 대청 마루를 통해 거실의 구실을 하는 안방으로 들어가면

라궁 특유의 금장식이 더해진 전통가구들이 양쪽에 놓여 있다. 

 

 

 대형 TV가 자리잡고 있는 화사한 문갑.  

 

 

불꽃 모양 금관 장식과 드리개 장식을 인용한 옷장. 

 

 

 금관 달개의 모양을 응용한 문고리. 

 

 

다양한 종류의 화려한 문갑이며 장식장들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전화기도 방 안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안방 맞은 편 왼쪽은 미니바인데 

 

 

 차를 마실 수 있는 용품들과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다.

 

 

 이 객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누마루에 있는 '스파'이다.

 

 

 

사방이 장지문으로 둘러싸인 이 스파는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임금님의 욕실 같지 않은가. 

 

  

 욕조의 크기는 제법 커서 2~3명이 들어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경주는 수돗물조차 수질이 좋기로 유명한데 온천수의 수질이야 더 설명할 것도 없다.  

 

 

 더욱 기억에 남는 온천욕을 즐기려면 장지문을 활짝 열어도 될 듯.... 

  

 

로열 스위트룸에선 누마루 밖에 선 대나무가 살짝 시선을 가려주니  

 

 

  장지문을 열어둔 채로 햇살 비치는 누마루에서 스파를 즐기는 짜릿함도 체험해 보면 좋을 듯... 

 

 

 

 로열 스위트룸을 나와 마당형 일반 디럭스룸의 대문도 열어보았다. 

 

 

 한옥 마당 가운데에 특이하게도 노천 스파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일반 호텔에서도, 기존 한옥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경험이다. 

 

 

 ㅁ자형 한옥으로 둘러싸인 노천 스파는 대문만 닫으면 바로 은밀한 공간이 되어

낮에는 환한 햇살 아래, 밤에는 달빛 아래서 환상적인 온천 체험을 하게 해 준다. 

 

 

 이 디럭스룸의 면적은 23평 정도라고 한다. 

 

 

 

객실 동쪽 언덕에는 세 채의 오래 된 한옥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숙재헌'이라 불리는 이 고가들은 댐공사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한 건물을 옮겨 놓은 것이다. 

 

 

 

 라궁이 현대화된 최신 한옥이라면 숙재헌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낡은 한옥이다. 

 

 

 시대를 초월해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두 한옥을 비교해 보는 것도 아이들에겐 충분한 체험 학습이 될 것 같다.

  

 

 

 하루종일 필자와 함께 라궁을 둘러보신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의문이 생기실 것 같다.

아니...그럼.....윤지후의 방은 대체.....어딘데.....?? 

 

 

 라궁의 외부는 윤지후의 한옥집이 분명하나 윤지후의 잘 꾸며진 거실이며 침실은 이곳에 없다.

우리가 '꽃남'에서 만나게 되는 윤지후 한옥집의 실내는 단지 드라마 세트일 뿐이다.  

 

 

  라궁 방문객 중 운이 좋은 분은 드라마 출연진들을 불시에 만날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갈 때마다 방송국 스텝들과 마주치곤 했으니....

 

하지만 이곳에서 준표나 지후를 못 만나더라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를 마시길 바란다.

박태환을 닮은 '신라 꽃남'이 여러분들을 신라 천년의 향기 어린 '라궁'으로 인도해 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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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근하고 화사한 봄날 오후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을 찾아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란 말..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사회지도층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富不三代)"란 말이 있지만 경주 최부잣집의 경우엔 예외이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무공 최진립이다.

 청백리로 유명한 최진립은 지극히 검소해 300년 부의 토대를 닦았는데 

최국선을 비롯한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 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12대 300년 이상을 만석꾼으로 일가를 이룬 경주 최부잣집의 300년 이상을 이어온 <가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아라.(큰 벼슬을 하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라.(신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남들이 어려울 때 재산을 모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가문의 며느리 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가난을 체험해 보아서 어려운 사람을 이해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교동에 자리잡은 최씨 고택을 돌아본다. 

최씨 고택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 경에 건립된 집이다.  

 이 고택은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데  


 원래는 99칸이었던 이 집은 현재 대문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채로 오래 방치되었는데 


 근래에 옛 모습 그대로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하인들이 기거하던 곳은 대문채이고 


 대문채 옆 텃밭에서 마주 보이는 곳은 안채이며 오른쪽이 유명한 최부잣집의 고방이다.


최부자집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고방... 

 소작농들에게서 거둔 볏섬을 차곡차곡 쌓아두던 고방은 크기도 크거니와 건물의 높이도 엄청 높다.


 이 고방의 열쇠는 마님 만이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비어 있어 자물쇠로 잠글 필도 없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지금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는 듯 하다.


 안채 앞의 절구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사실 이 집 뿐 아니라 입구 오른 쪽에 있는 요석궁(현재 음식점)을 비롯하여

이 일대에 있는 모든 집이 다 최부자의 집이다.


 만석 지기 최부자집의 일년 소작 수입은 삼천석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천석은  집 안에서 쓰고 일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데에,

나머지 일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에 썼다고 한다.

쌀 일천석이라면 당시의 경제 규모로선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최부자집에 과객이 많을 때엔 일백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집 안에 다 수용을 못해 최부자집 주변의 집으로 과객을 보낼 땐

반드시 과메기와 쌀을 같이 보내 손님을 대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과객들이 떠날 때엔 과메기와 하루 양식,노잣돈까지 챙겨서 보냈다고 한다. 


 최부자집의 과객 대접이 융숭하다는 소문은 경상도,전라도 뿐 아니라

이북 지역까지 널리 퍼졌다고....


이런 만석 지기 재산은 12대에 끝나게 된다.

하지만 자녀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씨 고택을 방문하는 이들은 한결같은 감동을 받고 나서게 된다. 


  '부불 삼대(富不三代)'라고 부자가 3대를 이어가기 힘든 세상에

12대를 부를 누린 최부자집의 가훈에서 받은 교훈보다 더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렇게 지켜 온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시켰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300년간 묵묵히 실천해 온 최부잣집의 교훈을 본받는

재벌이나 지도자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나타나 주길 바라면서 최씨 고택의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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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능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떠세요?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완결편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지고

무심한 낮달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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