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만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던 경주.

좀체로 눈이 오지 않던 남쪽나라 경주에 내린 눈이었던지라 눈이 온다는 기쁨의 환호성도 잠시뿐

시내 곳곳에 교통 두절과 함께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일어나 북새통을 이루었던 하루였지요.

 

많은 눈이 내린 다음날, 기온이 급강하하면 내렸던 눈이 그대로 얼어붙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며 도로에 쌓인 눈이 녹아 통행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이 밟고 다니지 않은 곳과 그늘진 장소에는 하얀 눈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는데........

 

 

 

 

 

아침에 첨성대 앞 도로를 지나다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풍경을 마주치게 되었답니다.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 눈쌓인 고분들 위에 이상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뭔가 하고 자세히 보니 하얀 눈이 덮힌 고분 위에 시커먼 줄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그어져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가까이 가보았더니......역시나! 였습니다.

누군가가 고분 위에서 신나게 눈썰매를 타고 내려온 흔적이 역력했어요.

삐뚤삐뚤 발자국을 남기며 올라간 흔적과 함께 눈썰매를 타며 내려온 흔적이 보기싫게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도 문화재 관리인들이 지키면서 사람들이 밟고 올라가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는 고분인데

하얀 눈이 곱게 내린 고분 위에서 마구 눈썰매를 타고 내려와 시커먼 흔적을 만들어 놓다니요!

 

동그란 고분 위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인데

누군가가 자신만의 추억과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여러사람이 보고 누릴 즐거움을 희생시켜 버렸군요!

하얀 고분 위에 보기 싫게 그어진 시커먼 줄들은 보는 사람의 눈쌀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풍경입니다.

 

 

 

 

혹시나 하고 다른 고분을 보았는데 여기도 역시나! 군요.

바로 앞에 올라가지 말고 문화재를 보호해달라는 팻말이 버젓이 있는데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한무리의 중국 관광객들이 고분 위 눈썰매 자국을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떠들며 지나갑니다.

우리나라의 좋은 것만 보고 가야할 외국인 관광객들 보기에 정말 부끄럽게 짝이 없는 광경이네요.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 문화재 보호 의식은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반월성, 대릉원 근처의 모든 고분 위에는 사람들이 눈썰매 타고 내려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얀 눈이 고분 위에 곱게 쌓인 모습을 보고 싶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겐 정말로 고개 돌리고 싶은 풍경입니다.

 

 

 

 

반월성 앞을 떠나 대릉원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고분 봉황대로 가보았습니다.

'봉황대는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 설마 눈썰매를 타기야 했을려고?'

이렇게 생각하며 봉황대로 가보았지만 여기도 마찬가지군요!

고분의 규모가 큰 만큼 봉황대에는 사방에서 올라간 흔적, 썰매 타고 내려온 흔적으로 완전 난리가 났습니다.

 

몇년전에 봉황대 위에서 스노우보드 타던 사람의 사진이 포털 사이트에 올랐던 일이 기억나네요.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개념 말아먹은 인간이라고 욕 많이 했던걸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텐데

이곳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남들에게 욕 얻어 먹는 것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분들인가 봅니다.

 

경주 시민들 중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우리 어릴적엔 고분 위에서 씨름하며 놀았고 눈오면 왕릉 위에서 비료 푸대 타고 내려오며 놀았는데 뭐 어떠나고.......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의 어릴적 추억처럼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그런건데 그게 뭐 나쁘냐고.......

 

맞습니다. 한 사람 쯤 고분 위에서 눈썰매 타고 내려온다고 사실 고분이 망가지는건 아니겠지요.

