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햇빛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받아 우개지륜을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 리나 뻗쳐 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맑고 잔잔한 호숫물이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싼 속에 한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 속 모래알까지도 헤아릴 만하구나

 

한 척의 배를 띄워 호수를 건너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은 곁에 동해가 거기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의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동해의 경계여

 

이 곳보다 아름다운 경치를 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고려 우왕 때 박신과 홍장의 사랑이 호사스런 풍류이기도 하구나

 

강릉대도호부의 풍속이 좋기도 하구나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운 정문이 동네마다 열렸으니 즐비하게

 

즐비하게 늘어선 집마다 모두 벼슬을 줄 만 하다는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가 이제도 있다고 하겠도다 

 

 

- 정철 / 관동별곡(關東別曲) 에서 -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경포대를 묘사한 한 구절이다.

육순을 바라보는 국어 선생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 구절을 음미하듯 읊어주셨다.

그러면서 동별곡의 아름다운 귀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심하게 꾸짖으셨는데......

열일곱, 철딱서니없이 자란 아이들이 고전의 아름다움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

보지 못한 경포대의 아름다움을 어찌 체감할 수 있었으랴......

 

 

 

 

다시 찾아본 강릉여행길, 정철이 읊었던 관동별곡의 경포대는 어떠한 모습일까.

경포호수변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소나무가 듬성듬성 느러선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본다.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야산을 몇걸음 걸으니 바로 경포대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공원 주변에는 다른 조형물도 있지만 강릉의 1번지 경포대에 올라애 제대로 경포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단 아래서 봐도 누각의 규모가 꽤 크다. 부연이 가설된 육중한 팔작지붕은 정자를 더욱 웅장하게 보이게 한다.

 

 

 

 

경포호를 향하고 있는 정자의 앞부분을 광각이 아닌 카메라로 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철제 난간에 기대어 한껏 몸을 뒤로 젖혀보아도 누각의 일부분만 카메라로 담을 수 있을 뿐이다.

 

 

 

 

경포호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경포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꼽히어왔다.

고려 충숙왕 13년인 1326년에 현재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처음 세워졌던 것을

중중 3년 150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고 그 이후 여러번에 걸쳐 중수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경포대의 현판 중 경포호쪽으로 걸린 현판은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이익회가 쓴 글이라고 한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5칸의 규모인데 총 28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고 

우물마루로 짜여진 바닥은 3단의 단차를 두어

사용자의 신분 및 계급에 따라 자리 배치를 달리하는 점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율곡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판각한 것과

숙종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과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 난간에 서서 경포호를 바라보니 너른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렸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관동별곡의 한구절,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맑고 잔잔한 호숫물'이라는 싯귀가 눈앞에 펼쳐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눈 감고 싯귀를 음미하던 국어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만 같다.

 

 

 

 

강남에 비 개이자 저녁안개 자욱한데

비단같은 경포 호수 가이없이 펼쳐졌네

십리에 핀 해당화에 봄이 저물고 있는데

흰갈매기 나지막이 소리내며 지나가네

 

정조대왕은 '강남소우석람암(江南小雨夕嵐暗)'에서 봄날의 경포호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겨울에도 이렇게 풍광이 아름다운데 봄날의 경포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 너머로 마른 갈대만이 바람에 흔들리는 경포호지만

성현들의 시처럼 철쭉꽃, 해당화가 피고 벚꽃이 줄을 이어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날의 경포호를 혼자 상상해보면서 경포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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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무작정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여정을 멈추게 한 도시, 강릉.

영동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강릉 구경은 하루만에 끝내기엔 너무나 볼거리가 많다.

사시사철 푸르른 동해를 품은 경포대 해수욕장과 함께 커다란 석호인 경포호,

관동팔경의 하나로 그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수가 나올 것 같은 누각 경포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죽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과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생가,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강릉 객사문,

에디슨의 세계 최초 축음기 등 수백억에 이르는 소장품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 등등......

강릉에 소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멋과 풍류를 사랑하는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고 싶은 집으로 꼽히는 곳은 단연 선교장(船橋莊)이다.

 

 

지난번 1박2일에 소개되어 출연진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기도 했던 선교장은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오른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연지(蓮池).

연지 안에 날아갈 듯 자리잡은 아름다운 건물의 이름은 활래정(活來亭)이다.

소나무 숲을 뒷배경으로 하고 연못 가운데도 멋들어진 소나무를 거느린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인데

이곳은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여름나절에 찾아왔더라면 연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연지를 볼 수 있을텐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연지는 어쩐지 쓸쓸함만 더 해준다. 
 

 

활래정을 지나 선교장 앞에 서니 24간이나 되는 행랑이 시선을 압도한다.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처럼 길게 늘어선 행랑은 바로 하인들의 방.

그만큼 하인들의 수도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도망친다는 뜻의 '줄행랑'이란 용어가 이곳 행랑채에서 생겼다는 설도 전해 내려 오는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보존되어 온 집이다.

선교장(船橋莊)이라는 명칭은 예전에 지금의 경포호와 연결된 수로가 있어

배를 대는 선교(船橋)가 집 앞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경포호와 선교장사이에 논밭이 들어서서

선교장 앞에까지 배가 들어오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에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원래는 아흔아홉간이었다는 선교장은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안채 주옥, 열화당, 활래정, 서별당, 행랑채 등 84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열화당은 남자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로 1815년(순조15년)에 이후가 건립한 건물이다.

 

 

 


 

 

 

열화당(悅話堂)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구절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열화당 툇마루 앞에는 이렇게 서양식의 테라스가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양반 살림집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물인 이 서양식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영동지방 여행을 왔다가 선교장에 장시간 머무르다 간 후

 

그 답례로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에서 구리판을 들여오고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테라스는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구조물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별당은 이씨가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되었고 방과 마루의 모든 벽페가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들의 성품과 면모를 보여준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를 전주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에 건립된 건물로서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이다.

 



 

 

안채, 별당, 사랑채를 이어주는 대문들이 한줄로 늘어선 모습이 멋스러운데 선교장에는 이런 대문이 모두 12개가 있다.


 

 

만석꾼 곳간채에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베풀던 선교장.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 선교장.

뒷산의 노송 숲과 활래정의 연꽃, 경포 호수 등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후덕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인 선교장은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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