문화재 보호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에는 첨성대 위에 떼로 올라가 수학여행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 하나 쯤이야 하는 어때! 란 생각을 가지고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을 한다면

백년 이후 우리가 자손에게 물려 줄 문화재는 과연 얼마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까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들이 내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다양한 경험과 귀중한 추억이

'고분 위에 올라가 눈썰매타는 일'이라면 그런 경험과 추억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왕릉이나 고분 위에 몰래 올라가 신나게 눈썰매 타고 놀았던 우리 아이들의 추억이

나중에는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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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일 경부선 동대구 - 부산 KTX 2공구 완공으로 인해 
신경주역 완공과 함께 경주도 KTX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경주 시민인 필자. 그동안 서울에 한번 가려고 하면 고속버스를 타고 가거나
경주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환승하는 방법,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해서 동대구역까지 가서 KTX를 이용하는 방법 등으로
서울 한번 가는데 3시간 반에서 4시간 이상 걸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신경주역에서 서울까지 2시간 5분.
좌석을 찾아 앉아서 책 좀 읽다 약간 졸다 보면 어느새 신경주역이니
경주 촌사람이 서울 나들이하기 정말로 편해진 세상이 되었다.

서울 - 신경주간은 2시간 5분, 대전 -신경주는 1시간 5분만에 주파하게 되는데
특히 부산 - 신경주 구간은 26분, 동대구 - 신경주 구간은 겨우 15분 밖에 걸리지 않아

동대구에서 경주행 KTX를 타시는 분들은 제대로 앉지도 않고 서성대다가 내려야 할 정도이다.





경주를 통과하는 KTX는 기존 경주역을 경유하지 않고 새로 완공한 신경주역을 통과하는데 
기존 경주역이 경주 다운타운 한가운데 있는데 반해 신경주역은 경주시내에서 뚝 떨어진 건천읍 화천리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신경주역 개통 이틀 전에 역을 답사하러 갔던 필자,
한참을 가도 보이지 않던 역사가 갑자기 산 속에서 나타나길래 잠시 당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멀리서  한눈에 봐도 신경주역 역사는 정말 웅장하기 이를데 없다.
입구는 버스, 택시, 승용차 진입로가 각각 따로 있는데다 아직은 유동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아 한산한 편이다.
경주 시내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신경주역은 접근성이 떨어지는게 최고의 단점인데
경주 시내에서 택시를 타면 약 15,000원의 주행료가 나오고 승용차를 이용하면 하루 13,000원의 주차료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경주 시내 버스 많은 버스 노선(70번, 700번 등...)이 신경주역을 경유하고 있으므로 버스를 이용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신경주역에서 렌트카를 이용할 수도 있는데 신경주역에서 인수및 반납하는 조건으로 
신형프라이드, 신형엑센트 차량이 24시간 기준 4만원(초과시간당 4천원 추가)으로 이용이 가능하므로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렌트카를 이용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더 나을  듯.....(신청은 신경주역 여행 센터)





광활한 부지에 자리잡은 신경주역은 역사 마당도 엄청나게 너른데
고분의 도시 경주 답게 공사할 때 발굴된 방내리 고분군 1호 돌방 무덤이 역사 마당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게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도시 역 주변에는 수많은 점포와 식당이 난립하기 마련이지만 신경주역 주변엔.....정말 아무것도.....! 없다.





역사 자체가 산 속에 있기도 하지만 마치 고속도로 같은 진입도로 옆에 있던 기존 마을은 움푹 꺼져 있는데다가
마을 건물 대부분은 축사이기 때문에 역사 마당에 들어서게 되면 좋지 못한 냄새도 살짝 풍겨 처음 찾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현재 경주시 관계자들은 농장주들과 협의하에 빨리 축사를 철거할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는 상황.
지금은 겨울이라 악취가 많이 심하지는 않지만 봄이 되기 전에 다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유리 궁전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신경주역사는 처음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하는데
완만한 곡선으로 표현된 역사의 지붕은 한옥 지붕의 형태를 본떠 디자인한거라고 한다.





역사 주변에 아무런 편의 시설이 없듯이 역사 안도 아직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진에는 일부분만 나왔지만 신경주역 대합실 안은 정말 엄청나게 크기도 하다.
하지만 의자의 수는 많지 않고 매표소 또한 4 개소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이용객이 늘어나면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을지.....

신경주역사 내 이용객들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편의시설도 거의 없는 형편인데
현재 편의점 한곳과 커피 및 음료 자동판매기 3개, 그리고 최근에 생긴 간이 음식점 한곳이 고작이다.
현재 신경주역을 이용하는 이용객은 하루 평균 평일은 4500여명, 주말은 7500여명 수준이지만
갈수록 이용객이 늘어나는 형편이라 이런 불편한 점은 하루 빨리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는 양쪽에 도합 4군데가 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상행이라 내려올 땐 계단으로 내려와야 해서 짐을 들고 내려오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이 사진은 개통 이틀 전의 사진이라 이용객 한 없이 썰렁한 모습인데 역사내의 경주 신역사 문화재 전시관도 아직 준비 중이다.





플랫폼에 올라와서 역사의 지붕을 보면 광명역과 흡사하기도 한데 한옥의 곡선을 살린 물결 모양의 지붕이라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밤에 본 플랫폼의 모습. 신경주역을 이용할 때 마다 서너번에 걸쳐 한장 씩 찍어둔 사진이라 밤과 낮의 사진이 섞여 있다.





플랫폼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 설레이는 경험이다.





그것이 비록 너무나 세련되어 낭만이 다소 퇴색된 KTX일지라도 말이다.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도 많은 신경주역.
하지만 경주를 가장 빨리 찾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KTX를 이용하는 방법인 것 같다.
이번 설날 연휴는 2일부터 6일까지 5일간 휴무가 주어져 가족 여행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인데

혹 설날 연휴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은 KTX를 이용한 경주 여행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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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고 한다.
강원도 산간 지역에선 내린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또 눈이 내려 뒤덮이고......눈이 정말 지긋지긋할 법도 하다.
하지만 경주에선 지난 2월에 눈이 살짝 내렸다가 금방 녹아버린 것 외엔 겨우내내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
9일 아침에도 역시 아침에 눈이 조금 내리다간 언제 내렸냐는 듯 금방 다 녹아버려 모두를 실망시켰다.
그런데 10일 아침, 이상하게 창 밖이 환하여 평소보다 눈이 빨리 떠지길래 혹시나 하여 창을 열어보았더니
이런 놀라운 일이 있나.....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경주를 하얗게 뒤덮어버린 춘설(春雪)이라니....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도대체 어떻게 출근을 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
경주는 워낙 눈이 오지 않는 곳이라 스노체인은 물론 눈 오는 날 운전한 경험조차 없으니 말이다.
할 수 없이 많은 경주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버스, 도보로 출근하느라 정말 북새통인 하루가 되었다.

오후가 되니 길에 쌓인 눈도 많이 녹아서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며 담은 춘설 사진 몇 장을 소개해 드린다.
내년에도 경주의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드린다고는 절대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한창 눈이 내리던 아침 8시의 경주 한전 사옥. 경주는 이렇게 한옥으로 된 공공건물이 많다.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사적 328호 용강동 고분. 쌀밥처럼 눈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황성 공원에 위치한 경주 도서관, 역시 한옥이라 너무나 멋지다.


경주 시민의 휴식처 황성 공원, 눈이 덮힌 숲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반월성 앞 초지 뒤로 멀리 보이는 숲은 계림. 4월이 되면 이 넓은 초지가 노란 유채꽃으로 가득해진다.


반월성 앞에 위치한 첨성대.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찍다.


 4월이면 벚꽃과 유채로 아름다운 반월성도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안압지 입구에서 본 세 전각.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눈은 하얀 눈은 너무나 정결하다.


장소를 바꾸어서 담아 본 안압지의 전각들. 호수 주위에 눈꽃이 피었다.


눈사람 만드는 연인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이다.


바람이 부니 나무에 쌓였던 눈들이 우수수 연못으로 떨어진다.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서출지의 설경도 일품. 남산에 올라 설경을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여름엔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지만 겨울에는 이렇게 정자의 반영을 볼 수 있는 멋진 서출지.


보문단지로 들어가다 신호 대기 중에 담은 명활산. 비담이 난을 일으겼던 역사적인 산성에 눈꽃이 만발했다.


보문단지 입구 벚나무길이 너무 아름다워 운전 중에 노파인더로 셔터를 눌렀다!  나 미친거 아님...?


보문 단지 전경, 유람선 선착장이 보이고 멀리 엑스포 공원과 경주 타워, 경주 월드가 보인다.


호숫가 산책길이 아래로 보인다. 걸으면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날 것 같은 길.


호텔, 콘도가 보이는 보문 전경. 경주 시내보다 눈이 더 많이 내린 보문단지는 전체가 하얀 세상이 되었다.


한옥으로 된 보문 상가 대부분이 폭설로 인해 문을 닫아 길에 사람 하나 없다.


 오후 햇살을 받아 지붕 위의 하얀 눈이 반짝 반짝 빛이 난다.


상가길을 걸어서 돌아다니는데 사람 한명 만나기가 힘이 든다.


보문단지 안에 있는 국악 공연장도 지붕에 이쁘게 눈을 이고 있다.


사람들로 가장 많이 붐비던 선착장 앞 광장도 인적 없이 고요하기만 하고 호텔들도 너무 심심해 보인다.


산책길에서 본 유람선 선착장엔 유람선도 오리배도 모두 폐업이다.


한국 관광 개발 공사가 위치한 육부촌. 직원들이 나와 열심히 눈을 치웠다.


역시 육부촌의 위엄있는 전각 지붕을 배경으로 한 컷...


진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출사지인 보문정이 춘설 여행의 종점이다.

사람 가슴 설레이게 하는 춘설(春雪).....
이 밤, 자고 일어나면 가버린 님처럼 다 녹아버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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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담력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한밤중에 공동 묘지를 가서 묘지 앞에 숨겨 놓은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는 그런 미션들이 있는데
다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무덤 근처에서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기절 초풍해서 쓰러지곤 한다.

만약 경주 사람들에게 그런 담력 훈련을 시킨다면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희희낙락하며 미션을 쉽게 수행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부터 자랄 때까지 커다란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무덤으로 소풍을 가고.....무덤 옆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심지어는 무덤 사이에서 데이트도 하기 때문이다.

휴일 한가로운 오후에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서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무덤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가 무덤인지...아니면 아주 잘 가꾸어진 공원인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 곳에 가면 쌍쌍이 데이트하는 연인 또한 많이 만나게 된다.
젊어서부터 무덤 사이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는 경험을 하면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당연성을 일찍 체험하게 되고 성숙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만족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보며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노서리 고분군의 휴일 오후를 소개해 드린다. 
 

수학 여행 때 들리게 되는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은 담으로 둘러쳐져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시내 번화가 바로 옆에 위치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은 누구나 산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사적 38호),길 서쪽은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으로 불리운다.
노동리 고분군인 봉황대는 바로 전에 소개해 드렸고 바로 맞은 편 노서동의 넓은 평지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소개하면..... 

관련 포스트 :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노서리 고분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크기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130호 고분이다.  

 130호 고분 앞에 작은 규모의 132호 고분이 겹쳐져 보인다. 

제일 앞은 마총(馬塚,말뼈와 안장의 조각이 나와서 마총이다), 두번째 작은 고분은 132호 고분,뒤는 130호 고분,
그리고 오른 쪽은 노서리 고분군 중 제일 커다란 규모의 쌍분 134호 고분이다. 

 134호 고분 앞에 스님이 서서 여인의 가슴 부분과 거의 흡사한 쌍분의 다소 므흣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를 계속 살피던 스님이 말을 걸어 왔다.
"이런 걸 왜 사진 찍어요?"
"그냥 자료로 쓸려구요...."
"성이 뭐에요?"
"왜 그러세요.....?"
"내가 아는 보살님과 비슷하게 생겨서요......"
"아...네....그렇군요.....^^;;" 

이 정도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가슴의 여인이라면 누구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이 아름다운 자태의 쌍분 위로 낮달이 이쁘게 떠올랐다. 

옆에서 본 쌍분의 모습도 아주 환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엉덩이 가운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뒷쪽으로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서 아예 길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경주 시내 장난꾸러기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고분 위에 올라가서 야호~한 경험이 있을것이라고...
고분군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몇이나 고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목격되어 괸리인 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쫒아내곤 한다. 



무덤 사이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에겐 고분 뒷길이 손잡고 거닐기엔 딱이다.
 

  자전거 동호회원들도 비스듬히 기대어 지친 다리를 쉬어가긴 딱인 장소이다. 

호우총도 서봉총과 비슷하게 발굴 이후 분구가 없어지고 평토화된 고분이다.
1946년 이 곳에서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王 
十)'이라 쓰인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그 서체가 압록강 건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와 같은
예서체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분군의 제일 앞에는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되었던 서봉총.(제일 앞 분구가 없이 평평한 고분이다.)
가운데에는 금관총. 뒤에는 노동리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 고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겹쳐져 보인다.
 

관련 포스트 :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1921년 부근 주민이 담장을 손보다가 우연히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이다.
이 때 금그릇,은그릇,금반지,팔찌,유리잔 말안장,토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보게 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세계 고고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경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일제는 우리 고분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되고 무차별로 발굴을 하여 문화재를 출토해내고는
분구도 덮지 않고 내버려 두어 금관총의 모습은 동네 언덕같이 보인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최고의 경제적인 운동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분 주위를 씩씩하게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도시락 싸 와서 고분 앞 벤치에서 연인끼리 나눠 먹는 것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데이트다.

"우리 같이 무덤 사이로 산책이나 할래요....?"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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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아하고 정교한 토기를 본 적이 있으신지......







국보 91호인 이 '기마 인물형 토기'는 1924년 경주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굴한 것이다. 

금령총은 6세기, 다시 말해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쯤의 신라 무덤인데

지하에 목관과 곽을 만들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두껍게 덮은 무덤이다(적석 목곽분이라고 한다).






항공 사진으로 금령총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황남대총,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이 길너머로 보이고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이 노서리 고분군(서봉총이 있는 곳), 봉황대,금령총이 있는 곳이 노동리 고분군이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보물 제338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는데

금관테에 출자(出字) 모양 입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입식 2개를 세우고 곱은옥은 달지 않았다. 

아래로는 금방울,달개 등으로 꾸민 드리개가 달려 있어서 고분에 금령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금령총 내부에서 금관 외에도 금제 허리띠, 유리잔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특이한 점은 금령총의 금제 허리띠의 길이가 다른 것과 달리 무척 짧은 것으로 보아

어쩌면 무덤의 주인은 일찍 죽은 왕자였을지도 모른다고.....






1924년 금령총 발굴 당시의 생생한 사진에서 현장감이 느껴진다.




기마 인물형 토기는 말을 탄 사람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숨은 기능이 있다.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데 쓰이던 주자(注子,주전자)인 것이다.

말 등의 깔때기로 액체를 넣고 말 가슴의 대롱으로 액체를 따르게 되어 있다.







당연히 말 내부는 비어 있어 물 240cc 정도를 담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위의 엑스레이 투시 사진에서 기마 인물형 토기의 속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말을 이용한 독창적인 주자를 만들었는데 왜 말을 디자인에 응용했을까...

이는 말이 죽은 자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경주 덕천리 출토 기마 인물상을 비롯하여 






경주 미추왕릉 지구 출토 서수형 토기와 같이 옛무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 토기와 함께 하인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기마 인물형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고 있어서 앞장 서서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 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출토 당시의 사진 기록에서 실제로 발견 당시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여 있었던 걸 볼 수 있다. 








어려서 죽은 왕자가 말의 인도를 받아 하늘에 도달해서도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편안하게 시종의 호위를 받으면서 살 것을 기원하여 그런 부장품을 넣어 장사지냈으리라....



죽은 왕자의 내세를 위해 무덤에 함께 넣었던 기마인물형 토기.

왕자의 유체는 흙이 되어 흔적도 없어졌지만 기마인물형토기는 엊그제 만든 것처럼 그대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 복제품이나마 들고 한 잔 술을 따라 마시면

"거 인생 참 무상하구나..."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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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능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떠세요?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완결편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지고

무심한 낮달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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